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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 세 천사의 선포

LNCK 2008. 5. 16. 10:07
 

◈세 천사의 선포                               계14:6-13



본문에는 역사의 최후의 위기를 앞두고 세 명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각각의 천사들이 종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그 메시지에서 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늠하게 됩니다.



◑첫째 천사의 선포 - 복음을 전파하라                   계14:6~7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1)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2)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3)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2‘) 하더라. 계14:6~7


▲1. ‘영원한 복음’  14:6

천사가 공중을 날면서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한 사례는 없습니다.

어떤 주경학자의 말처럼, 이 천사는 그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마지막 때에 그것을 전달할 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영원한 복음>이라고 말했을까요?

복음 자체의 효력이 시공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과거에도 복음이고, 지금도 복음이고, 앞으로도 말세에도 같은 복음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복음’입니다.

그 영원한 복음의 능력은, 진실로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바꿉니다.


▲2. 그렇다면 우리가 말세에, 이 영원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14:7a

지구촌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②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14:7b

이 모든 백성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미입니다.

인간이 다른 모든 종류의 피조물과 전적으로 다른 한 가지 특성은 -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배를 배우지 못한 사람,

나를 지으신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들을 향한 심판의 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3. 심판의 임박성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14:7


역사의 종말이 가까울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천사가 암시해 줍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를 드리게 해야 합니다.

 

내 개인적 종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늘 코 앞에  임박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박한 종말을 당한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복음전파 우선적 삶입니다.



◑두 번째 천사의 선포 - 바벨론의 멸망                   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14:8


▲성경에서 바벨론 - 하나님을 거역한 세속성의 상징

문자 그대로의 바빌로니아 왕국은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하나님을 반역하는 모든 세속성을 대표하는 바벨론의 원리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바벨이란 이름이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0장입니다.

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꾼인 니므롯이 바벨의 시조입니다.

이어지는 11장에는 그 유명한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니므롯의 선동 때문에 바벨탑이 쌓아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바벨탑 사건이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노하실 것에 대비해서 다시는 흩어지지 말고

똘똘 뭉쳐서 이제부터 우리의 이름을 내자고 하면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주장,

그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 중심의 문화, 인본주의 문화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모든 사고방식과 노력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이 바벨의 원리가 점점 더 이 땅에 횡행할 것입니다.


▲예언적 과거 동사

두 번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쓴 것은

그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강조’의 표현입니다.


또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인데 과거로 표현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경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인데 그 가능성이 너무도 확실할 때

‘결과 동사’ 혹은 ‘예언적 과거’라고 하는 과거 동사를 씁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속성이 기어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마치 무너질 것을 확실히 바라보고) 과거 시제로 쓴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왜 무너집니까? 음행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섬기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적인 음행>입니다.

우리의 애정, 우리의 경배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에게서 다른 데로 관심을 옮겨가는 것이 바로 음행입니다.


음행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바빌로니아 왕국은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부터 계속 강조되는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상 중에 가장 큰 우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출세하고, 성공하고, 부자되고... 이것이 바로 우상, 바벨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지어졌는데 말입니다.


▲구약시절부터 예언된 바벨론의 멸망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 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렘51:7


바벨론은 바빌로니아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게 바벨론의 독주를 마시고 미치게 합니다.

전 세계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나라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創傷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렘51:8


바벨론은 무너지지 않을 것같이 그 강성함을 자랑할 것이지만,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파멸 속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때입니다. 

두 번째 천사는 바벨론의 몰락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멸망할 세상과 함께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진정한 애정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말세를 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식에 잘못 투자해서 휴지조각이 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말세에는, 자기 전 생애를 송두리째 망하게 하는 일이 생깁니다.

‘바벨론’에 올인하고, ‘바벨론’에 목숨 걸 때...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자기 자신의 우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8:10

 

 

◑세 번째 천사의 선포 - 상 과 벌                      14:9~13


▲1. 벌 - 쉬지 못함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짐승의 표를 받았던 사람들,

그들에게 임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습니다.

그 고난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절에 나타납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계14:11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세상을 따라서 살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편하게 살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결국은 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이 고통이 복음을 거절하고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형벌입니다.


▲2. 상 - 쉬리니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킨 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 때문에 죽은 그리스도인들,

이들이 받는 복의 내용이 13절에 나타납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14:13

여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과 거절한 사람의 축복과 형벌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나타나 있습니까?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쉼이 없으나 신앙을 지킨 성도들에게는

마지막 보상으로 쉼이 주어집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는 마지막에 쉴 수 있는 자,

마지막에 유쾌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자,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자입니다.


하루의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쉬면 제대로 쉴 수 없습니다.

또 마치긴 마쳤는데 부당한 방법으로 마쳤을 때도 편안히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주고

잘 보낸 일생이 편안한 죽음을 가져다준다”고 말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14:13a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

도덕적 성실성과 인격적 성실성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며 살았던 사람들,

그들만이 주 안에서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진정한 안식입니다.

<안식에 대한 인간의 바램>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했습니다.

누구나 다 진정한 쉼, 참된 쉼을 누리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희랍 사람들은 월요일 날 쉬었고 페르시아 사람들은 화요일 날 쉬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앗시리아 사람들이, 목요일에는 이집트 사람들이,

금요일에는 터키 사람들이 쉬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에 쉬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쉬는 것은 주일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안식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있지만,

결국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인간의 바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옛날 미국 남부에서 학대받고 시달리던 흑인 노예들이 부르던 노래 중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 어느 날, 내일이 일요일이 되리라”

주일에는 쉴 수 있으니까 그 쉼에 대한 열망을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인간의 열망, 그 영원한 안식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예배당만 왔다갔다 하면서 산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 성실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오늘날 우리 인생에 너무도 필요한 안식,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 사명에 충실히 살았던 사람에게

어느 날 주님은 “내가 너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리라”고 나를 부르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마지막 날의 그 멋진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말세라고 하는 이때에 더욱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동원 목사님 설교 정리, 연도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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