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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시스의 가난 이해

LNCK 2008. 1. 8. 20:41

 

◈성 프란시스의 가난 이해                눅6:20

  
지난 2천년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가난'을 그저 '물질적 가난'으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아래의 뜻으로도 '가난'을 이해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했을 때의 가난! 

▲형제에게 분노하는 이유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 때문에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 아무 소유도 없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위에서 상처 받고 화를 내는 것은
그로부터 좋은 대우, 특별 배려, 인정, 존경, 주목 등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다.

이 모두를 마치 자기 소유(↔하나님의 소유)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타인이나 자신에 대한 강한 주인의식(소유욕)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과 행동, 태도 등으로 나에게 존경을 표하고,
나의 내적, 외적 능력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인격 침해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자기 가치를 몰라준다고 화를 내고 인격 손상이며 치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격적 모욕과 멸시를 잊어버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향해 공격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상처 받은 내 감정은,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자기 소유)인 것을
잊어버리는 데에서 기인한다.

예수님은 완전한 자아포기, “영적 가난”(geistliche Armut)을 통하여
존경과 인정받을 권리의 포기 같은 죄를 이기셨다.

“물질에서의 가난”은 가난의 한 측면일 뿐이다.
여러 가지 기도와 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고난을 극복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빰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당한 취급을 받을 때
어떻게든 극복하는 것이 과제가 아니라
오히려 부당한 그 일을 조용하고도 평온한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 가난에서 우러나오는 힘이다.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포기하라
가난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즉 소유욕, 권리 주장, 등의 모든 영역에서의 포기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좋은 점만이라도 인정받고 알아주기를 원한다.
자기가 사랑받지 못하거나 다른 이들의 관심 밖에 있다고 느끼면
즉시 내적 고요와 영혼의 평화를 잃어버린다.

그는 이렇게 철저한 내적 가난을 견디어 낼 수 없다.
그는 자기의 빈손과 빈 마음을
자기변명과 자기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고발하는 일로 채우려 한다.

이것이 발전하면, 혼자 고립되어
마음은 굳고 얼어붙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여

부자연스럽고 융통성이 없으며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 국한 되어 있고, 자기중심적이어서
하나님께로 나아 갈 수가 없다.

그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로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한다.

참으로 가난한 이는 어떤 일에도
즉시 발끈하는 반응을 보이거나 흥분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어떤 일이 계획과 다르게 풀려가더라도
끝없이 불평하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며 미련을 가지기 보다는 앞을 바라보며
다가올 것을 기다리고, 달라진 상황에 자신을 적응 시킬 줄 안다.

참 가난을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도록 자기의 뜻은 조용히 접어둔다.
자기의 권리 주장이 하나님의 거룩한 활동에 방해되지 않게 한다.

어떤 불행이 닥치거나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지면
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찬미하며
이를 통해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기를 바라고 믿는다.

진정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온갖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몸과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이다. (펀 글)

........................................... 

 

아래는 오상선 님의 긴 논문을 (실례지만) 읽기 쉽게 압축했습니다.

더 연구하실 분들은 원문을 보세요!  http://blog.naver.com/kslofs/50008198861

<가난의 신학>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난해질 때 부흥되었다.

 

‘가난’은 바로 교회쇄신과도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상 가난의 해석은 교회를 통해서 볼 때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때로는 세 복음적 권고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고,

때로는 가장 뒷자리로 밀려나 무시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회의 쇄신이 일 때마다

가난 문제는 다시금 그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유한 중세교회를 구한 프란시스의 가난

중세의 찬란한 황금시대에서 가난이 다시 그 탁월한 위치를 회복하게 된 것이

바로 성 프랜시스를 위시한 탁발 수도회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12-13세기의 이러한 개혁운동 안에서 가난이

그 탁월한 평가를 받게 된 것도 불과 몇 세기를 가지 못하였다.

 

이른바 종교개혁에서 프랑스 혁명이라는 일련의 큰 대가를 치루고서야

세속적인 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가 가난으로의 길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자발적이지 않으면 외압에 의해서 된다는 뜻)

 

그러나 이러한 큰 충격하에서도 또 다시 물질문명의 발달과 황금만능주의의 팽배로

인하여 가난과는 멀어진 교회가 되어 갔으며,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시 가난에로의 길로

그 쇄신의지를 명백히 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빈익빈 부익부 사회는 ‘가난’(청빈)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더욱더 어렵게 진행되어 가고 있다.

과학의 발달과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세계는 더욱더 ‘부익부 빈익빈’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세계의 한쪽에서는 부의 화려함이 인간 승리의 화신이 되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아로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억압받고 소외당하고 짓눌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청빈의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프랜시스로 돌아가자.

사실 수도회 일부에서는 이미 ‘가난서원의 무의미성’이 거론되고 있는가 하면,

세속인들은 그 무의미성을 갈수록 힐책하면서,

우리에게 더욱더 가난서원에 합당한 교회가 되기를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와 수도회 안에서는 이를 알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난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단지 “재물 사용의 절제 및 기관장에게 허락을 득함” 등으로 밖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가난을 이상으로 가난을 살아갔던 가난의 성인 아시시 프랜시스(1182-1226)를

통해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처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프랜시스는 가난을 살아감으로써 그 결과 교회를 쇄신시켰고

복음적 완덕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다.

실상 교회 안에서 성 프랜시스만큼 가난과 직결된 성인도 없었고,

그래서 ‘가난’하면 성 프랜시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다.

 

▲늘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 체험하면서 산 삶이

예수를 본받은 가난한 성자의 삶을 가능하게 했다...

 

아시시의 프랜시스에 대해서 많은 아름답고 의미 있는 말들을 많이 해 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지만, 이 단순하고 매력적인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는,

그가 자기 존재의 바로 그 핵심에서

그리고 바로 그의 삶 중심에서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프랜시스는 이러한 생생한 하나님 체험을 통해 복음을 실천적으로 살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랐으며, 가난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가까이 하는 데서, 자원적 가난의 삶이 자연적으로 따른다. 

 

▲복음서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 그는 가난했다.

성 프랜시스는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를 읽고 묵상함으로써

자발적인 가난의 신학적인 뜻을 명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만이 아니라 실질적 행동을 통해,

신앙생활의 증거로서 자기가 가난을 직접 실천하였다.

 

“가난이란 무엇이냐?”란 질문에, 성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다”라고 대답한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가난한 생활이 그의 모델이었다.

 

▲가난(청빈)에 대한 잘못된 동기

1)먼저 전통적 수도생활에서 실천해 온 것과 같이

금욕적, 수양적 생활을 위한 길로써 가난을 택하는 것. 즉 불교식 가난.

 

2)그렇다고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의도 하에

교회쇄신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써 가난을 제시하는 것. 즉, 개혁을 위한 가난.

 

3)또 성 도미니크처럼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참된 크리스천 생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가난, 즉 남이 보라는 식의 가난. 

 

이러한 모든 것들은 프랜시스의 가난의 동기라기보다는

가난실천에서 저절로 수반되어 나온 결과에 불과하다.

 

▲가난의 참된 동기

프랜시스가 가난을 택하게 된 동기는

가난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가난은 완전히 사랑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결과이다.

(그런 '가난한' 사랑을 받았으니, 나도 그렇게 사랑한다는 뜻인 듯)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중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발견해 나간다.

회개 초기에 기사 정신에 이끌린 성인은,

이른바 ‘스뽈레또 환시’를 통하여 가난을 자기 생의 목적과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계시를 받게 되지만,

가난한 자, 특히 나병환자와의 입맞춤을 통해서

그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복음에서 가난한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

가난을 항상 그리스도의 삶과 그 사랑에 직결된 것으로 여겼다.

 

성인이 그렇게도 열렬하게

‘가난 부인’(Lady Poverty, 가난을 부인으로 삼음)을 사랑한 것은

가난이, 신랑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버림을 받고 멸시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은 가난’에 대한 성인의 충실성은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이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난을 택하기를 원하셨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가난을 선택하셨기에..,

그래서 성인은 동냥을 청하러 다니는 일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는 신비는

성 프랜시스의 가난의 신학적 기초이고 우선적인 동기이다.

 

복음서를 펼칠 때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언제나 앞에 나타났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성 프랜시스는 자기 생애의 모든 행동에서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 같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리스도의 수난의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마태와 누가의 ‘가난’ 비교

누가가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한다고 해서

가난 자체를 찬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예수로 하여금 자신이 가난 자체를 축복하러 온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무슨 특권이 있다면

그들이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보다 쉽게 개방될 수 있으며,

마음으로 더욱 가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누가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고 하는 반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눅6:20

 

마태는 물론 제자들도 곁에 있었지만

‘군중들’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마5:1, 3

 

이렇게 보면 마음의 가난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요구되는 보편적인 권고이며,

물질적 가난은 특별히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인 수도자, 성직자들에게

덧붙여 요구되는 권고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마태는 군중들에게 ‘심령의 가난’을, 누가는 제자들에게 ‘물질적 가난’을 가르쳤다.)

 

두 병행구절에서 공통되는 점은,

가난은 하늘나라를 획득케 해 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복음적 가난의 탁월성이며 가난을 살아야 할 이유가 된다.

 

▲소유권 남용의 죄

모든 피조물은 주님의 소유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권리를 남용하여 그것을 자기 것처럼 소유할 때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을 자기 것인양 생각하고 소유하려 한다.

이러한 소유권 의식은 하나님과의 친교의 길을 막는 동시에

다른 인간 공동체에 대해서도 교통의 길을 막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가난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성인에게 있어서 물질적 가난은 타인에 대한 강요원리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실천원리라는 점이다. ★

왜냐하면 타인에게 물질적 가난을 강요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의 가난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자신에게는 물질적 가난에 끊임없이 매달리도록 자신을 몰고 갔지만,

실로 마음이 가난하였기에 모든 사람이 물질적 가난을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마음의 가난과 물질적 가난의 관계

프랜시스에게 있어서 물질적 가난은

복음적 가난이 요구하는 내적 마음 자세를 갖추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수도자는 어떤 추잡한 이익을 얻고자 이리저리 돌아다니지도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마음의 가난은 물질적 가난의 기초이며,

마음의 가난 없이 물질적 가난은 “모래 위에 기초를 쌓고 집을 짓는”것과 같다.

또 역으로 물질적 가난 또한 마음의 가난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물질적 가난’ 없이 참된 ‘마음의 가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참된 ‘마음의 가난’이 없이는 ‘물질적 가난’은 무의미한 것이며,

‘물질적 가난’ 없는 ‘마음의 가난’은

기초만 쌓아 놓고 건물을 완성하지 않은 것과 같다.

 

‘마음의 가난’과 ‘물질적 가난’에 공통되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가난이 하늘나라를 획득케 해 준다는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믿으시오. 가난은 구원의 특별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근원이며 모든 완전의 뿌리이며

그것의 결실은 보이지 않으나 풍성하오.

그것은 사기 위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팔아야 할

복음서에 나오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이요.’”

 

가난한 사람이 겸손하다. 가난한 사람이 은혜를 사모한다.

가난한 사람이 다른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고 돕는다.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천국은 그들의 것이 된다.

 

▲마치는 말 ; 13세기 시대의 대안 성 프랜시스

성 프랜시스가 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7세기 반이나 되었지만,

지금도 그는 우리 가운데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성인의 인격은 사람들을 이끌고 매혹하며,

한편으로는 가치관에 대해 의문과 질문을 던지는 현대인의 삶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가 아우구스트 프란�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위대한 성인들이란 언제나 그 시대의 특별한 필요와 어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이다.

아시시의 프랜시스는 내면적인 소명과 은총에서

당시 교회와 사회가 처해 있는 큰 딜레마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즉 부유하고 강력해진 교회 및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그리스도교 사회는

그들의 재물에 굴복하고, 기난한 시민 층과 접촉을 잃을 위험에 처하여 있었다.

빈자들과 일치할 수 있는 길은 권력과 폭력이 아니라,

복음의 정신(가난의 실천)으로 분열을 내면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었다.

 

프랜시스는 그리스도를 문자 그대로 모방하여

가난 이상을 솔선수범함으로써,

그러나 동시에 타인의 재물을 배척하거나 또는 소유물 자체를 본시 나쁜 것으로

형용하지 않음으로써... 단념하고, 동시에 소유하는 길을 가르쳤다.”

 

오늘날의 교회와 사회도

프랜시스가 가난 이상을 살았던 13세기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프랜시스의 가난 이상을 살 수 있으며,

교회와 사회가 처해 있는 딜레마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난 이상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프랜시스처럼

무엇보다도 각자의 신앙체험, 하나님 체험을 강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생생하고도 인격적인 하나님과 교제 체험을 통해서... 가난을 살 수 있다.

 

그렇지 않을 때 가난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환하기가 십상이다.

일례를 들면 ‘해방신학'으로 빠지게 된다.

 

어떤 이들은 프랜시스를 사회 개혁자로 묘사하고 싶어 한다.

오늘날의 부조리한 상황이 그런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대로 프랜시스는 사회 개혁을 목적으로 가난을 살지 았았다.

오히려 기쁨 가운데 가난을 삶으로써 ‘평화의 도구’가 되었으며

사회와 교회가 점진적으로 개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프랜시스가 이해하는 바대로 참된 가난을 살 때,

오늘날 사회와 교회도 하나님 나라를 향해 올바른 여정을 걸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옛날의 성 프랜시스의 삶을 오늘날 그대로 모방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정신, 그 신학, 그 삶의 본질은 - 7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반드시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대의 대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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