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됨 롬1:16 09.03.27.강의녹취
권연경 교수, 샘물교회 로마서강의 2회 33~47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1:16
◑미래 시제로서의 구원
▲구원의 확신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여러분, 앞으로 구원 받으실 겁니까?” 이렇게 미래시제로 물으면,
성도들은 질문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여러분, 구원 받았습니까?” 이렇게 과거시제로 물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엄격히 성경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과거시제로 말할 수도 있기는 하다.
(칭의는 받았다. 그러나 성화는 현재 진행 중, 영화는 아직 받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예수님의 재림, 우리 몸의 부활>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결승점을 이미 통과했다고 믿고 싶은지는 모르나
여전히 우리는 신앙의 경주 상태에 있다.
빌립보서에서, 또한 히브리서에서는, 성도를 ‘달리는 경주자’로 묘사할 때
아직 목표(구원의 완성)지점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설명한다.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시각을 교정해야 하는 부분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아직 남은 부분(구원의 완성)이 있다는 것이다.
‘믿으면 구원받았습니다’는 말은, ‘칭의’받았다는 것이요, ‘구원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다 달렸습니다./구원을 다 이루었습니다.’ 라는 뜻은 아니다.
신약에서 <교회>는, 구약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에 비유된다.
바울도, 히브리서도, 베드로서도 그렇게 비유한다.
지금 우리는, 구약적 비유로 설명하면
이미 출애굽은 한 상태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니라
광야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약속의 땅’은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이다.
우리는 우리 몸이 완전히 구속될 것을 바라며, 순례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바울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대부분 <미래적 차원>이다.
(쉽게 말하면, 아직 구원 받지 않은 것이다.)
로마서의 총주제라 할 수 있는 1:16~17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자랑한다고 했다.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그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도, 현재적 차원(이미 구원 받았음)으로 이해하면, 부분적인 이해다.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즉 미래적으로 ‘부활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래적으로 이해해야 .. 온전한 이해다.
지금 우리는 구원을 끝낸 것이 아니라, 시작은 했고, 중간 쯤 와 있는 것이다.
끝은 다시 말하거니와, 그리스도의 재림과 몸의 부활 때, 완전히 끝난다.
▲롬5:9~10절도, <구원을 미래>로 설명한다.
5:9, 그런즉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과거, have been>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 <미래, will >
‘진노하심’ - 마지막 심판 때의 진노를 뜻한다. 역시 미래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 즉
- 이것은 <현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됨을 누리고 있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롬5:10
- 이것은 <미래>에 우리가 구원을 완성/부활하게 될 것을 뜻한다.
▲성경의 다른 여러 곳도 마찬가지다.
기본적 구원의 시제는, 현재적이지만, 오히려 미래적에 더 강조점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운운하다가
구원을 너무 ‘현재적’인 것으로만 국한시켜버리는 왜곡된 행태가 있는데,
이렇게 현재적 구원(구원의 확신으로 현재 이미 구원받았다는 말),
또는 과거에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만을 계속 강조하다보니,
성도들이 너무 허리띠를 풀고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자로 가나, 모로 가나 천국에 확실히 들어간다고 하니.. <성화>가 되지 않는다.
<성화sanctification>가 되지 않으면.. <영화glorification> 도 되지 않을 것이고..,
(이것은 매우 조심스런 추측이지만
칭의(의화)받은 성도가 성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받은 칭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해석과 시도가 항상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를 위시해서 ‘회심’을 강조하는 흐름이
이런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는데, 구원론에 있어서 ‘뜨거운 감자’이다. 주)
▲참고로(주제에 절반 벗어난 얘기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알려진 대로, 신약의 大주제는 ‘하나님 나라’인데, 그것은 현재적/미래적이 동시에 있다.
과거에 우리는 ‘미래적 하나님 나라’만 알다가, 새로운 신학을 배우고 나서부터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지나쳐서 ‘미래적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을 간과해 버리는 현상이 지금 나타난다.
통계가 전부는 아니지만, 단순하게 통계를 내어보면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이 100번 말씀하시면 (물론 현재와 미래를 다 포함하지만)
현재적인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1%,
미래적인 뜻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 것은 99%이다. (물론 현재를 포함하지만)
그만큼 주님의 말씀하신 의도는 항상 <미래적/영원성/구원의 완성>을 염두에 두셨다는 뜻.
사실이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현재와 미래>중, 어디에 더 강조를 두어야 하는가?
-당연히 미래다.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 많은 교회에서 ‘현재/생활/적용’에
더 많은 강조를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 <구원을 이미 다 받았다>는 착각 때문이다. 이제 구원을 위해서는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사탄의 무시무시한 미혹’이다.
'미래'적 구원/구원의 완성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능력>인 이유
▲왜 하필 <능력>인가?
로마서의 총주제라 할 수 있는 1:16~17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자랑한다고 했다.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그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성도들에게 보통 ‘복음’에 대해 설명하시오 요청하면, ‘은혜’, ‘믿음’ 등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구원을 주시는 ‘은혜/믿음’이 아니라
‘능력’으로 설명한다.
그 이유는, 간략히 설명하면,
아들을 주셔서 칭의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은, 즉, 구원의 첫 단추를 꿰게 되면
‘성화’와 ‘영화/부활’까지 .. 어쩌면 쉽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순종’이 반드시 동반되지만,
‘순종’ 역시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연히 순종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복음은 능력>인 것이다.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은 칭의(시작)→성화(과정)→영화(완성)에 물 흐르듯이 이르게 되어있다.
그것을 두고 바울은 '복음은 능력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로마서의 전체 주제이다.
▲결국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능력>
당시 초대교회 상황에서 볼 때, 예수 믿다가 중간에 포기하기 쉬웠다.
왜냐하면 핍박이 너무 극심했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을 완성하기란.. 쉽지 않았다.
예수 믿고 칭의(의롭다 하심)를 받아도, 생명의 위협, 투옥, 재산몰수의 핍박 앞에서,
당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았다/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말이 ‘이기는 자에게는’이다.
‘그런 핍박을 이기는 자’가..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에는 <능력>이 있어서
성도들이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그게 바로 '복음의 능력'이다.
주.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핍박이 없다고 마냥 좋아할 것인가?
(북한이나 이슬람 국에서는 아직도 핍박이 있지만)
오늘 우리에게 도전은, 핍박 대신에 물질주의, 향락주의의 유혹이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미끄러지게 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사탄의 작전이다.
어쩌면 초대교회의 핍박에 못지 않게 무서운 유혹이다.
그러나 <복음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으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자랑하는) 것이다.
◑로마서 1~8장의 대강 주제
▲롬1~3장 : 칭의에 대해 설명 *칭의 : 믿음으로 구원 받음. 의화라고도 함, 영어로는 Justification by faith
▲롬4장 : 아브라함을 통한 칭의의 예
아브라함이 믿을(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더니 진짜 아이가 생겼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처럼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으면,
영생(칭의)을 잉태하고 낳을 수 있다는 논지. (이렇게 4장에서 칭의 얘기가 끝남)
▲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4장까지가 ‘칭의’ 얘기라는 뜻)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5: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소망하고)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한다’는 기분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만만한 소망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되었다’는 뜻이다. 5:1~2절이.
이것은 <구원의 완성을 받았다/이루었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칭의에 들어간 성도는, 구원의 완성까지 별 탈 없으면, 거의 성공한다는 뜻!
우리가 야구/축구 경기를 시청할 때는
‘이길까 말까’ 대단히 초조해 한다.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다.
‘즐거워한다’는 것은, 대단히 자신감이 넘치는 소망이다. ‘거의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5:3절,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란은 인내를/연단을/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다.
여기서 ‘소망을 이룬다’는 것은 구원(성화)의 완성을 뜻한다.
현재 상황을 보면, 핍박도 많고, 구원을 이룰까/못 이룰까 걱정도 되지만,
하지만 환란 중에도 우리가 자신감이 있는 것은
인내와 연단을 거쳐, 소망 즉 종국의 구원의 완성을 이룰 줄 알기 때문이다.
5:4절부터는 십자가 사랑을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 다른 것 안 주시겠냐?’ 이다.
1~4장의 칭의가, 끝/구원의 완성까지 간다는 얘기다.
▲롬6장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구원(칭의/성화/의화)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믿자마자 저절로 천국으로 쓩 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를 점점 변화시킨다는 말을, 6장에서 하고 있다.
▲롬7장
율법이 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롬8장
7장의 결론/대안으로 8장이 시작한다.
생명의 성령의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해방되어서, 육신을 쫓아가지 않고, 성령을 쫓아가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정죄받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길을 향해서 걸어가도록 하시는..
그래서 우리가 ‘확실히 구원받는다(성도의 견인)’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계속 짓지만,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 이런 설명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런 변화/성화의 능력을 주신다.
예수와 하나 됨을 통해서, 성령의 법에 순종함을 통해서...>
이런 논지를, 바울이 로마서에서 펴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서두 롬1:17절에서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라고 전제하고
1~8장까지, <어떻게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인가?> 논지를 설명하는데,
그 대강 줄거리를 위에서 각 장별로 설명했다.
▲로마서는 율법폐기론이 아니다.
‘사람은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어요!’
‘그러면 안 지켜도 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 주셨어!’ ... 이런 논지가 아니다.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 ... 이런 요구는 어떤 의미에서 신/구약에서 똑같다.
로마서에서도 끊임없이 나오는 표현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에서 보듯이
이런 율법적 요구와 형벌은 변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 (‘괜찮다’가 아니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이 (성)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즉, <성령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지키며 살아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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