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가르친 '믿음' 이해 갈3:14, 09.03.29. 특강 녹취
생소한 내용이라서, 이해가 쉽게 안 됩니다만,
이런 내용을 자꾸 가르치고/들으면서.. 더욱 이해가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 이해가 안 되면, 두 세 번 거듭 읽고자 합니다.
▲오해의 교정이 필요함
로마서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은 왜 그리 율법을 지키려고 그렇게 애쓰니? 그건 애당초 불가능해!
그러니까 대신에 믿어야 돼!’
우리가 이런 설교를 과거에 많이 들어왔겠지만
지금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은,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 학습의 여파로 자꾸 자기 머리 속에 이런 그림을 그린다.
‘구약은 행위 언약, 신약은 은혜(믿음) 언약’ (부분적으로 맞지만, 상세한 설명 요함)
‘구약은 율법을 지키려다 말아먹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을 아니까, 애초에 율법을 지키려는 시도조차 할 필요 없어,
믿기만 하면 된다잖아!’
이런 선입견은, 성경의 내용과는 의미가 한참 다르다.
먼저, 구약은... 행위언약이지만, 그냥 겉모양만 잘 하면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구약에서도 <마음의 순종, 마음의 할례> 이런 사상이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관통하는 구약의 중심 주제이다,
대부분의 시대에, 제사와 절기가 규례대로 지켜졌다.
그러나 하나님이 못 마땅해 하신 것은, 너희 마음이 멀도다 하는 것이었다.
신약도 마찬가지다.
은혜(믿음) 언약이라지만, 그 핵심은 마음/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이다.
은혜(믿음)는..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서, 마음/진심으로 순종하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 하며,
무엇보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지식적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이것은 헬라적 믿음 개념)
성경에서 믿음이란, 지정의(행위)를 모두 포함하는 것을 뜻한다.(히브리적 믿음 개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 자체에 ‘믿음의 순종(행위)’을 당연히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할례/안식일/절기/정결규례 등의 외적 준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줄(의롭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예수님-사도바울은 연속해서, ‘그건 실패다’고 가르치고 있다.
▲복음은 ‘반율법주의’가 아니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율법을 행)해야 되는데 이제는 안 해도 된다더라’ ...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 아니다. *도덕법으로서의 율법 뜻함
성경을 보면, ‘(율법을 행)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복음이 우리에게 복음인 것은
예전에는 내가 할 수 없었던 것, 내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더 풀어서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2가지 측면에서 혜택을 주시는데,
-영단번의 속죄 제사를 드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신분적 차원>에서 영원히 구속하셨다.
-또한 성령을 주시고, 우리 성품을 변화/중생시켜, <인격적/삶>의 차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 갈 수 있는.. 새사람이 되게 하셨다.
전자는 중생하는 순간,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인 반면,
후자는 중생한 이후에, 일생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한 마디로 얘기할 때, 통상적으로 <능력>이란 말을 썼다.
롬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1;18
(여기서 ‘능력’이란, 편집자가 이해하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해 주신 십자가와 부활, 즉 ‘대속의 능력’과 아울러
내 속에서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도록 ‘내 속에서 도우시는 능력’
위 2가지 능력을 둘 다 뜻하는 것으로 여겨짐)
▲로마서가 지적하는 유대인들의 문제 - 율법과 그 형식적 준행은.. 아무 소용없다.
다른 말로 이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첫 언약(율법)’의 문제점이다.
그 문제의 핵심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들을 전혀 변화시키지/순종하게 못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은 했지만,
즉, 외형적/형식적인 율법은 지켰지만,
그 율법을 내면적으로/진정으로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실패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여러분은 유대인으로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태생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언약)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너희가 유대인이라고 큰 소리 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고,
아니면 하나님이, 돌들을 취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을 것이라고 고함쳤다. 마3:8~9
율법을 갖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행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외형적 율법주의로는 절대 구원 못 받는다는 뜻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안 되지만, 복음으로 의롭게 된다.
결국 관건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도덕법/율법을 행할 수 있느냐/없느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해 보니까 안 되더라’는 것이다. (제사법, 시민법이 아니라 도덕법으로서의 율법 뜻함)
왜냐하면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 ‘죄의 노예’ 아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 복음이 등장한다. 복음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여기에 길이 생겼다.
사람이 해 보니까 안 되는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이다...라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님이 법적으로 그 죄의 권세를 멸하셨고,
또한 성령을 통해, 우리 변화된 성품이, 그 법을 순종해서 사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럼 그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무조건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다 되는가?
즉 삶의 열매가 없어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그 능력/효력의 혜택(구원)을 받는가?
(다 된다고 이제까지 우리가 듣고 배웠다. 그것은 부분적 이해이며, 오해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인데, 거기에는 회개의 역사가 동반한다.
그래서 믿음과 동시에, 회개를 통한 자기 삶의 변화가 어떤 형태라도 나타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100%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하지만,
그 마음에 새긴(not 외적 형식)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점점 성장progress이 나타난다.
신분은 믿는 순간 이미 의인이 되었지만, 계속 의롭게 살려는 삶이, 성령의 인도로, 자연히 동반하게 된다.
설교자의 표현으로 '복음의 능력(복음이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뜻)'이 나타나게 된다.
▲믿음, 복음은 반율법주의(율법폐기론)가 결코 아니다
사도바울 시대나, 루터의 종교개혁시대나, 아니 모든 시대에
사람들이 로마서의 복음을 오해해서
‘믿음으로 구원 받으니, 율법은 이제 필요 없네!’ 라고 생각/오판했었다.
더 심한 경우, ‘죄를 짓는 것이 은혜를 더하게 한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그런데 성경의 통일성을 생각할 때
복음서(특히 마태복음)-야고보서-베드로서-요한계시록 등 모든 신약성경은
성도가 올바른 순종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믿음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온전케 된다고 말한다.
특별히, 야고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순종하는 삶의) 행위를 통해서라고 못 박아 말한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요지는, 기준을 낮추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오해하기를, 율법의 기준이 너무 높아서 사람이 지킬 수 없었는데,
이제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쉽게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결국 율법의 기준/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기준을... 확 낮춰버렸다. 이것은 오해다.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조금 위험한 표현이다.
하지만 <행위/순종이 없는 상태에서도 결코 구원 받지 못한다.> .. 이 말은 정확하다.
죽은 믿음은 행위가 없지만, 산 믿음은 반드시 행위/순종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자가 쓴 책 제목은「행위 없는 구원?」이며, 거기에 물음표(?)를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바 ‘행위 없는 구원’은 - 틀렸다는 뜻이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소리가 결코 아니다...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은?
‘행함/순종 없이도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 받는다’ 는 말이 틀렸다면,
그 말은, 과연 무슨 뜻인가?
갈라디아서를 빌어서 답변하면,
갈라디아서에서 ‘왜 믿음이냐, 왜 율법의 행위로는 안 되냐?’의 문제를 다룬다.
바울은 그 답을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이, 믿음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행위는 우리에게 성령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목적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주신 것도
왜 그랬느냐 하면 -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하시려고... 그러셨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야, 마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내적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전히 지키고 순종해야 ... 의롭게 되고/구원받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3:14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길은, 성령의 길인데(성령을 통해 순종의 삶을 삶),
그 성령은 할례를 받는 등, 율법의 준수를 통해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내가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을 받는 것이다.
(단, 성령 받고 변화된 사람이 죄를 더 이상 한 번도 안 짓는 다는 의미가 아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점점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뜻이지, ‘100% 무결점의 완벽한’ 이란 뜻 아님)
◑로마서에 의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근본적으로 부활신앙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 생산적 면에서) 자기들의 몸이 이미 죽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웃기고 있네’ 하면서 안 믿든지,
‘아멘’하면서 믿는 것의 둘 중 하나였는데, 아브라함은 믿음 편을 택했다.
'하나님은 (태가) 죽은 사람도 살릴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 로마서
(그리고 독자 이삭을 드린 것도, 역시 그런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히브리서)
아브라함은.., 자기 죽은 몸 살려내고, 사라의 죽은 몸 살려내서
아들이 태어나게 하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의 신앙은 부활신앙이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4:17
▲여기서, 바울은, 그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을.. 우리의 신앙과 연결시킨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다는 것이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4:24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믿음이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동일하다.
-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부활신앙이다.
칭의/신분의 변화가 현재적 구원이라면, 부활(구원의 완성)은 미래적 구원이다.
아브라함은 미래적 구원을 믿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의 이유’라고 설명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4:25
결국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우리의 범죄함을 통해서 내어주신 일) +
예수님의 부활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해 살아나심)을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아래에 계속 설명하는 데, 그것은 구원의 완성을 뜻한다)
▲그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왜 거기에 예수님의 부활이 필요한 것인가?
우리는 순전히 법정적인 개념으로, 내 죄의 책임만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신 ‘십자가’(구원의 시작)만 믿으면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바울/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그림이 끝이 아니다.
또 부활(끝/완성)이 더 있다.
로마서를 읽어봐도 ‘칭의’는 4장에서 일단락된다.
4장 이후에는, ‘칭의’가 안 나온다. 딴 얘기가 나온다. (순종의 삶 등)
칭의론은, 구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지만 ‘첫 단계’이다.
롬1:16~17절에서 바울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 복음이야말로 우리 믿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첫 단계>지만
동시에 <마지막 구원/부활>까지 가야한다는 뜻이다.
구약을 예를 들어 말하면,
‘출애굽’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
‘광야 여정’을 다 거쳐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완성)
믿음은, 우리의 마지막 구원까지 인도해 나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이 어떻게 구원의 능력이 되느냐?
1:17, 왜냐하면 (롬1:17절 서두에 ‘왜냐하면’이 있는데, 한글성경엔 안 나온다.)
복음에 하나님의 (칭)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설명한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칭의(하나님의 의)에 대한 설명이 4장까지 쭉 이어지다가
그 설명 마지막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예로 나온다.
바울이, 칭의 얘기를 로마서 서두(1~4장)에서 다루듯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구원의 여정에서 ‘서두’에 해당한다.
그 칭의는 부활(구원의 완성)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시작이 반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았다.
‘시작이 반이다’는 말도 있듯이, 시작한 것은.. 완성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칭의 받았으면.. 구원 (완성) 받겠네!’ - 이런 결론을 낼 수 있다.
(4장이 지나고, 5장부터 칭의 받은 자의 삶이 나온다.)
우리가 지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 받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칭의)
-그렇다면 구원의 끝까지 이를 것이다... (뻔한 얘기다) 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 단락, 한 번 구원 받으면, 엎어지나 자빠지나 구원 받는다는 뜻을 설명하고 있음
그러나 그런 와중에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아래 계속)
▲영적인 축지법 (설교자가 만든 말)
오늘 우리는 구원을 접어놓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영적인 축지법’을 구사한다.
출애굽 하는 순간.. (중간 과정을 접어서) 벌써 가나안까지 다 들어가 버린다.
회심하는 순간.. (영적 축지법을 써서/풍자적 표현) 벌써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
그래서 우리가 잘 쓰는 ‘구원 받았다’는 과거시제의 말도, 잘 알고 써야 한다.
구원을 시작(회심)한 것이지, 결코 구원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구원을 제대로 알려면
그 접어두었던 부분을 좀 펼쳐야 한다.
아직 우리가 광야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구약적 표현)
우리가 영적인 순례자의 길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신약적 표현)
이 과정을 생략해 버리면, 성경의 전체적 맥락이 이해가 안 된다.
▲우리가 만약 광야에 있다고 칠 때
광야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과제가 무엇인가?
‘내가 광야에서 어떻게 천년만년 잘 살아볼까?’...가 아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가나안 땅에 잘/무사히 들어갈까?’... 이다.
우리가 구약을 읽어보면,
가나안 여러 민족들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 포기하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애굽이 차라리 낳았다’고 하다가,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사기도 했다.
광야/순례여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도들은 출애굽을 이미 경험했다.
그러나 아직 우리 몸이 부활한 것은 아니다. 아직 영생/가나안을 얻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광야여정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그네 여정을 잘 완수하는 것>이 우리 궁극적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현세적 축복은 차제의 문제인 것이다.
앞서 ‘시작이 반이다’에서 설명했듯이
칭의 받은 사람은, 진정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어쨌든 구원에 이를 것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그의 일생의 관심은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다른데 관심을 갖고 있다면, ‘신학’을 ‘성경’보다 더 믿은 것이 된다.
루터의 신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신학을 극단적으로 잘못 오해했다는 것)
<로마서 특강 5회 중 1~16분 녹취, 정리 ▣ 믿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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