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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약함의 사람 한경직 목사 #1

LNCK 2008. 10. 8. 21:56

www.youtube.com/watch?v=oMYAaG_vB6o&t=5s

◈고난과 약함의 사람  한경직 목사        고전2:3         -출처보기-

 

[한경직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학술대회, 02.10.31]에서

김명혁 목사님의 발제 논문 중 일부 발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가리켜

‘제가 가장 존경하고 사모하는 분’이라고 부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한 목사님과 같이 있으면 저는 부족한 부분들을 많이 느꼈기에

그 분을 닮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너무나 진솔한 표현이고 고백이다.

 

템플턴 재단은 1992년 4월 29일 한경직 목사에게 템플턴 상을 수여하면서

‘20세기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목사’라고 평했다.

 

한경직 목사가 이 시대의 진정한 목회자와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이나 학문 때문이 아니다.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자기 부정과 헌신의 과정 안에서

그리스도의 종과, 민중의 종의 인격을 지닌

하나의 참된 인간으로 만들어진 데 있다.

 

 

◑고난과 약함의 사람, 한경직 목사님

 

내가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12:10

 

한경직 목사(이하 한경직)는 젊은 시절부터 한 평생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한 분이었고

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체험한 분이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절망했으며 때로는 넘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이 오히려 그를 진정한 목회자로 만든 비결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문을 당하며, 자신의 약함을 절감하다.

한경직은 17세 되던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고문당한 후,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무력함을 비관하기도 했다.

 

▲질병을 겪으며, 자신의 약함을 절감하다.

한경직은 27세 되던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폐결핵 3기 진단을 받고, 그는 또 한번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했다.

 

진학은 물론, 인생 자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의지도 건강도 아무 것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경험한 것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지요.

이렇게 몸이 약해지니 공부할 의욕도 사라지고 말았어요.

처음엔 낙심천만이었습니다."

 

▲실패를 겪으며,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다. 

한경직은 1932년 귀국 후, 모든 좌절을 딛고

1933년부터 목회의 길로 매진하기로 헌신했으나

1938년 일제의 강요에 무릎을 꿇는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수진 목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결국 1938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가

강압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한경직 목사도 신의주 제1교회 윤하영, 홍하순 목사를 비롯하여

장병원, 박연서, 김리현, 이혁호 장로 등과 함께 신사참배 결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평생 지우지 못할 굴욕의 그늘을 가슴에 묻게 된다."

 

▲남의 부탁을 거절 못하는 연약한 사람

한경직 목사는 일본 경찰의 강요에 의해 1942년 신의주 제2교회를 사임하고

3년 동안 보린원 원장으로 봉사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그런데 해방 후 얼마 안 되어, 평북지사를 맡았던 일본인이 그를 찾아왔다.

일본인들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목사가 치안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일본인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결국 일본인의 요청을 수락하고 평안북도 치안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후로도 한경직 목사는, 누구의 요청도 거절하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

또는 선량한 사람으로 한 평생을 살게 된다.

 

최창근 장로가 한경직 목사의 유일한 약점은

<어떤 사람의 요청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한경직 목사는 평생 이와 같은 '약점'을 지니고 살게 된다.

 

▲양떼를 남겨두고 남쪽으로 피난 가면서, 연약한을 절감하다

한경직 목사가 평안북도 치안 책임의 소임과

'기독교사회민주당' 조직의 소임을 다하고 있을 무렵

소련군이 신의주로 진주하여 공산당원들이 신의주를 장악했다.

 

소련군과 공산당원들은 한경직 목사와 '기독교사회민주당'에 압력을 가하며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한경직 목사와 윤하영 목사는 월남을 결심한다.

1945년 10월 초순, 두 사람은 청년 김치선의 경호를 받으며

트럭과 기차와 달구지를 번갈아 타기도 하고, 때로는 걷기도 하면서 남쪽으로 향했다."

 

양떼를 남겨두고 남쪽으로 떠나는 한경직 목사의 마음은 처절했다.

(피난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수도 있음. 어쨌든 자기 마음은 약해졌을 것임) 

 

▲625때 또 피난을 가면서, 연약함을 절감하다.

한경직 목사는 1950년 6월 영락교회당을 건축하고

12일부터 이대영 목사를 초청하여 준공감사 부흥사경회를 개최했다.

이산의 아픔과 함께 위로와 기쁨을 나누는 은혜의 사경회였다.

 

그러나 사경회가 끝난 6월 25일 주일 아침,

북한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을 감행했다는 소식이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던 교인들에게 전해졌다.

 

한경직 목사는 담담하게 예배를 인도하며 닥쳐올 시련에 대비할 것을 강조했다.

28일 아침 서울 거리에는 태극기 대신 인공기가 올랐다.

한경직 목사는 처음에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당에 들어가서 기도했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는 김치복 집사와 이창로 장로의 강요로

청파동에 피신했다가, 이튿날 아침 한강을 건너기 위해 마포까지 갔다.

마포 나루터는 도강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도강을 포기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가려는 순간,

어느 사공이 손을 흔들면서 한경직 목사를 불렀다.

가끔 영락교회에 출석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배를 타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한경직 목사는

그 젊은 사공의 얼굴을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다.

영락교회를 두고 도피하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교회를 지켜야 하는데 또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의 믿음 없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벌써 두 번째가 아니던가!

해방 후 신의주 제2교회 시절, 생명의 위협으로 인해 양 떼를 두고 월남한 일이

늘 마음에 걸리던 그였다.

그런데 또 다시 교회를 버리고 피난 길에 오르게 될 줄이야.”

 

▲전쟁의 비참함과 위기감속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다.

한경직 목사가 자신의 약함과 무능을 절감한 때는 전쟁 중이었다.

안양과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밀려 내려온 한경직 목사는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구국기도회를 열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피난민들을 격려하고 부상병들을 찾아 위로하는 일에 전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과 절망을 절감했다.

"그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의 소원(승전?)이 너무나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그 소원을 이루어줄 힘이 없었다.

매일 절망의 끝을 오가며 느끼는 무력감은

구국기도회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더더욱 간절히 사모하게 하였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사수한 한경직 목사

한경직 목사가 자신의 약함을 또 한번 드러낸 것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다.

그는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시위나 서명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군사독재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후원까지 했다.

 

그는 1971년 5월 1일 박정희가 참석한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국가와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설교하며

기독교 신앙만이 인간의 존엄, 자유, 평등을 신장하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릴 것을 호소했다.

 

혹자는 그것을 그의 <약함>이라고 평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의 평소의 나라 사랑과 반공주의와 복음전파의 소신과 입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유신헌법 만들 때, 교회에서도 떠들고, 청년들이 데모도 하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도 데모하려 했거든요. 나는 막았단 말이요.

절대로 못한다고 했시오.

'잘못하는 것은 잘못한다고 말을 해라. 진정서를 보내든지 온건한 방법으로 하지,

사회 불안을 조성하여 공산당에게 기회를 주는 일은 절대 하지 마라' 했시오….

 

그때 한 가지 더 생각했시오. 내가 제일 원하는 것은 민족복음화가 아니갔소.

그때 군인 전도할 때인데, 내가 이거 서명운동하고 내 이름을 먼저 써 놓으면

군인 전도의 길이 막히거든.

(한 목사님은 군복음화 선교회 회장으로 오래동안 봉직하셨다.)

 

그러니 이거 전도해야 할 목사로서 제1계명 되는 사명을 버리고 까지

정치운동이나 사회운동에는 가담 않는다는 그 원칙이 서 있었시요."

 

그는 전두환 정권 때도 비슷한 약한 입장을 취했다.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한 후 8월 6일 롯데호텔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는데

한경직 목사는 김윤식 조향록 정진경 김창인 등 23명의 목사등과 함께 참석하여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므로

전두환의 등장을 인정하고 협조했다.

 

이만열 교수는 "이 때문에 참석자들은

독재정권의 출현에 협조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고 평했다.

 

그러나「영락교회 50년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 같은 태도는 보기에 따라 매우 애매하고도 소극적인 태도로 비치기도 하였다.

이 같은 비판의 소리 속에서도 한경직 목사의 궁극적 관심과 태도는

정치 사회적 모든 문제를 '성서적 기본 원리'라는 자신의 목회신조이자

목회철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원칙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 점이 세상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해도 그는 이 원칙을 지켜 나갔으니,

이 점이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의 장점이자 또한 한계였다 할 것이다."

 

▲노환으로 인한 연약함을 절감하다

한경직 목사는 그의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노환으로 많은 고난과 약함을 체험했다.

아니 한 평생 폐 하나를 도려낸 장애인으로 약하게 살지 않았는가!

 

한경직 목사는 어느 대담에서 괴로운 일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일생을 연약한 몸으로 살아온 것이 제일 괴로움이었지요." 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마지막 2년 동안 두 다리를 수술하는 고통도 겪었고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답답함도 당했다.

특히 마지막 6개월 동안은 가래가 너무 끓어서 목에 구멍을 뚫고 지내는

극심한 괴로움도 겪었다.

 

그는 필자의 손을 붙잡고 "늙는 것이 재미 없어!" 라고

그의 노약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한국교회와 민족의 고난을 몸에 짊어지고 약하고 아프게 살았다.

 

그는 몸뿐 아니라, 인간 자체는 약한 존재인 것을 실감하고 고백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설교하면서 "우리 사람은 약합니다" "우리는 파산된 존재입니다"

라는 말을 자주 했다.

 

 

◑연약한 목회자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

 

▲바보처럼 약함을 고수하시다.

그는 고난과 약함의 사람으로 살다가, 고난과 약함의 사람으로 죽었다.

평안하게 죽는 것이 복일 수도 있으나

진정한 목자와 제사장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다.

한경직 목사는 고난과 약함의 사람으로 살다가, 고난과 약함의 사람으로 죽었다.

 

한경직 목사의 연약함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경직 목사의 연약함과 실수를 긍정적으로 받아드린다.

 

이우근 부장판사는 이렇게 그를 존경했다.

"정의감 넘치는 이들이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데모하고 감옥에 갈 때,

그는 총칼 든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주고는

정말 바보처럼 욕만 실컷 얻어먹었습니다."

 

이만열 교수도 한경직 목사의 생애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일제의 강요 앞에 넘어져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였지만,

늦게나마 그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연약성을 극복하는 용기와 지혜를 보였다."

 

전도자와 목회자의 기본적 자질은 <약함>

영국의 존 스토트 박사는 최근(2000년 7월 18일) 영국 케직에서 설교하면서

전도자와 목회자의 기본적인 자질은 약함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닌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다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했다. 고전2:3

스토트 박사는 약함의 자질을 지닌 또 한 사람은 스펄전 목사였다고 지적하면서

자기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수많은 전도자들과 목회자들을 만나보았지만

약한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마 스토트 박사가 한경직 목사를 만났다면

한국에서 비로소 ‘약한 목회자’를 만났다고 고백했을 것이다.

 

▲<약함의 신학>을 가졌던 한경직 목사

*1969년 8월 3일에 행한 설교에서 한경직 목사는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능력"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약함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를 간증했다.

 

한경직 목사는 한 평생 자기 자신의 약함과 민족의 약함을 절감한 사람인 동시에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간증한 사람이었다.

 

*1972년 4월 23일에 행한 "약할 때에 강하니라"란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①"인간이 약할 때는 흔히 겸손하여 집니다.

건강하던 이가 중병에 걸려 약해지면 겸손하여 집니다.

교만은 만죄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②둘째, 이뿐 아닙니다. 인간이 약하여 질 때에 그 생각이 깊어집니다.

인생의 깊은 문제를 탐구하게 됩니다.

 

③셋째,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기도를 더하게 됩니다.

벌써 오래 전에 내가 미국 뉴멕시코주 알바컬키라는 도시에 있던 요양원에

입원하여 있을 때, 제가 폐가 약하여 약 2년간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에 병석에 고요히 누워서 '약할 때에 강하니라' 하는 성구를 묵상하는

가운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약할 그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설의 진리로 살았던 지도자

강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 한경직에게서 약한 사람을 본다.

<고난의 사람과 약함의 사람>을 본다.

인간 한경직은 고난과 약함의 사람이었다.

 

오늘날 목회자마저 ‘강한 사람’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약한 사람’의 이미지를 보여주신 한경직 목사님은

정말 예수님의 형상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준,

한국 목회자들의 표상이셨다. <인터넷자료 스크랩

 

 

▲관련글 : 한경직 목사님의 비밀무기 ‘오래 참음’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에,

LA지역 목회자들이 세미나를 열고, 한 목사님을 초청해서

‘한경직 목사님의 목회철학’을 여쭈었다.

 

“후배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해 주십시오!”

 

“제가 일평생 목회하면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가장 해 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목회해 오면서 <오랫동안 참았습니다.>

참는데 훈련되지 못하면 목회 못합니다.

 

설교 잘 하는 분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잘 참는 분>은 찾기 쉽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만난 교인 중에도, 힘들게 하는 교인, 이상한 교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 목사님의 신념은 <일평생 참고 견디는 것>이었다.

그러면 처음에는 지는 것 같았는데,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것이다. (편 글)

 

[주제별 분류] 기독교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