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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6

좁은 기독교, 낮은 기독교 / 정원

LNCK 2007. 10. 16. 21:49
 

◈좁은 기독교, 낮은 기독교                  눅22:27

 

 

*출처 : 정원 목사님의 글 중에서 발췌, 편집 

          http://cafe.godpeople.com/garden7/?B17-70207  > 목사님 근황과 공지 >

          #4. 좁은 기독교, 낮은 기독교에 대하여  (원제목)


◑1. 나의 사명은 ‘좁은’ 기독교, ‘낮은’ 기독교의 전파

 

▲나의 사명의 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성향과 부르심을 따라

(제각기 다른 또는 특수한) 사명과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좁은 기독교, 낮은 기독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개념은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널리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기 원하며

그러한 ‘확장을 부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나는 다른 측면에서 부흥을 생각하며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기독교는 좁은 길이며 좁은 문’이라고 하셨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서 많은 이들이 따라간다고 하셨다.


나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좁은 길, 좁은 문에 대해서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주를 따라가는 길, 영성의 길은 정말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을 제시하고 가르치는 것이 나의 주된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좁은 길인가..

그리스도인들은 그 길을 위하여 정말 대가를 지불하고「천로역정」과 같이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가고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그 길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나 준비 없이도 쉽게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처음 도우미’와 ‘나중 도우미’

그러한 측면에 대해서 100%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복음은 ‘넓은 측면’도 가지고 있다.

또한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너무 어려우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여행의 처음 시작을 돕는 도우미의 사역을 한다.

또한 다른 이들은 나중의 여행길을 돕는 사역을 할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사명에 속한 것이다.

나의 길은 ‘처음 여행을 시작하는 이들을 돕는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주님께서 각자에게 맡긴 것에 따라 다를 것이다.   


▲고난과 대가를 싫어하는 세대

일반적으로 오늘날 신자들은 주를 따르는 것을 가벼이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오는 고난을 싫어하고 불평한다.

단순히 문제가 해결되고 욕망이 만족되는 것을 원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천국의 영광을 얻고 누리는 데에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천국을 향하여 발전해가야 하며

결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차원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리석은 삶이다.


주님을 얻는 길은 어려운 길이다.

천국을 얻는 것은 어려운 길이다.

우리가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수준으로 영혼이 발전되는 것은 어려운 길이다.


거기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굳게 마음을 먹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의 명예를 하나 얻으려고 해도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한다.

유명한 대학에 가는 것을 위하여 수험생들은 잠을 줄이고 노력한다.

각종 시험의 합격을 위하여 고시생들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주님을 얻고 영원을 얻는 것은 쉽게 생각한다.

그것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주를 얻고 천국을 누리며 영혼의 성장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열정과 간절함과 수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좁은 길, 낮은 기독교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

아무 귀찮은 일이 없이 그냥 편하게 은혜를 받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것은

별로 바르지 않다.


성장을 위해서, 영적으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화는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공짜라는 것은 없다.

세상의 재화를 얻기 위해서는 피땀을 흘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주님과 그 진리에 대해서 가벼이 여긴다면 그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치러야할 대가는 - 겸손과 사모함

대가는 돈으로 지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과 사모함으로 지불하는 것이다.

겸손함과 사모함이 부족하다면

그는 주님과 천국에 대해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주님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분이 아니다.


 

◑2. 지금 현실은 ‘넓은 기독교’


▲믿음 좋은 사람이 어두움에 속기만 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다.

그들은 스스로 혼미함에 빠져서 자신을 높은 존재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람이나 사역이나 단체나 교회나 모든 것을 함부로 판단한다.

'누구는 이렇고.. 저 사람은 아직 멀었고...'

이런 이야기를 즐긴다.


그러므로 이런 이들에 의해서 교회나 단체나 모임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어떤 영성 단체나 세미나에서 은근히 사람을 높이는 것을 조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러한 여러 훈련을 받고 나면

자신이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속이는 혼미한 기운이 묻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경우에 착각일 것이다.

주님께 속한 이들은, 함부로 남을 판단하거나

자신을 높이 보거나 하지 않는다.

 

▲일시적 은사 체험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은사가 나타나 예언을 하고 부분적으로 천국을 다녀오면

본인이 큰 은혜에 이른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이다.

일시적인 경험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넓은’ 기독교

(기독교인 가운데도 악평을 하거나 악플을 다는 분들이 꽤 있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런 불평이나 원망이 익숙해지게 한 기독교의 분위기인

넓은 기독교, 대가 없는 기독교, 쉬운 기독교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너무나 넓다. 너무 쉽다.

은혜도 영성도 너무나 대가 없이 쉽게 얻는 것이라고 여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너무나 높다.

주님을 낮추고 자신을 높이기를 좋아한다.



◑3. ‘넓은 기독교=교만’은 무서운 재앙  


▲자기를 높이는 교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성도들의 일반적인 대화 가운데 자신을 높이는 성향은 아주 많이 있다.

그것은 세상 사람과 비슷하다. 그것은 지옥의 성향이며 지옥에서 오는 것이다.


주님께 속한 사람은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모든 영광이 주님께로 가는 것을 원한다.

그들은 인정받으면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면이 있다.


주님께 속하지 않은 이들, (교회에 다니지만) 천국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을 드러낸다.

말씀을 전해도 자신을 드러내며

잠시 찬양을 인도해도 자신을 은근히 드러내는 이들은 많다.


사석에서 무슨 말을 해도 은근히 자기 자랑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한 이들은 천국에 속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직 천국과 멀리 있다.


자신이 높아지는 것은 지옥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지옥의 영들을 끌어당긴다.

인정과 칭찬이 좋다면 그러한 이들은 지옥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죄의 근원이 무엇인가. 그것은 교만이다. 높아짐이다.

거기에서 모든 악과 재앙과 저주가 시작된다.


▲진짜 재앙은 교만

사람들은 저주.. 재앙.. 하면 무서운 것으로 여긴다.

자동차 사고가 나고, 경제적으로 파산을 하고, 불치병이 생기고..

그러한 것을 재앙으로 여긴다.


그것이 뭐가 대단한가. 기껏 해야 죽는 것이다. 죽는 것이 무엇이 대단한가!

우리는 잠시 이 땅에 학교 다니러 온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학생도 있고 조금 빨리 조퇴하는 학생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 대단한가!


진정한 재앙과 저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만이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


자신이 인정받지 못할 때 분노하며 이를 가는 것이다.

그들은 천국과 멀다.

그것이 진정한 재앙 가운데 있는 것이다.

주님의 사람이 되지 못하며 천국의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

세상에 그것보다 무서운 재앙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나를 건드리면 - 열 받는 교만

나를 건드리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 열을 받는 것..

누군가 내 기분을 맞춰주면 즐거워지는 것..

이것이 재앙 가운데 있는 것이다.


교만에서 모든 재앙이 온다. 

모든 죄들이 교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화를 내는 것은 교만이다. 마음이 높은 데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니까 화를 내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 분노하는 교만

모든 일들, 사소한 일들도 자기의 뜻이나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이들이 있다. 그것도 교만이다.


그것은 자기의 뜻이나 기분이나 생각을 우주의 중심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한 이들은 인생과 우주가 자기 생각과 기분대로 흘러가기를 원한다.


그것은 교만이다. 인생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범사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주의 중심은 내 생각이나 기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고 원하심이 되어야 한다.

이들은 주님의 뜻에 범사에 자기를 낮추고 복종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야 ‘혈기 마귀’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왕따를 당할 때 - 분노하는 교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거나 왕따를 당했다고 속상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교만이다.

 

어려움을 겪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오직 반성을 통해서만 발전해갈 수 있다.

화를 내서는 지금 자기가 속해있는 내적인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고통을 증가시킨다.   


▲상처를 자주 받는 교만

상처를 자주 받는 것도 교만 때문이다.

진정 낮은 데 처하는 사람은 상처받지 않는다.

높은 마음을 품고 높은 곳에 있으니까

자기를 건드리는 사람에 대해서 툭하면 상처받는 것이다.


맨날 내적 치유 받고 계속하여 상처를 싸매어주어도

교만을 버리지 않으면 문제만 더 복잡해진다.


많은 경우 내적 치유는 사람을 높이며

사람을 자기중심으로 만들어주고 오히려 원망과 핑계만 더 늘어나게 한다.


상처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은 없다. 교만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상처를 통하여 더 거룩해지고 주님께 사로잡히게 된다. 


▲근심하는 교만

근심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근원은 교만에서 온다.

높은 데 있으므로 주님을 붙잡지 못하는 것이다.


▲열등감의 교만

열등감도 교만에서 온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고 기대하고 남과 비교하니까 열등감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교만과 열등감이 백지 한 장 차이인가요?)

 

▲자신에게 실망하는 교만이다.

인간에게는 원래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악은 자신이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 오는 것이다.


▲비교의식도 교만이다.

우리는 남보다 나아야 할 이유가 없다.

남보다 나아지고 싶다는 자체가 교만이다.

우리는 주님이 필요하셔서 창조한 존재일 뿐이다.

발이면 발이고 손이면 손이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발이 눈이나 심장보다 나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교만

한 지체가 머리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그 지체의 부분이 커지고 확장되는 것이 암이다.

죽어야 할 세포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서 이상 확장 증세를 보일 때 그것이 암이고

결국 전체 몸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체는 자기의 위치를 알고 순종하며

자기의 특성과 체질에 따라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지

대단한 존재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상의 성향이며 천국의 성향이 아니다.   


▲남을 깔보는 교만

남보다 나아지려고 하는 자체가 세상의 시스템이지 천국의 시스템은 아니다.

그것은 마귀가 만드는 것이며 어리석은 자들이 거기에 속아서 잡히는 것이다.


자기보다 나아보이는 자를 부러워하고 시기하게 만들며

모자라 보이는 자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 마귀가 항상 하는 짓이다.


나은 사람이란 없다.

모두가 자기 십자가가 있고 자기 훈련이 있고 사명이 있을 뿐이다.

다만 충성되고 낮은 자는 좀 더 주인의 마음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인내의 부족도 교만이다.

높은 곳에 있으니까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에 참지 못하는 것이다.


지나친 죄책감도 교만이다.

진정한 죄책은 눌림이 아니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핑계 대는 것도 교만이다.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모르니까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 전가를 하면서 자꾸 변명을 하는 것이다.


▲툭하면 억울하다고 여기는 것도 교만에서 오는 것이다.

악한 죄인들이 맞아도 마땅한 것이지 억울한 것이 어디 있는가?

정말 억울한 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님뿐이다.

주님만이 아무 죄 없이 고통을 겪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억울하다고 하시지 않는다.


주님이 억울하다고 하시지 않는데 우리가 억울하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보다 높으며 우리의 고난과 십자가가 주님보다 더 크다고 하는 것이다. 


▲근원은 똑같이 교만인데, 증상은 각자의 약점에 따라 다르다.

짜증, 신경질, 거짓,. 교활함, 음란, 도박.. 등 모든 종류의 죄가

그 근원은 교만에서 시작된 것이다.


교만은 피조물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높아져서 주님을 붙들지 않는 것이다.

그가 주님을 버리므로 주님은 일시적으로 그와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주님이 떠난 자리에 악령이 다가와서

각 사람의 성향에 맞는 재앙을 공급한다.


이 사람에게는 음란을,

이 사람에게는 거짓과 교활함을,

이 사람에게는 아무에게나 가르치려고 하는 증상을,

이 사람에게는 자기가 깊다는 의식을..

각 자에게 먹혀 들어가는 어두움의 기운을 준다.


그 재앙의 시작은 주님을 낮추고, 자신을 높였을 때부터 오는 것이다.



◑‘넓은 기독교=교만’의 해결책

 

▲낮아짐만이 해결책

낮아진 자에게는 주님이 오셔서 긍휼을 베푸시며

높아진 자에게는 주님이 떠나시고 귀신들이 찾아와서 그들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낮아지는 것 외에는 아무런 해결 방법이 없다.


아무리 기도해도 주님의 임재가 멀다고,

은혜가 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불평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자신에게 임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주님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지

그것을 주님께 항의하거나 따져서는 안 된다.

 

나는 단순한 한 가지의 처방을 항상 이야기한다.

낮아지라고..

티끌만큼..

낮고 상한 마음으로 주님께 엎드리라고..

그러면 주님은 반드시 임하신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의 중요한 본질 중 하나


▲‘유명세’ 대신에 ‘생명력’을 구하라

오직 높은 자에게만 주님은 임하시지 않는다.

가고 싶어도 가실 수 없다.


사역자들도 성도들도 똑같이, 자기 영혼의 깨어남을 사모하고 구해야 한다.

(유명해지려고 하면 안 된다. 영적인 깨어남이다.)

 

영혼이 깨어나 영광의 풍성함을 얻게 되면

자연적으로 생명이 풍성해져서 성도들을 도울 수 있다.

자신이 살면, 자연히 남들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 


▲안수도 필요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어딘 가에서 안수를 받고 영적인 능력을 접목 받는 것도... 있으면 좋다.

그래서 사람들은 능력 있다고 알려진 사역자들에게 가서 안수 받으려고 애쓴다.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히 은사의 흐름, 영의 흐름이 있다. 그것은 접촉을 통해서 흘러갈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접목되는 것은 생명의 외곽에 속한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모세에게 안수를 백 번 받는다고 해도

모세의 능력 일부분은 받을 수 있겠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모세의 중심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은 개인 영혼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그것은 전이되지 않는다. 


▲안수보다 더 중요한 것 - 간절하고 겸손한 자기 마음

그러므로 그 어떤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중심의 갈망하는 마음 자세’이며

‘티끌처럼 엎드러지는 것’이다.


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러져서 땅 위에 입술을 대는 것이다. 애3:29

그것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며 영혼을 맑게 해 준다.


동기가 자기중심적인 이들,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이들은 오래 갈 수 없다.

몇 가지 능력을 받겠지만, 주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한 이들은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직 중심이 순결하기를 힘써야 한다.


▲영성을 추구하면서도 교만할 수 있다.

나는 영성을 추구한다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훈련을 받고 경험했다는 많은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당신은 이 단계에 있다, 저 사람은 영이 낮다, 깊다.

육이 어떻다. 영이 어떻다, 혼이 어떻다..

나는 이것을 경험했으며 당신은 아직 멀었고, 내 수준은 이렇고..’

말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기도원에서 누구의 영이 높고 깊은지 밤을 새워서 입씨름하는 이들도 보았다.

그것은 치매 증상보다 나을 것이 없는 증상이다.

초기 증상에서 더 심해지기 전에 부끄러운 줄을 알고 얼른 돌아와야 한다.


주님을 구하는 이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안다.

그들은 자기에게서 드러낼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안다.

그들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느니 차라리 광야에 혼자 거하고 싶어 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너무나 넓다. 좁은 길로 가지 않는다.

천국의 보화 됨에 대해서, 그 가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며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걸지 않는다.


세상의 영광과 편안함에 대해서 갈망하지만

영혼의 깨어남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추구하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너무 높다.

거칠고 강퍅하며 완악한 상태에 있다.

낮고 주리고 상한 마음으로 주를 구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러므로 천국의 영광의 빛에 대해서 무지하다.


영계에서 오는 말할 수 없는 행복감, 지복의 상태가 무엇인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허탄한 기쁨만 구하는 것이다.

 

그런 성도들의 마음 상태는 항상 쫓기며 불안하다.

쉽게 화를 내고 염려에 빠지며 혼란상태가 된다.

그것은 아직 영이 제대로 눈뜨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영성이 발전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신론자의 상태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이다. 


▲좁은 길로 가야만, 낮은 위치에 있을 때만 영의 세계가 열린다.

지옥이 닫히게 되며 천국이 열리게 된다.


각 사람의 영혼이 깨어나고 그 영혼의 문이 열릴 때

새롭고 아름다운 세계가 시작된다.

이것은 공상이 아니다.

한 두 번 천국에 다녀오고 환상을 보고.. 그런 것과 다르다.


▲간증도 겸손하게 해야

언젠가 천국경험의 간증에 대한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비디오를 보기 전에는, 성도들의 영이 아주 맑고 아름답고 풍성했는데

비디오를 보기 시작하면서 영이 어둡고 혼미해지기 시작하더니 다 눌리게 되었다.

 

천국에 대해서 간증하는 것은 좋지만, 그 간증자의 영은 풍성하지 않았다.

혼미하고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그러한 간증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영계의 체험은 일시적인 것으로 한 순간에 영이 맑아지는 것이 아니며

점차로 영이 깨어날수록

천국의 실제적인 거룩함과 영광을 매순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영적 성숙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는 뜻인듯)

 

기질적 차이는 반드시 있다.

어떤 이들은 체험을 너무 좋아한다. 신기한 경험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기질적인 것이다.


어떤 기질은 태어날 때부터 지식을 좋아하고

어떤 기질은 태어날 때부터 활동을 좋아하며

어떤 기질은 말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기질은 글쓰기를 좋아하며

어떤 기질은 신기한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기질에 속한 것이다.


체험을 좋아하는 기질은 신비한 영적 체험에 마음을 열고 추구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질을 벗어나 근원을 구해야 한다.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다.


이것은 다른 기질도 마찬가지다.

지식을 구하는 기질은 지식에만 빠지지 말고,

지식의 근원인 주님을 구해야 한다.

 

활동을 추구하는 이들도 움직임의 기쁨과 일의 기쁨, 성취의 기쁨보다

주님 자신을 구해야 한다.


▲‘기질’보다 ‘주님’을 구하라

체험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중심이 되면 속기가 쉽다.

마귀는 쉽게 여러 체험을 모방하고 가져다주며

그 사람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공급한다. 그렇게 되면 쉽게 망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 자체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은 수정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바른 체험은 유익하지만 한 사람의 영적 성장에는

수많은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기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다지 부러워할 것은 없다.

지적인 기질의 사람은 겉으로는 체험을 무시하면서

은근히 속으로는 열등감을 가지고 체험을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별로 그럴 필요가 없다.


▲낮아짐 가운데 영혼이 맑게 깨어나야

사람들은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는 주님께 집중하지만

삶의 모든 순간에서는 쉽게 주님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영이 깨어나면 깨어날수록

모든 순간과 모든 의식에 주님의 임재가 선명해지게 되며

오직 주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된다.


항상 매 순간에 주님을 붙들고 살게 된다.

주님의 지배하심의 분량이 점차로 증가되는 것이다.


영혼이 천국의 실제를 누려갈수록 그 영혼에는 실제적인 천국의 냄새가 나게 된다.

점차로 고요하고 안정된 심령이 나타나게 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별로 요동하지 않게 되며

전쟁의 소문이 들려도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는 수많은 파도가 일어난다.

분노가 일어나기도 하고, 미움이 일어나기도 하며

근심과 두려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음란이나 후회나

각종 악한 생각이나 여러 영들의 바람이 일어난다.


하지만 영이 깨어나 실제적인 주님을 누리고 천국의 대기를 맛보게 될 때에

그들은 점점 더 마음의 풍랑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죽음도 재앙도 환란도 그 어떤 것도 마음의 풍랑을 일으킬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주님은 파도 앞에서 떠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그처럼 파도 앞에서 고요하고 잔잔하며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한 것이 천국에 속한 사람의 심령이다.

주님이 주신 그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다. 


 

◑나가는 말


오늘날 기독교가 너무 넓어져서 세상의 유행을 따라가므로

이 깊고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가 감추어져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과 똑같이 탐욕적이고

명예와 권세를 구하며 편하게 사는 것을 구하고

영혼의 깨어남과 영광스러운 보화를 얻는 것에 대하여 무지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너무 높아서 거칠고 쉽게 혈기를 부리며

완악하고 미워하며 서로 판단하고 불안하고 마음의 풍랑과 파도가 많다.

그리하여 천국과 멀리 있으며 그 영광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나 비극적인 일이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 주님께 속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랐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 안에서 천국의 실제적인 흐름 가운데 있었다.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알았다.


초대 교회 당시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서 길 거리에 시체가 즐비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두려워했으며 시체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어떤 일단의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그 시체들을 만지고 처리하여 장사를 해주었다.

그들은 여럿이 같이 움직였지만 고요하고 잔잔하고 평안했으며

조용히 노래를 부르면서 시체를 묻었다.


사람들이 서로 소곤거리면서 물었다.

"저들은 누구지?"

다른 이들이 대답했다.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남들은 저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는 그렇게 알려졌다. 


화려한 교회도, 큰 건물도 없었고 초라한 가정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들은 주님의 실상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의 기독교, 교회는 성경에 나타난 교회와 멀다.

그들은 천국에 대해서, 주님의 임재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 사람과 달랐다. 


좁은 기독교, 낮은 기독교를 나는 원한다. 그리고 사모한다.

나는 좁은 기독교, 낮은 기독교가 천국의 실상을 열어준다고 그렇게 믿는다.

준비된 이들에게 그 영광의 세계가 알려지기를 나는 간절히 원한다.

낮은 티끌에 거하는 자들이, 좁고 좁은 길을 걸으며 좁은 문을 통과하는 이들이

세상에 감추어진 그 영광의 주님, 영광의 보화를 얻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 길을 구한다.

 

부디 이 길을 구하며 걷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낮고 상한 심령,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이 길을 걷는 이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발견할 수 있기를.. 

나는 갈망하고 사모한다.


오, 주님. 우리에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낮고 부족하고 어린아이와 같아서 언제나 오직 주님을 구하며

주님의 은총이 없이는 잠시도,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그러한 주님께 속한 영혼들이 일어나도록..

주님.. 임하시옵소서. 도우시옵소서..

아멘.. 주님.. 할렐루야..

 

<2006.10.28. 정 원 목사 씀, 축약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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