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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시련이 기쁜 이유 3가지 1814

LNCK 2009. 3. 27. 16:29
 

◈시련이 기쁜 이유 3가지         벧전1:6~9       09.03.01. 설교 녹취



◑1. 시련은 잠깐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련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벧전1:6


▲제가 신학교 때 첫 설교할 때의 경험

어떤 분은 20~30분씩 원고도 안 보고 설교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부럽다.

제게는 설교 은사가 없었는지, 신학교에서 처음 설교할 때를 회상하면.. 아뜩하다.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설교를 한참 하고 내려왔는데,

40분쯤 지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실제로 시계를 보니, 딱 7분 지났었다.

 

원래 힘든 시간은, 잘 안 가고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뜨거운 냄비 위에 손을 얹고, 시간을 재어보면 금방 안다.)


▲시련이 찾아오면 누구나 긴장상태에 돌입하는데,

‘진짜 어려운 상황이 다가왔느냐/안 왔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가?’ ... 이것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어려움이 닥쳤는데,

그 때 대부분 성도들은, 믿음이 생기면서, 영적 긴장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그것은 누구나 한다.


▲시련의 시간이 길어서 힘들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 .. 그 ‘시간의 길이’ 문제이다.

우리가 느끼는 시련이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그 길이가 훨씬 더 길다는데 있다.


그래서 ‘그 시련의 길이를 내가 감당할 수 있다’ 는 생각이 들면.. 어쨌든 이긴다.

그런데 ‘그 시련의 길이가 끝이 안 보이게 길다’ 는 생각이 들면.. 절망하게 된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잠깐> 시련을 당했다고 권면한다.

우리가 사는 영생, 영원한 삶과 대비해 볼 때,

이 세상의 긴긴 시련도... 사실은 잠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시련이 극심해도 <잠깐이다>는 믿음/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안 생기면 잠깐 되게 해주세요/잠깐으로 느끼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한다.


▲시련이 다시 찾아올 때도 힘들다

옛날에 겪었던 시련이 다시 찾아올 때, 또 사람들은 큰 좌절을 느낀다.

10년 전에 경제 환란을 겪은 사람들이, 지금 또 다시 경제 환란을 겪을 때

사람들은 크게 좌절하게 된다.


건강의 문제로 시련을 겪은 분들이, 다 나은 줄 알았는데

또다시 건강의 문제로 시련을 겪게 될 때.. 사람들은 크게 낙심한다.


우리에게 진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 어려움의 크기보다는

그 어려움으로 내가 받게 되는.. <낙심>의 문제다. 


그러나 시험은 짧다.

내가 갖고 있는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든 것일 수 있다.

누가 또 이런 어려움을 경험하랴? ... 이런 절망적 생각이 든다 하더라도

성경은, 성도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근심을... 그 기간이 <짧다>고 가르친다.


38년 된 병자보다 더 오랜 39년 장애우 

95년도에 제가 처음으로 밀알 장애우 사역에 조인해서 협력할 때,

제가 교제하는 장애우가 39년째 침상에 누워있는 분이었다.

16살 때 체조하다가 허리를 다쳐, 그 당시에 39년째 침대에 누워 계셨다.

(그러니까 95년 당시 그 분의 연세가 55세, 지금은 소천하셨다.)


이분 댁에 심방해서, 만남과 교제의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졌는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분을 39년간 돌보았던 그 어머니셨다.

그 어머니가 39년 동안 아들을 돌본 경험을 얘기해 주시는데, 큰 은혜를 받았다.

그 때 얻은 통찰력이 2가지다.


①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사랑하면,

돌봄을 받는 사람은 어떤 초라한 사람이라도.. 결코 초라하지 않다. 돌보는 사람 때문이다.

39년 동안 침대에만 누워 지내는 아들을, 정성껏 돌보는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은,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②주님의 은혜로, 긴 고난의 여정을 <짧게> 여긴다.

그러다가 이 장애우 성도님이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후 그 어머니를 다시 만나 뵈었는데,

‘내가 우리 아들 때문에 매여 있고, 어려움을 당하던 시간은 <잠시>이었습니다’

라고 하셨다.


▲하나님 은혜로.. 시련을 <잠깐>이라고 느낀다

생각해 보시라. 내 몸에 심한 통증이 있을 때는, 단 5분도 아주 길게 느껴진다.

어려운 일 겪을 때는, 쉬운 일보다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

그런데 39년 동안 장애인 아들을 돌보면서 <잠시라니..> 도대체 무슨 얘긴가?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이 길다고 생각하지 마시라.

물론 고난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길 수 있다. 내 예상보다 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돌봐주시므로

그 긴긴 시간을... <짧게> 여긴다는 것이다.

(야곱이 7년을 수일처럼 여긴 것도, 이런 은총이 있었을 수도...)


여러분,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계시더라도,

앞으로 또 어떤 환란을 겪게 되시더라도

벧전1:6절처럼, <잠깐 근심>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찬양드리자.



◑2. 꼭 필요한 근심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벧전1:6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의 더 자세한 번역

여기서 ‘않을 수 없으나’를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if it is necessary ‘꼭 필요하므로, 꼭 필요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 분명하기에’ 란 뜻이다.

<그것이 꼭 필요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근심을 주시는 것이다>는 뜻이다.

개역성경의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와 약간 다른 뜻이다.


나의 어려움과 나의 시련과 내가 극복해야 할 많은 일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손아래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시련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부모 말을 안 들으니까, 삼촌/선생님께 훈육을 부탁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꼭 필요한 것만 잠시 훈육해 주세요!’ 한다.

여기서 부모의 사랑이 느껴진다.


욥의 경우처럼, 사탄이 우리를 시련하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가 있다.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이라면, 잠깐만 해!’


▲꼭 필요하니까 주신다.

어려운 일 당하면 ‘아이고 지겨워, 도대체 몇 번째야!’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과

‘꼭 필요한 일이라면, 하나님이 하십시오!’ 라고 반응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신앙적인가?


우리가 이런 자세를 갖고 있을 때,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그 시련을 허용하시던 것을 곧 멈추실 것이다.

‘이제 되었다. 그만 충분하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이 세상이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 속에 있다.

그러므로 무슨 시련을 당하더라도 <꼭 필요하니까, 하나님이 주셨다>는

각오/믿음/고백을 드리시기 바란다.



◑3.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벧전1:6


▲항상 끝을 보는 눈을 가지면, 기뻐하게 된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1:7절

우리가 가진 믿음은

불 시련을 당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해/정결해진다는 것이다.

보통 것들은, 불로 연단하면... 불에 타서 없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 강해진다.


그래서 우리의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그것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시련을 통해서 <내 믿음이 더 깨끗해지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시련은... 헛된 고생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1:8

 

시련 중에, 경험이 늘어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여러분 조심하시기 바란다.

월남전에 참전한 용사가, 전쟁의 시련을 겪는 것은.. 경험이 늘어나는 것뿐이다.


시련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원래 강직한 내 성품을 더 강직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되고,

내 성격을 아주 괴팍한 정도로 강퍅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돌처럼 굳어져서 어떤 역경도 이겨내는 내 배짱이 커지는 것도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내 믿음이 강해지는 것인데,

그 강해지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보게 되는 믿음>이다.


그래서 시련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그 시련은 오히려 내 인성을 파괴하는 시련/생고생이다.


성도의 시련은 그런 것과는 다르다.

반드시 믿음이 성장하되, <하나님을 보게/만나게 되는 믿음>까지 나아가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런 믿음의 성장을 이루었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1:8


▲욥도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

욥이 시련을 많이 겪었는데,

내가 불과 같은 시련을 겪은 후에 정금처럼 나오리라 라고 말한다. 욥23:10


욥이 겪었던 불시련을 요약하면 크게 3가지다.

①가졌다가 없어지는 아픔의 시련이다.

 

②주변으로부터 듣고 있는 부당한 소리.


③하나님이 잘 안 보이는 것이 바로 불시련이다.

‘아니 이 때쯤이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개입해 주셔야 하는데...’

그 하나님이 안 나타나신다.

‘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나를 돌보지 않으시나?’


이런 고통을 하나 하나 다 겪으면서

마지막으로 욥이 이런 고통을 이겨내면서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42:4~6


욥은 극심한 고난을 겪은 후에, 하나님을 눈으로 뵙게 되었다.

하나님과 막 대화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서 느끼는 것이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5

그러니까 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욥의 온전한 회복이다.

같은 내용이 베드로전서에 나온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니 사랑하는도다  1:8

욥처럼, 당시 디아스포라 교회가, 극심한 시련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뵙게 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서 만나게 되는

그런 놀라운 신앙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연단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나니... 1:8

시련을 통해서 믿음을 가졌을 때,

이전에 멀리 계시던 주님이 가까이에서 보였고,

그런 가운데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과 기쁨이 우리 신앙 가운데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보지 못해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이 가까이 와 계시므로/ 임재를 느끼므로 그렇게 된다.

 

전에는 멀리 계시던, 잘 보이지도 않던 하나님이

시련을 통해서 믿음이 불로 연단되고 나면

하나님과 늘 대화/동행/교제하는, 늘 임재를 체험하는 그 수준까지 격상되는 것이다.

그 수준에 올라가면.. 시련을 오히려 말할 수없이 기뻐하게 된다.

주님과 대화/동행/교제/임재에서 오는 기쁨이다.


▲마치는 말, 이 세 가지를 꼭 기억하자.

①잠시 고난

누구나 시련을 겪게 되고, 누구나 환란을 당하게 되지만

성도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 여러분께 닥치더라도

그것은 <짧은 것>임을 분명히 기억하게 되시기 바란다.

 

②꼭 필요한 고난이니까, 하나님이 주신다. 


③그 필요한 것이란... 내 믿음을 성숙시키고/하나님을 뵙게 되는 고난이다. 


그래서 성도는, 시련을 당해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오히려 기뻐한다.

전에는 멀리 계시던, 잘 보이지도 않던 하나님이

시련을 통해서 믿음이 불로 연단되고 나면

하나님과 늘 대화/동행/교제하는, 늘 임재를 체험하는 그 수준까지 격상되는 것이다.

 

욥이 그랬고, 소아시아에 흩어진 당시 디아스포라 교인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시련 없이 저절로 되는 사람이... 글쎄, 있을까? 나는 아직 못 본 것 같다.

 

<09.03.01. 설교 녹취   *원제목 : 소망으로 이겨내는 시련                      ▣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