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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 가면 도리어 감사가 나온다

LNCK 2008. 11. 18. 16:31

 

◈삶의 밑바닥에 가면 도리어 감사가 나온다         히12:15          모두 펀글 

 

◑불만족이 많은 세상

 

▲자기 생각대로 안 된다. 이 세상에는 쉼이 없다.

내 인생을 그 시점까지 빨리 달려가고 난 다음에 쉬리라는 사람이 있다.

내가 몇 살까지 그렇게 빨리 이뤄놓고, 돈 벌어놓고,

그 다음에는 여행도 다니면서 쉬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특히 미국 이민자들 가운데 많다.

 

저는 이 생각이, 성경적으로 틀린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말씀드린다.

성경은 주 앞에 이를 때까지... 똑 같은 페이스로 계속 경주하라고 가르친다.

 

실제 내 삶이 그렇다. 내 생각/계획대로 절대로 그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거기까지만 가면 행복하고, 뭔가 이룬 것 같은데,

사실 자기 계획대로 되는 사람... 거의 없다.

 

이런 사람은 상대적인 상실감(소원대로 안 되는) 때문에

늘 불만족가운데 산다.

 

또한 소수지만 자기 계획대로 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업가가 매출 1백억 목표를 위해 수 년 간 고생끝에.. 드디어 달성했다.

그 기쁨은 잠시 였다. 그는 내년 목표를 새로 잡았다. "매출 2백억 달성!"  

 

여러분, 우리가 쉬는 것은, 이 세상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가서 쉬는 것이다.

 

히4:10,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마치시고 쉬시는 것 같이

그 사람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느니라

 

 

물론 이 땅에서도 쉰다.

 

열심히 믿음의 경주를 달리면서 <예수 안에서> 쉬는 것이다.

예수 안에는 쉼이 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쉼 임을 배우시기 바란다.

 

히12:15, 은혜에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은혜에서 떨어지면, 그 다음에 모든 일이 힘들어지고,

쉼이 없고 삶이 피곤해진다.

 

신앙생활도 그야말로 짐이 되고, 일이 된다...

 

▲인간에게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시라.

존 올트버그의 책「우리가 만나면 서로 힘이 됩니다」의 원 제목은

Everybody is normal until we get to know them 이다.

<사람은 그들을 참으로 알기 전까지, 그들은 다 정상이다>라는 뜻이다.

 

참 재미있기도 하고, 심오하기도 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서로를 깊이 알기 시작하면

<다 비정상이다>는 말과 같다.

서로를 깊이 모르니까... 다 정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나와 이웃의 마음과 삶의 깊은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작심하고 알아내기 시작하면... 인간은 다 비정상적이다 - 라는 말이다.

 

이 책의 제 1장에는 ‘고슴도치 딜레마’가 나온다.

성경에, 인간을 가장 많이 비유한 동물로는... 양이다.

존 올트버그는, 오늘 현대인들에 대한 비유로, 만약 양을 제외한다면,

고슴도치가 가장 적절하다고 말했다.

 

여러분, 고슴도치는 아주 외로운 동물이다.

대부분 동물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떼를 지어 이동한다.

그러나 고슴도치는 혼자 다니는 외로운 동물이다.

 

그런 고슴도치도 외로움을 탈 때는, 다른 고슴도치에게 접근한다.

그 순간 자기는 전혀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접근하는 그 순간, 다른 고슴도치를 만나는 그 순간,

상대방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동시에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

 

북미산 고슴도치는 자기 등에 무려 3만개의 바늘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계속 해서 그는 말하기를, 인간이 30년 이상을 살아가면,

모든 사람이 3만개 이상의 상처를 갖고 살아간다고 했다.

 

우리는 다 고슴도치와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양과 같아서 각기 제 길)

 

▲치유되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이면 상처가 더 큰 상처를 만든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미움과 분노와 상처가

서로를 더 촉발하는 위험성으로 나아간다.

 

어떤 사람의 손가락에 가시가 박혔는데, 그것을 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래서 염증이 생기고 퉁퉁 부었다.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 손가락을 스치면서 살짝 건드리기만 했는데도

이 사람의 고통이 엄청났다.

 

그러자 그가 불평한다.

“너무 아파죽겠어. 당신 때문에 너무 아파.

당신이 날 살짝이라도 안 건드렸으면... 안 아팠을 텐데...”

 

그러나 여러분! 문제의 본질은 지나가다가 건드린 상대방에게 있지 않다.

손가락의 가시를 그대로 방치한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상처와 미움, 잘못된 분노를 말씀으로 치유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축복, 기쁨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다.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방어적이다.

어떤 일에 있어서 영향력을 끼쳐 과도하게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

상처받은 사람은 상황과 상관없이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느낀다...

 

 

◑인생 밑바닥에서.. 오히려 만족을 찾은 성도들

 

잘 나가고, 잘 풀리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높은 목표를 위해 달리느라.. 쉼이 없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감사와 만족은.. 제일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다.

사면초가, 절대절망에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야박한 말이지만, 아직 불평/상처받았다/원망이 나오는 것은.. 완전 밑바닥까지 안 갔기 때문인지도...

 

▲부모보다 더 큰 위로

김광숙(엘렌)씨는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나서 또한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그가 4살 때, 일산의 한 번잡한 시장 입구에 데리고 와서

“너 여기 꼼짝 말고 서 있어, 엄마가 다시 올 때 까지 어디 가면 안 된다!”

라고 말한 이후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어머니는 영영 4살 된 광숙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자, 광숙은 “엄마, 엄마” 하며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어떤 낯선 아저씨가 와서 광숙의 손을 붙잡고 갔다. 광숙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길로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고아원에서 처음 며칠 밤은, 오직 엄마를 찾는 울음으로 지새웠다.

난생 처음으로 집을 떠나서, 낯선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앞도 못 보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런 딱한 광숙의 처지가, 홀트 복지회를 통해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의 니콜스 가정이 광숙을 입양하게 되었다.

친부모가 버리고, 한국이 돌보지 않은 불쌍한 소경 아이를

예수를 잘 믿는 미국 크리스천 가정이 입양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니콜스 부부도 두 사람 다 앞을 못 보는 맹인이었다.

이 부부는 광숙 외에도, 모두 4명의 한국 시각장애 아이들을 친자녀로 입양했다.

광숙은 그들 부부의 3번째로 입양된 자녀였고, 엘렌이란 미국 이름을 얻었다.

넷째로 입양된 아이는 소경에다 지체장애였다.

 

니콜스 부부는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잘 양육했다.

그리고 매일 아이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슬피 울던 광숙은, 이제 미국에 와서

아주 밝고 명랑한 아이로 점점 자라났다.

어학에 소질이 있어서 영어, 스패니쉬도 빨리 배우고, 노래도 잘 부르고,

글도 잘 쓰고, 훌륭한 아이로 성장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광숙은, 한국에 엄마를 찾으러 왔다.

자기가 버림받은 지 18년 만에 한국에 와서, KBS TV 아침마당에 출연했다.

아나운서는, 광숙 씨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며, 노래 한 곡을 청했다.

그 때, 광숙은 송명희 시인의 ‘나’ 복음성가를 불렀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네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는 공영방송에 출연한 자리에서, 예수를 자랑했다.

그가 눈이 먼 것은 고난이었지만, 그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고난의 십자가’가... 결국에는 ‘영광의 십자가’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숙의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눈물로 며칠 밤을 지냈을 때, 주님께서 그 마음에 위로의 음성을 들려주셨다.

 

‘나의 사랑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바다보다도 깊고

나의 공급은 너의

그 어떤 필요보다 크단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사랑은 시간으로도,

공간으로도 잴 수 없는 무한이란다.

 

나의 팔을 넓게 벌리고,

네가 내 품에 안길 때까지

너를 기다리련다.’

 

눈도 잃고, 부모도 잃고, 이역만리에서 입양아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기 상처를 극복하고

만방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귀한 일꾼으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 팔을 24시간 붙잡고 산다.

찬송가 작가 가운데 릴리아 모리스(Lelia N. Morris)여사라는 분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 50세부터 시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52세가 되자 완전히 실명을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작사하고 작곡하며 믿음의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힘들지 않느냐고 피곤치 않느냐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녀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고 한다.

“영원하신 팔이 저를 붙들고 계시는데요?”

 

찬송가 464장을 기억하시는가?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하신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이 찬송은 바로 모리스 여사의 간증이었던 것이다.

 

저 포구에 정박한 배가 폭풍이 일어도 흔들리지 않고 정박할 수 있는 것은

저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기 때문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우리 주님에 대한 신뢰와 소망

그것이 바로 성도들의 영혼의 닻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평온하다...

 

▲관련 글 : 요나의 밑바닥에서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