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8

1325 빛과 소금으로 사는 사람

LNCK 2008. 6. 14. 23:35
 

◈빛과 소금으로 사는 사람  (모두 펀 글, 출처 생략)



◑꾀꼬리가 계속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이유


어느 날 꾀꼬리가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자기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데,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착한 꾀꼬리를 보며 탄식하셨습니다.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구나.”


주님의 부름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개구리를 탓하며 노래를 멈추면 안 됩니다.

빛은 어둠을 탓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한 작은 빛이, 이 어두운 세상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당신이 없으면, 이 세상은 좀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염소를 키워본 경험


혹시 양은 아니더라도 소나 염소를 키워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서 학교를 갔다 오면

소와 염소를 풀밭으로 몰고 다니며 논 적이 많았습니다.


즐거움보다는 귀찮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때로는 아무 데나 묶어놓고 친구들과 놀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집으로 몰고 오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귀찮은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소나 염소뿐 아니라 여타 동물들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잘 따릅니다.

그러나 동물들을 다루는 데 문제가 있다면

사람들이 동물들을 <억지로 따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을 다루는 사람은 동물과 같이 호흡을 해야 합니다.

가끔은 이야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고삐가 없어도 동물들이 주인이 어딜 가든 잘 따라다닙니다.


또한 주인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

주인이 위급할 경우 주인을 구하고자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을 사랑하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내버려둔다면

동물들이 오히려 주인을 들이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꼭 성직자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가정, 사회,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하는 목자들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어린 행동 하나가 큰 힘이 될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의 좋은 모습이 그들로 하여금

공동선을 위하는 데 기꺼이 동참하게 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으로 대해야, 사람들이 나를 잘 따른다는 말이군요.

왜 사람들이 나를 잘 따르지 않는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내가 장벽을 쌓으니까 관계가 멀어진다.


한 사형수가 밥이 나오면 조금 떼어 창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새가 날아와서 그것을 먹는다. 어디 그뿐이랴.

감옥의 이리저리 구멍 뚫린 곳으로 다니는 쥐들에게도

그렇게 약간의 먹을거리를 놓으면 쥐 역시 다가와서 먹어치우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형수가 먹는 양은 줄어들고, 새와 쥐에게 먹이는 양이 늘어났다.

한참 뒤에는 새와 쥐는 그의 친구가 되어 아예 갈 생각도 안 한단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쥐들이 사형수의 손으로부터 몸통 심지어 머리에까지

돌아다니며 함께 논단다. 야생동물들은 절대로 사람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사형수들은 일심에서 사형이 확정되면 굉장히 초조해지며 불안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최종 재판이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생각이 달라진다고 한다.

생각이 달라진 것은 바로 ‘나’라는 것, ‘자기’라는 것,

그 자체가 끝난 것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제 죽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며

나 자신의 경계가 사라지니까, 동물이 그에게 모여든다.


반면에 자기가 살아있을 때는

‘쥐는 더러운 동물이다. 병균을 옮기는 동물이다.

인간의 먹을거리를 훔쳐가는 못된 것이다!’ 라는 등의 생각을 품게 되고

그러면 쥐는 결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데 쥐가 사형수에게 가까이 올 수 있는 것은

사형수 자신이 이미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쥐와도 함께할 수 있다 라고 자기를 포기하고 내놓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너다’라며 ‘나’라는 장벽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와 관계가 서먹한 사람은

내가 속으로 뭔가 장벽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제의 글이군요.

또한 그런 장벽을 허물어버리면, 누구와도 친근한 사이가 될 수 있다는 군요!

 

[주제별 분류] 빛과 소금 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