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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4 애통하는 자의 복

LNCK 2008. 9. 9. 11:33

◈애통하는 자의 복                              마5:4, 눅6:21,25                             00.02.27. 옥한흠 목사님 설교

                                                                                                                                    -인터넷설교 스크랩-

 

▲유머를 좋아하는 세상에 역설적인 진리 - 애통

며칠 전에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에 나가 보았다가

유머 책들이 생각보다 많이 진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그런 책을 많이 찾나 봅니다. 책의 제목들이나 그 속의 문장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 만한 매력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유머는 성공의 시작이요, 웃음은 행복의 시작이다>, <웃으면 복이 와요>

와 같은 표제들이 붙은 책들을 사람들이 손에 들고,

그 서점 안에서도 읽으면서 웃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회가 워낙 살기 어렵기 때문에, 짓눌리고 답답하고 잘 풀리지 않는 분위기로부터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웃음을 찾아 헤매는 것 같습니다.

한번 크게 웃어봄으로써,

그 마음에 있던 답답한 감정들을 다 쓸어 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인은 무거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눈물, 애통'과 같은 말은 별로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 말 자체가 주는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많은 역설이 있지만, 아마 이 구절이야말로

기독교의 역설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성경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애통 - 아주 강력한 슬픔을 뜻하는 말

성경에는 눈물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가 약 9가지 정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지금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애통하다'는 용어는

가장 그 강도가 높고, 그 감정이 짙은 단어에 속한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의 애통>을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37장에, 늙은 야곱이 통곡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12아들 중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하루아침에 행방불명 되어버렸습니다.

도무지 소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게 되자, 이 늙은 아버지 야곱은 옷을 갈기갈기 찢고,

허리에 굵은 베를 두르고, 땅을 치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날마다 통곡했습니다.

이렇게 통곡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본문에 사용하신 <애통>이라는 단어입니다.

 

▲애통했던 과거 한국 교회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금부터 약 반세기 전만해도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애통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당시는 8.15 광복이후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이었고,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눈으로 보면서 살아야했던 때였습니다.

 

게다가 어쩌면 그렇게 가뭄도 자주 연속되었는지 모릅니다.

조금 후에 6.25가 터졌는데 그때 상황이란 그야말로 사람 사는 꼴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코소보, 동티모르에서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 모습이 가끔 TV에 비치지만

그 당시의 우리의 모습은 지금 그들보다 더 처참했습니다.

 

그런 형극의 길을 걸으면서,

교회에 모이는 우리 선조들은 눈만 감았다 하면 울었습니다.

자기 죄를 놓고 통곡하고,

예수 안 믿는 식구들을 위해서 통곡하고,

나라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뿌리며 기도했습니다.

눈이 붓도록 울었습니다.

 

마루 바닥 여기저기에 눈물 자국이 너무 진하게 박혀서

걸레로 닦아도 닦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위로가 또한 굉장히 컸습니다.

 

울어보지 아니한 사람은 도무지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 재미로 더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어린 아이였지만, 옆에서 보고 또 보았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 한 가지 - 애통

 

▲웃는 것은 좋지만, 애통이 말라버린 것은 잘못

물론 우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의 전부가 아닙니다.

애통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른 눈을 가진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보다

젖은 눈을 가진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훨씬 더 은혜의 세계를 깊이 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때의 교회에 비해서 오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애통하는 눈물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눈물이 메말라 버린 것 같습니다.

웃음이 복음으로 들리고, 눈물은 비복음으로 들리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어느 신문에 <유머설교 세미나>라는 광고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청중들을 웃기면 설교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청중들을 기분 좋게 실컷 웃겨 놓은 후에 설교를 하면 더 잘 먹힌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통하는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분명한 사실은

눈물이 말랐다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심각한 이야기는 잘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것이라면 짧게 하든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라는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기분 좋게 웃어야 은혜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는

주님의 말씀하고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교회 이미지입니다.

 

▲웃음만큼 소중한 <눈물>의 가치

여러분, 눈물이 그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짧은 인생을 살다 가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 경험합니다.

 

눈물은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와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웃음이 우리에게 매력 있고,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눈물의 고유한 가치가 있습니다.

 

만일 우는 것은 무조건 저주요,

슬픔은 무조건 부정해야 될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 버린 인생입니다.

 

아랍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햇빛만 쏟아지는 곳은 사막이 된다.'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도 진리입니다. 비가 와야 합니다. 비가 쏟아져야 합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가 쏟아질 때, 거기에 생명의 환희가 일어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사막입니다.

눈물이 없으면 그 웃음 자체도 하나의 광대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는 사람들은 인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애통과 눈물>은 신앙을 성숙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눈물, 애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눈물을 통과하지 아니한 신앙은, 하나의 값싼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나서 웃기만 했습니까? 아직은 '값싼 신앙'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울어 보셨습니까?

그 사람은 차원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애통이.. 우리 신앙을 본질로 향하게 만듭니다.

눈물이.. 우리 신앙을 본질로 인도합니다.

눈물이 고인 눈에.. 십자가의 주님이 보입니다.

젖은 눈에.. 부활의 주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애통하는 심령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의 인격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눈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애통을 무조건 싫은 것으로,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 <탄식>하는 생활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성경에 보면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정의할 때

<탄식>이라는 말을 쓸 때가 있습니다.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날마다 탄식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이 썩을 몸을 빨리 벗어 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입으신

그 영광스러운 몸을 함께 입게 될 그 날, 양자될 그 날,

우리 몸이 구속을 받을 그 날을 사모하면서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탄식>인 것입니다.

 

같은 의미가 고후5:2에도 나옵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제 신앙생활에서 눈물, 탄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꼭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밑바닥에는 눈물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 신앙은 아주 '천박한 신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누가 애통하는 자입니까?

 

▲1. 자기 죄를 놓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애통하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언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가 죄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시어

무조건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이지,

실제로 나에게서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점점 거룩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무균실에 들어간 사람이 모든 병균들로부터 차단된 것처럼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작업장이라고 하는 이 부패한 몸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열 번, 백 번도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유혹이 쉴 새 없이 파고드는

장망성(장차 망할 도시)인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충만을 받고 말씀대로 지켜 살기 때문에

죄도 없고 회개할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애통하며 눈물 흘리는 이웃 사람에게

‘당신은 사죄의 확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질질 짜며 우는 것’이라고,

‘주님이 죄를 다 용서하셨으니까 웃으라’고 말한다면

그는 사도 요한이 언급한 바대로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1:8

 

이런 이유로 우리 모두에게는 울어야 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애통해야 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루에 백 번이라도 하나님 앞에 애통해야 될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애통하는 사람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종종 답답하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뻔뻔스럽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죄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몇 마디 말로 때우고, 자기 죄가 다 용서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슴에 진정 회개하는 자의 자세가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입술의 기도를 들으시고 정말 그 사람을 깨끗하게 해주실지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가까울수록 애통한다.

마르틴 루터가 성당 앞에 붙인 95개조 항의문 안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이란 끊임없는 회개와 참회를 하는 것이다.'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우리 안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구별되는 사람이기에

우리에게는 매일 눈물이 필요합니다. 죄를 씻는 눈물입니다.

 

우리의 표준은 이웃사람이 아닙니다.

'저 사람 보다 내가 얼마나 더 선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나는 얼마나 거룩한가?'입니다. 이것이 우리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추악함을 더 잘 보게 됩니다.

더 애통하는 심정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애통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받는 <위로>

여러분,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우리가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몰라서 우리가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가까이서 느끼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영광의 빛 앞에 벌거벗은 나 자신을 순간순간 볼 때마다

나의 악함 때문에 탄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가지고 애통하는 것을 다윗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시51:17

 

애통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상한 마음입니다.

애통이 무엇입니까? 통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통회하며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는 자를 주님께서는 복되다고 하시고,

그 눈물을 씻어 주시고, 그에게 사유의 은총, 평안의 은총,

기쁨의 은총, 만족의 은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 앞에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우리 눈에 탄식의 눈물이 있을 때, 통회하는 눈물이 있을 때,

우리의 심령에 <위로의 무지개>가 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뻔뻔스러운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병행구절인 눅6: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상당히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배부른 자, 웃는 자’는 세상 사람들인데

그들이 잘 살고 날마다 웃고 희희낙락하는 것을.. 예수님은 <저주와 화>로 보시고

 

반면에 눅6:21절에 주린 자와 우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주리고 우는 삶 자체를 주님께서는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하지만 믿음에 부요하게 만드신 사람들   약2:5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젖은 눈이 마를 날 없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디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자녀들 세계에도

얼마나 눈물이 많은지 모릅니다.

서초, 강남 지역에도 우리가 조금만 겸손하게 허리를 낮추고 보면

남의 눈에 잘 뜨이지 아니하는 반지하의 방 한 칸에서

너무나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을 만나서 견디다 못해

시간만 나면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통곡하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통곡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잘 믿는데 가난은 왜 떠나지 않는지,

하는 일들은 왜 잘 풀리지 않는지,

왜 자녀가 탈선하는지,

왜 경쟁에서 뒤지고 마는지,

왜 나쁜 사람들의 속임수에 빠져 메울 수 없는 손해를 입어야 하는지,

왜 하루아침에 병이 들어 육체가 망가지는지,

왜 억울하게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우리는 다 설명 할 수가 없습니다.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눈물로 살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가슴에 찾아드는 이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많은 세상 사람들이 웃고 즐기는 시간에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가슴에 가득한 서러움을 눈물로 씻어 내는 거룩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살기가 힘들 때마다, 자주자주 좌절감이 몰려올 때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눈물로 하나님의 옷자락을 적시는

거룩한 백성들이 이 지구상에 많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 믿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져야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많은 불행스러운 일들을 안고

눈물 흘리는 사람은 꼭 저주받은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나의 슬픔, 나의 고통을 주님 앞에 들고 나가서

눈물로 주의 옷자락을 적시며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눅6:21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사38:5

라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이유로 하나님 앞에 와서 엎드려 울지라도

그 울음을 저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울음을 복이 없는 사람으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3. 세상 죄를 짊어지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루살렘성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에 앉으셨습니다.

한참 동안 성을 내려다보시던 주님의 눈에 굵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약 40년 후에 그 성에 임할 심판을 예수님은 미리 내다보고 다 알고 계셨습니다. 눅19:43,44

 

바울도 애통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3;18

 

사방을 둘러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원수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도무지 가슴이 저미어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점잖은 어른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그렇다면 우리도 이 세상을 앞에 놓고 애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웃을 일이 많습니까? 울 일이 많습니까?

이 나라의 죄악상을 조금만 관심 갖고 들여다보면

과거의 어느 때, 어느 시대의 사람들도 지금처럼 죄를 범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과거의 어느 사회가 지금처럼 이렇게 악하고 더럽고 음란할 수 있었습니까?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고 우셨던 예수님은,

오늘날 서울을 내려다보고 우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 백성의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주님 앞에 나가서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하는 교회만이 이 땅에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오직 이 땅에 소망이 있다면, 이 나라의 죄를 나의 죄처럼 생각하고

십자가 밑에 가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에서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치는 말

오늘 이 땅의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말랐다는 것입니다. 너무 뻔뻔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많은 위로의 축복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이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내 죄를 놓고도 애통하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도 주님 앞에 가서 눈물 뿌리며 애통하고,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예수 안 믿는 이웃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애통할 때,

 

내 영혼이 살고,

우리 가정이 살고,

이 나라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00.02.27. 인터넷설교 스크랩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