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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붙여주시는 하나님

LNCK 2009. 4. 29. 22:20

www.youtube.com/watch?v=_GTQpvQZ-2c 

◈붙여주시는 하나님                       창14:17~20                09.03.29.설교녹취 

 

 

◑위기는 성도에게 기회다.

 

▲위기이지만 아브라함에게 기회가 되다

소돔 등 사해 동맹국 5개 도시국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4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고, (아마 조공을 내지 않았던 모양)

이로 인해 두 동맹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사해 동맹국이 패했고,

그 와중에 소돔 성에 살던 아브라함 조카 롯의 가족도, 포로로 잡혀 가고 말았다.

 

아브라함은 더 남쪽 광야에 살았기 때문에,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카 롯의 가족이 포로로 잡혀간 마당에,

못 본체 하고, 자기 몸만 사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집에서 기르던 종들 중심으로 318명의 민병대를 조직해서

목숨 걸고 전쟁 길에 올랐는데, 만약 지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 위기는 아브라함에게 대단한 기회였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지도자로 부상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무대’였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를 만났지만,

그 위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실력자가 된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는가!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역사를 만든다.

 

▲역사에 매 시대마다,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은 언제나 적중했다.

세월이 흉흉하지 않으면,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2차대전은 윈스턴 처칠 경을 낳았고,

한국전쟁은 맥아더 장군이란 영웅을 탄생시켰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벌어진 어수선하고 복잡한 정세와 혼란은

아브라함이란 영웅을 낳았던 것이다. 아니었으면 완전 무명의 촌로이었다.

그 전쟁과 혼란은, 사실은 아브라함을 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판세가 어려울수록, 유리한 기회가 된다.

어려운 길목에서, 결정적으로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두가 어렵다고 아우성인 이 때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이 펼쳐 가시는 새역사의 무대에, 주연 배우들이 되시기 바란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께서 하신 <감자 이야기>

어느 시골에 감자를 재배하는 농부들이 있었다.

농부들은 감자를 다 캐낸 다음, 시장에 내다 놓기 전에, 분류작업을 한다.

큰 감자/중간 감자/작은 감자를 각각의 자루에 분류해서 담는다.

그렇게 해서 상/중/하품 감자로 나누어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런데 유독 한 농부는, 그런 귀찮은 분류작업을 하지 않았다.

수확한 감자를 그대로 트럭에 실어서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아무 이상 없었다.

그렇게 분류하는 시간과 수고를 절약하다보니, 오히려 다른 농부보다 더 잘 팔았다.

 

보다 못한 다른 농부들이 하루는 작심하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감자를 분류하지도 않고 시장에 내놓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파느냐?’

 

그러자 그 농부가 말했다.

‘물론 나만의 노하우가 있지, 그런데 별 것 아니야.

나는 감자를 무조건 적재함에 싣고, 시장까지 가는 사이에 있는

울퉁불퉁한 비포장 포로를 약 1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작은 감자는 밑바닥으로 자동적으로 몰리고, 중간 감자는 그 위에,

그리고 제일 큰 감자는 제일 위에 저절로 분류가 되는 법일세!

그러면 시장에서 그대로 자루에 나누어 담기만 하면 되네.’

 

들어보니까 진짜로 별 비결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원리가 있다.

 

시골길이 울퉁불퉁하고 아주 불편하지만

그러나 계속 달리다보면, 큰 감자(인물)가 점점 위로 부상한다는 사실이다.

작은 감자들이 자꾸 아래로 내려가면서, 자동적으로 위에는 큰 감자들만 남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들도

내 주변 환경이 울퉁불퉁하고 대단히 어려울 때... 도리어 위로 부상하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이 내 손에 붙여주셔야 승리한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창14:20

아브라함의 군대는 겨우 318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규 군대도 아닌 민병대가, 그것도 수많은 대군을 이긴 이유가 무엇인가?

위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이신 하나님 때문이라고!

 

*손에 붙인다는 표현은 - 그의 손에 내어줘서 give/deliver 마음대로 하게 한다는 뜻

 

▲내가 하나님께 신실하면, 대적들을 나의 손에 붙이신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대상14:10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 너는 그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필경은 그들을 진멸하리라  신7:24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17:47

 

▲내가 하나님을 배반하면, 나를 대적의 손에 붙이신다.

 

-나는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니.. 겔23:28

 

-저희를 열방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저희를 치리하였도다. 시106:4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삿6: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군의 손에 붙이시고

심지어 그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왕하17:20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삿13:1

     

사울이 다윗을 죽일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사울의 손에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삼하22:1

 

사단이 욥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욥의 생명을

사단의 손에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욥2:6

  

▲세상 것 잡으려다가, 도리어 세상에 붙잡히고 말았던 롯

롯은 세상 것들을 붙잡으려고, 소돔 땅으로 갔다가, 나중에 소돔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나 재미있는가? 도리어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상 것 잡으려고 쫓아다니다 보면, 어느 샌가 내가 세상에 포로로 붙잡히게 된다.

 

재미있는 예화가 기억나실 것이다.

신병이 전투에 나갔다가, 수풀 속에서 고함을 질렀다.

‘대장님, 제가 포로를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왜 빨리 안 돌아오니?’ 

‘얘가 나를 안 놔줘요!’

 

 

하나님이 붙여주시니까, 양들이 목자를 따라온다.

김규동 선교사님이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자

그 대학의 적군파가 그를 공격했다.

얼마나 칼에 많이 찔렸는지, 그의 다 죽게 되어서 땅바닥에 버려졌다.

 

그래서 거의 죽은 상태로 의식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게 된다.

 

그가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날아가고 있는데,

수 천/수 만의 양들이 자기를 따라오는 환상을 보았다.

 

한참 가다가 보니까, 그 양들의 얼굴은 자기 교인들의 얼굴이었다.

너무 좋아서 품에 안겨 날아가던 그가 말했다.

‘잠깐만 저를 좀 세워 주세요. 제가 제 양들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품에서 내렸다. 그리고 따라오는 양들을 향해 자기 팔을 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따라오던 양들이 힐끔힐끔 자기를 쳐다보더니, 전부 자기 곁 좌우로 비껴갔다.

 

그때 주님이 음성이, 그의 마음속에서 들려왔다.

‘그게 어디 네 양이냐? 내 양이다.’

지금까지 자기를 안고 가던 분의 얼굴을 보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김규동 선교사님은, 그 때부터,

자기가 잘해서 양떼들이 자기를 따라온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되었다.

자기가 잘 해서 양떼들이 자기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주시니까, 자기를 따라오는 것이란 사실을

그는 절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주께서 내게 대적을/승리를 붙여주시려면...

 

▲내가 붙잡으려 하지 말고, 주님께 붙어있으면.. 다 붙여주신다.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가 내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셨으니까, 이만큼 된 것이다.

주님이 허락하셔서 이만큼 되어진 일이다.

 

앞으로도 주님은 모든 것들을 내게 붙여주실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내가 붙잡으려고 너무 애쓰면 안 된다. 그러면 롯처럼 된다.

 

그냥 내가 주님의 품에 잘 안기기만 하면.., 주님이 모든 것을 내게 붙여주신다.

내가 주님께 더 가까이 붙어있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면 주님이 내게 붙여주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4

 

 

 

◑두 왕의 영접

 

아브라함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 두 왕이 나와서 그를 영접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창14:17~18

 

▲소돔 왕보다, 살렘 왕을 붙잡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인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예물을 바친다.

 

소돔 왕은 그 지역의 맹주요 실력자이다.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아브라함이 잘 보여야 할 인물이었다.                                *잘 보여야 : 호감을 사야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가 하사하는 선물(전리품)을 거절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그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창14:20

 

소돔왕의 하사품을 거절한 아브라함은

오히려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자기가 가진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렸다.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여러분, 십일조는, <내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손에 붙여주셔서 이겼습니다> 하는 것을 인정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소돔 왕의 유혹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살렘 왕보다, 소돔 왕을 우리가 붙잡게 되는데,

‘내 말을 잘 들으면, 내가 네 뒤를 확실히 봐 줄께!’ 하는 유혹이다.

‘내게만 잘 보이면, 네 앞길은 창창할 거야!’ 이게 세상의 유혹이다.

이런 기회주의적인 유혹에 굴복하는 순간, 하나님의 손길이 내게서 떠나게 된다.

 

여러분, 권력자에게 너무 아부하지 마시라.

세상 권세에 너무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마시라.

물론 존경은 하지만, 우리 의지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잊지 마시라.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 손에 대적을/승리를 붙여주실 것이다.

 

▲살렘 왕의 떡과 포도주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14:18

 

살렘 왕이 떡과 포도주를 갖고 나온 것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살렘 왕이 준비한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소돔 왕이 보장하는 세상적 연줄/뒷 배경을 포기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살과 피의 능력을 붙잡았다. 영생을 붙잡았다.

 

결국 아브라함은,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다.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어서, 오늘까지 역사에 대대로 존경을 받고 있다.

잠시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거절하고, 영원한 생명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현실적 이익을 거부하고, 영생을 붙잡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게 보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영원한 생명을 선택한 사람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방백(작은 왕, prince)이 아니라  

마치 아브라함처럼 대대로 승리하고 존경받는 하나님의 방백이 될 것이다.             ▣ 기독교 승리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