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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2~2003

이 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습니다

LNCK 2008. 7. 31. 15:40

 ◈이 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습니다       히13:14       -출처 보기-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13:14

 

 

◑우리가 여기에 영구한 도성을 갖고 있지 않다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이 세상에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가십시오. 여기 이 세상에는 영원한 도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도성이란 말은 성읍, 혹은 시가지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도성’이란 말은 은유적으로 사용되면, ‘든든하고 의지할 만한 것’을 나타냅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게,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는 거처를 제공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만든) 도성의 기능입니다.

 

타락한 아들 가인은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인류 최초의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그 성읍을 명명했습니다.

성읍 에녹이 건축된 이후 인류의 역사는 <도시 건설史>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무슨 신시가지 건설로 이어지고,

모델 하우스 오픈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 역사는 <도시 몰락사>이기도 합니다.

가인이 세운 최초의 성읍은 이미 흔적도 없이 수 천 년 전에 사라졌습니다.

가인은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주장한 인류의 대표였지만 그의 삶은 불안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만한 벽을 만들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던 불행한 사람

이었습니다.

 

가인이 자기를 위한 첫 성을 쌓은 이후로,

사람들은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 많은 성읍을 세웠습니다.

고대 유명한 성읍들 테베, 니느웨, 바벨론 모두 당대에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던

성읍들이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정확한 위치마저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천년 영화를 자랑하던 경주를 살펴보십시오.

넓은 시가지에 많은 주민이 살았지만 그 영화를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울산이 경주보다 커질 줄을 당대의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 경주는 울산의 위성도시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참 경주가 잘 나갈 때는 세상에서 엄청난 도시였습니다.

요즈음은 도시가스로 난방과 취사를 하지만

이미 그 때 집들을 그을리지 않기 위해서 즉 도시 환경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취사를 위해 숯만 사용하도록 경주에는 법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경주의 영화가 퇴색한지 지금 천년이 지났습니다.

 

옛 도읍지 공주를 둘러보십시오. 거기는 더 서글픕니다.

그 곳도 한 때는 한 나라의 수도였지만 지금은 한 마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나니” 그렇습니다.

어떤 위용 있고 견고한 도성이라도 사라져 갑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충고합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고전7:31).

 

한날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업적들은 불타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벧후3:10).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 임시적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전부 변천하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의 성읍들도 사라지며 거기 세워놓은 건물들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기관들과 건물들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역사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그 위용 있는 성전까지 파괴된 것을 수차례 읽어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배를 위해 헌당된 건물까지도 여러 번 파괴된 것을

구약은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헤롯이 수 십 년 걸쳐서 성전을 새로 지었습니다.

바로 그 성전 역시 지은 지 수 십년 만에 (주후 70년에)

또 다시 폐허가 된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촌사람들, 예수님 제자들이 선생님과 같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을 구경하면서 수선을 떱니다.

 

“선생님 저 건물 한 번 보십시오. 이 돌들 좀 보십시오”라고 이야기 할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웃 여러분, 이 세상의 것들은 지나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 것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것들을 얻기 위해, 사라질 것을 손에 넣으려고 영혼까지 팔고 있습니다.

그 어리석은 추구의 대열에서 벗어나십시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아무 것도 확실하고 든든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여기서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객관적 진리>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우리에게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 세상에 영구한 도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고백을 합니다.

여기 세상 사람들과 다른 신자의 입장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에게도 영구한 도성은 이 땅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있는 것처럼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상상 속에, 그 계획 속에, 그 노력 속에

세상이 약속하는 신 시가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합니다.

그들은 그것들에 마음을 쏟고 영구히 즐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독 신자들은 유일하게

여기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세상 사람들은 마치 이 땅에 영구한 도성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집착하며 삽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속화된 요즈음 시대 사람들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저희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생각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는도다” 시49:11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5:8

 

 

 

요즘 식으로 말하면,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하는데 혈안이었다는 말입니다.

 

 

▶천 년 전 옛날 사람이나 지금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나, 속 생각은 동일합니다.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같은 세상을 살지만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늘 시민으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땅에 속한 것의 무상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 신자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달라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그런 의미에서 선행 13절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13절은 말씀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이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벗어나서 영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맞이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도이기에, 나그네로서 세상을 살기로 결단한 무리이기에

여기 이 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가십시오.

주택부금도 들고 아파트 분양 서류도 갖출 수 있지만, 여기의 영구한 시가지가

우리 그리스도인 몫으로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생의 안전과 보장은 아파트 당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복된 내일은 시험에 합격하고 불합격하는데 달려있지 않습니다.

최첨단 아파트 로얄층이 여러분의 삶에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인기 학과 합격이 여러분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여러분의 이름으로 집을 마련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로서 거기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는 자들은

텐트를 치고 살면서도 행복했습니다.

 

원하신다면 텐트를 치고 살던 신앙의 선배들을 따라

계속 셋방에 살기로 결단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며 사는 자들이 열 가정, 스무 가정만 모이면

적당히 살아가는 백 세대, 천 세대를 능가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셋방에 사는 것만이 주님을 위한 헌신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성읍이 주는 모든 안락과 편리를 보류하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신앙의 순례자들입니다. 그렇게 성도들이 살 때,

우리 가운데서 헌신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힘을 얻지 않겠습니까?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나아가면서 나만 특별한 헌신을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면

때로는 손해보는 느낌도 들지 않겠습니까? 불안한 마음도 들지 않겠습니까?

모교회에 속한 천오백 세대 전체가 나처럼 헌신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지구상 어디에 가서 헌신을 해도, 그들은 담대하게 헌신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육축과 은금이 풍부한 사람이면서도

장막에 거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성읍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이삭 역시 한해 농사를 백배나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해에 백배나 기업신장을 한 거부이지만

그는 여기 이 세상이 나그네길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올 한해 거둔 것으로 인해서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이 땅에 기대를 가지고, 이 땅에서 즐기려 하고, 보물을 이 땅에 쌓으려고 한다면

그 기업신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얽어매어 있는 한,

세상에서 후히 받아 누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여러분이 세속적 가치관을 가지고 이 땅에서 부자로 살면서

자녀에게 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지 못하면 여러분 당대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후손에게까지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그네로서 삶의 자세>가 갖추어질 때에

잘 산다는 것은 여러분 자신과 자손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만을 바라는 사람들의 꿈은 신시가지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편리한 곳, 모든 편의 시설과 좋은 학군이 갖추어져 있는 곳에 살고 싶은 것이

세상 사람들의 마지막 꿈입니다.

성읍이야말로 활동의 근거지요, 안전과 특권이 보장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넘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안전의 보장과 활동의 근거가 시가지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두는 사람들은 실제 생활을 살아갈 때 바른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고백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못 깨달으면 흔드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기를 영구한 도성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섭리 가운데로 돌이키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항상 안일하고 싶은 유혹은 누구나 느낍니다.

우리의 마음은 땅에 있는 것들에 집착하여 살려합니다.

세상에 조금이라도 정착해 보고 싶은 욕망을 갖습니다.

 

최소한 얼마 동안이라도 안전한 포구에 닻을 내리고 싶은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구상을 하고 있을 때 돌연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깨우치는 <시련>에 봉착합니다.

 

그처럼 믿던 일이 속절없이 끝장나고 말며,

그처럼 믿던 사람이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하늘처럼 믿고 살았던 남편이 여러분의 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선 깨우쳐 주시기도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노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부가 되게 하셨는데도 그 가는 길은 해마다 평탄하지만 않았습니다.

때로는 흉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노정에도 기근이 있고 환난이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의 눈을 더 나은 <본향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종종 하나님은 우리 꿈을 좌절시키시고 여기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인식시킵니다.

우리가 잠깐 세운 천막 앞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는 순간에

하나님은 여지없이 천막을 거두시고 다음 여정으로 떠나게 하십니다.

마치 독수리가 새끼들의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새끼들이 날수 있는 훈련을 시키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안락한 쉼터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립니다.

 

▶어디에 살든지 누구의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든지,

전세로 살든지 사글세로 살든지 사는 것은 잠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지상의 보금자리에 집착하고 머물지 못하도록 땅의 것을 신뢰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그것을 <흔듦>으로써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대로만 가면 몇 년 안에 내가 울산에서는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거부가 될 것이라고 꿈을 꾸지만 하나님은 순식간에 흔들어버리기도 하십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는 이런 경험을 종종 합니다.

그리하여 순례자로서 삶을 배워갑니다.

 

어린 독수리 새끼로 하여금 날개 치는 것을 배우도록 강권하십니다.

헐떡이며 부르짖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를 지나면서 힘드신 분들도 많으셨죠?

정말 힘들어서 부르짖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편이 어려워졌다는 것이

하나님이 꼭 여러분을 향해서 얼굴을 돌리신 증표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형편이 어려워져서 여러분이 열심히 부르짖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끼고 있는 증거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편안하면 그대로 안일해지고 싶어합니다.

사업이 잘된다 싶으면 게으름을 피우고 늦잠을 잡니다.

그러나 어려워지면 부르짖게 마련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성도들의 삶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뭐가 잘된다 싶으면 편안하게 정착하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금자리를 흔드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믿었던 일들이 좌절되고 신뢰했던 관계들이 흔들릴 때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상기하십시오.

시련의 때에 <영문 밖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손짓>을 눈치채시기 바랍니다.

 

 

◑장차 올 영원한 도성을 찾아서 순례자로 산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남긴 발걸음을 따라 걷는 자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인생 행로에 피곤해 지셨다면 우리 역시 지친 인생 노정을 걷기 마련입니다.

그가 머리 둘 곳 없이 세상을 사셨다면 오늘 우리의 거처는 과분하지 않습니까?

 

그가 걸어가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주님 저는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생했는데 요새는 참 좋습니다.

평안합니다.’ 그렇게만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서 본문을 이해하면 다시 한번 유대교와 대조를 이룹니다.

유대인은 성전이 자리한 예루살렘 도성을 하나님의 도성으로 자부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땅에 있는 성소를 중시했습니다.

 

수십 년 간 광야의 방황 끝에 가나안에 도착하여 거기에 정착하게 된 이후

예루살렘을 그들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조밀한 인구의 도시 이스라엘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 역시 여러 차례 몰락하게 됨으로써

세상에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신자들은 예배할 센터가 있는 성읍을 이 땅위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자에게 영구한 도성은 “여기”가 아닙니다.

“저기” 하늘 예루살렘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거기 ‘프리미엄’이 아니라 ‘은혜’로 예약된 많은 맨션이 있습니다.

‘당첨’ 대신 ‘은혜’로 하사되는 복된 맨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궁극적 꿈을 실현 시켜줄 거처는 지상에 없습니다.

시련이 없는 거처는 세상에 없습니다. 불편이 없는 거처는 여기 없습니다.

영원한 쉼이 보장된 거처는 지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하늘 시민의 영주할 곳은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신자들은 이 세상을 영주할 거처로 여기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 역시 우리에게 같은 신앙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성도 여러분, 정착할 곳이 이 세상도 아니요 뼈를 묻어야 할 곳이

이 교회가 아님을 알 때에 비로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순례자의 길을 우리 모두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헌신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내일은 있기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