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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 신앙의 히치하이크

LNCK 2008. 8. 7. 20:44
 

◈신앙의 히치하이크             롬1:25       도서요약, 편집



앨리스터 맥그래스「내 평생에 가는 길」The Journey pp.1~65. 읽고 요약, 편집



신앙생활을 ‘순례의 길’이라 하는데, 쉽게 표현하면 ‘긴 여행 길’이다.

목적지는 ‘새 예루살렘’이다. (현세적 새예루살렘 포함)


[천로역정]의 소설에서 그렇듯이,

또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광야에서 여행할 때 그렇듯이,

이 여행길은 결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까지 직접 경험해 봐서 잘 안다.


그런데 이 여행(순례자의 길)을, 좀 더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있다. 그것은 <앞서 걸어간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난 2천년 동안 이 길을 먼저 걸어갔던 사람들...

그들이 죽었으므로, 직접 그들의 경험담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들이 남긴 저서들을 통해서...우리는 그들의 풍부한 여행 경험담을 들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신앙의 굵직한 몇 가지 보편적 질문들에 대해,

사람들의 진부하고 얄팍한 답변을 듣는 일에 이력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약 10년에 걸쳐, 이 여행길을 앞서 간 사람들의 경험담을 탐독했다.

그리고 이 책에 그 경험담(굵직한 신앙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의 보다 편안한 여행을 위해서 말이다.


▲신앙의 히치하이크    

저자는 특별히 ‘신앙의 히치하이크’란 재미있는 표현을 쓰고 있다.

‘히치하이크’란 길 가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자동차 얻어 타는 것이다.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의 고전을 읽는 것이

바로 ‘신앙의 히치하이크’, 즉 그들의 믿음에 쉽게 동승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다.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

박사학위 논문이 석사학위 논문과 다른 것은,

<그 주제에 대해, 지난 2천년간, 앞서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했는가?> 라는

해석사解釋史가 반드시 들어가야 박사 논문이다.


일례로, 오늘날 이 시대의 신앙의 대 주제인 <성공과 축복의 문제>에 대해

과거 2천년 동안 신앙의 조상들은, 어떻게 그 주제를 다루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편집자의 개인적 대답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이다.

제가 읽어본 기독교 고전에는, 그런 것을 장려하는 설교는 없다.

축복과 성공의 주제는 미국 노만 빈센트 필 박사 이후로 유행하는 최근 주제다.)


그러므로, 미래에 기독교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기 소원하는 사람은

성경과 아울러

반드시 교회역사의 신앙 위인들의 고전들을 탐독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것이,

앞서 간 위인들의 차에 ‘히치하이크’로 동승하여,

그들이 발견하고 도달한 신앙적 유산과 업적을,

그들의 체험, 경험담, 깨달은 지혜 등을,

오늘날 우리가 쉽게 얻울 수 있는 방법이며,

우리의 힘든 순례길을 쉽게 해 주는 도움이다.


▲항해 일지

‘히치하이크’라는 표현 말고도, 같은 이미지로,

저자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항해일지>라는 비유를 들고 있다.

즉, 기독교 고전을 읽는 것은 <항해일지>를 보며 항해하는 것을 뜻한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후로, 16세기에 대탐험의 시대가 열렸다.

유럽열강들은 앞다투어 바다로 나가, 새로운 대륙과 섬을 발견하는데 혈안이었다.

 

누구나 처녀항해를 하면 대단히 위험하다.

어디에 암초가 있는지 모르고, 해류를 전혀 모르고, 길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녀항해를 끝내고 무사히 귀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항해일지'를 마치 오늘날의 일급비밀처럼 소중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자기 편에게만, 그것을 공개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암호로 기록하기도 했고,

일부러 오기誤記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후배들이 올바른 선배들의 ‘항해일지’를 들고 항해에 나서면,

그들은 암초나 항로이탈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저자는, 기독교 고전이 바로 앞서 여행한 사람들이 남긴 ‘항해일지’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고전classics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항해일지 없이 배를 몰고 가는 선장은,

필경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거나,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승객들을 태운채로...   (여기까지 도입, 아래부터 책의 본론)



◑피조물을 섬기는가, 창조주를 섬기는가? 


▲신앙의 굵직한 보편적 질문 한 가지.

세상에는 ‘우상’이라고 치부하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이 많은데

그런 것 다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은... 어찌 보면 고행 아닌가? 가당한가?


우상숭배는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며,

참된 기독교는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물질, 성공, 축복' 등 피조물들을

창조주보다 더 열심히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참된 여행길에서 벗어난 것인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빠지는 이유는,

‘물질, 성공, 축복’등이 상당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데 있다.

반면에 참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은, 눈에도 잘 안 보이고, 손에도 잘 안 잡힌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가

‘물질, 성공, 축복’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진짜 섬겨야 할 하나님은,

그 우상들을 자기에게 내려주는 ‘도구’정도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 신앙적 굵직한 질문에 대해

저자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전>을 통해

발견한 통찰력으로 답변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피조물

세상은 아름답다. 꽃도 아름답고, 자연세계도 아름답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자연 세계에 대한 감탄의 선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도 젊은 시절에는 외모가 아름답다.


인격적인 아름다움도 있다.

부모의 사랑도 아름답고,

부부의 애정도 아름답고,

자녀가 커 가는 것을 보는 것도 아름답다.


피조물인 인간이 만든 건축물, 의상, 예술품도 아름답고,

인간이 이룩한 업적, 제국, 과학적 발견도 아름답다.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한다.

이것들은 너무 아름다워 우리 인간들이 흠모할 만 하다.

너무 흠모해서 우상이 될 정도이다.


▲하물며 창조주는 얼마나 더 아름다우랴!

피조물이 그렇게 아름답다면,

그런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아름다우랴!

얼마나 더 영광스러우랴!


그 창조주의 크신 아름다움을 잠시 맛보았던 사람들도 있다.

변화산에서 체험한 세 제자들이다.

얼마나 좋고 아름다웠든지... 그들은 산에서 내려올 생각을 접었었다.

(여기서 피조물과 조물주 중에 누가 더 아름다운지 완벽하게 증명되었다.) 


▲피조물인가, 창조주인가?

그런데 오늘날 ‘성공, 번영, 축복’을 추구하는 일부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 영광스러움을 추구하기보다는

피조물(성공, 번영, 축복)의 아름다움을 더 추구하고 있다.

엄격히 말하면 ‘우상숭배’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보지 못하고,

(사실 잘 안 보인다. 잘 안 느껴진다. 그러나 고수들은 보고, 듣고, 느낀다)

그 분과 교제에서 오는 행복, 만족, 영광, 은혜 등

지난 2천년간 신앙 선배들이 그런 것들을 추구해 왔는데,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해 왔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귀하게 섬기고 있고,

하나님은, 그런 내가 원하는 피조물들을 내려주시는 분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1:25


▶피조물에는 창조주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일부 서려 있다.

그래서 피조물을 보면서, 창조주 그 분의 능력과 영광을 '일부' 볼 수 있다.

그러나 피조물을 보는 눈에 푹 빠져서, 창조주를 도외시 해 버리면 잘못이다.


에드워즈의 고전을 읽어보자

우리는 세상과 그 낙에 안주해서는 안 되며 천국을 갈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천국의 복을,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누릴 행복을 열망해야 합니다.

 

비록 외적인 낙에 둘러싸여 있고, 좋은 우정과 인연과 가족 중에 거할지라도,

비록 좋은 이웃들 가운데 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것들이 자신의 유업인줄 알고,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소유하고, 누리고, 활용하되,

하나님이 명하시면 언제라도 버릴 각오로 

천국을 위해 선뜻 즐거이 내놓을 각오로만, 누려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The Christian Pilgrim 중에서


에드워즈에 의하면, 세상적 아름다움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것을 무시해 버리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달리) 그가 깨달은 통찰력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우리에게 더 큰 아름다움을 제시해 준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시식(에피타이저)이지, 주 요리가 아니다.

시식만 먹고, 만족하고, 끝내버리려 하면 안 된다.


▶비록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아가고, 누리는 것이

일평생 힘든 순례길의 기나긴 여정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발견해 나가야 한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바로 이것이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7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딤전1:11

 

이 <복음의 부요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만큼 크고 놀랍습니다. 엡3:8

unmeasurable riches of the Gospel (복음=예수님 자신이라는 전제로)

 

바울 사도는 복음의 부수효과, 사은품(물건 살 때 끼워주는 것)을 전달하지 않았다...


[주제별 분류] 물질과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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