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복 4화 눅6:20~26 09.05.17.설교녹취 -오디오 듣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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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비슷한 내용이 누가복음에서는 ‘평지설교’로 나온다.
어떻게 된 일인가? 성경이 정확하지 못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저도 내용이 좋은 설교를 다른 교회에서 할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같은 설교를, 산 위에서 하신 적도 있고,
산 아래 평지에서 하신 적도 있었다고 본다. 둘은 모순이 아니다.
▲초신자에게 상당히 무거운 내용
이 설교를 듣는 대상을 살펴보면, 그 대상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의 처음 대하는
‘초신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설교내용(산상수훈 or 평지설교)을 보면,
오늘날의 잣대로 평가하면 ‘고급반’에 해당한다.
오늘날 우리는 초신자들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다 잘 됩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데, 예수님은 강력한 말씀들을 쏟아내신다.
‘부자 될 생각하지 마세요.., 가난한 것이 축복입니다.
기뻐할 생각하지 마세요... 우는 것이 축복입니다.
남에게 칭찬 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핍박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히려 칭찬 받는 사람에게 화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입교하실 때부터 명백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빡세게 말씀하셨다.
만약 오늘날 누가 이렇게 초신자들에게 얘기한다면
‘이 교회, 이상한 교회네... 혹시 잘못된 데 아냐? 다른 데 가야 되겠다!’
이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런 교회 담임목회자가 바로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은, 이제 갓 부름 받아, 신앙생활을 입문하고 시작하는
그야말로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어부 출신들, 아주 초신자에 불과한 그들에게
훈련 받은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
이 말씀들(소위 팔복)은 너무나 전하기에/듣기에 부담스러운 말씀들이다.
‘나를 따르면.. 다 잘 될 거야’
‘잘 믿으면.. 모든 게 다 무난하게 잘 해결될 거야’
‘날 믿어봐.. 잘 먹고 잘 살게 돼! 저 잘 사는 나라들을 봐! 게다가 병도 나아!’
신기하게도 예수님은 이런 사탕발림 같은 말씀들을 한 마디도 안 하셨다.
(어디서 하신 적이 혹시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제 기억에는 없는 것 같다.)
저는 ‘예수 믿으면 잘 된다/병 낫는다/복 받는다’는 말씀을
너무 싫어하는 그런 부류의 목사가 아니다.
저는 ‘예수 잘 믿었더니 잘 되고, 성공하고, 만사에 복을 받았다’는 간증을
여러분으로부터 듣기를 원한다.
그런데 성경의 원칙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출발점, 시작 포인트’는 오늘날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
이 사실 만큼은 우리가 알고 신앙생활 하자는 것이다.
사람들 듣기에 솔깃한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잡으려 하는 것은... 복음은 아니다.
복음은, 출발점부터, 그것을 수용하려는 사람들에게 ‘희생, 대가’를 요구한다.
‘여러분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죽을 각오부터 하십시오’
‘핍박 받을 각오 없이는 안 됩니다’
‘내 이름 때문에,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어려움을 겪는 다면
그것은 정말 영생에 큰 복이 됩니다.’
예수님은 아예 처음부터 이런 말씀들을 대놓고, 여과 없이 선포하셨다.
처음에는 사탕발림 같은 말씀으로 살살 비위 맞춰주다가
뿌리 내리고 난 다음에 ‘고급반’을 운영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방식은, 애당초 핍박 받을 것을 가르치시고,
그것이 복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가장 큰 축복은.. 아마도 배부른 것이었다.
이 사실이, 당시 문헌에 나와 있다.
우리나라에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을 상상해 봐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 당연히 최고의 복이었다.
(요즘 TV에서, 오지에 나가서 ‘서바이블 게임’ 하는 것을 보면,
며칠 굶은 사람들에게 작은 먹거리 하나라도 큰 복임을.. 간접체험으로 알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부르게 먹는 것이 복이다’라는 생각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배고프고, 가난하고, 굶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면서 겪게 될, 미움과 핍박, 의롭게 살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의지할 대상이 없는 사람이 복되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위로 받을 대상이 없는 사람이 복되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길도 복된 길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화’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정말 추구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부자 되고 싶은 것, (저도 그렇다.)
-배부르고 싶은 것,
-성공하고 싶은 것,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싶은 것.. 등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들이.. 화가 있는 일이고, 저주스런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6:24~26
(이 세상에서도 그렇겠지만, 영원한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위 말씀은 사실이다.)
▲4복 4화
마5장은 8복이지만, 비슷한 내용의 눅6장 본문은 ‘4복 4화’로 되어 있다.
그런데 ‘4복’은.. 우리가 가장 꺼리는 게 4복으로 되어 있다.
가난, 굶주림, 슬픔, 핍박이다. ↓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6:20~22
우리가 가장 추구하고
부자, 웃는 것, 배부른 것, 칭찬
이것들을 ‘4화’라고 말씀하신다. ↑
실제로 예수님은 평소 사역에서 이 ‘4복 4화’를 적용하셨는데,
①예를 들면, 눅7장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여인,
그렇지만 진정 복음을 받아들인 여인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셨고,
반면에 겉으로 깨끗하고 정결한 삶을 산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만
속으로 진정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새인 시몬.. 두 사람을 대조시킨다.
②눅15장에도 보면
탕자와 그 형이 대조되어 나오는데,
비참한 처지의 탕자는 ‘4복’에 해당되고
그를 판단하는 형은 ‘4화’에 해당된다.
그러면서 성경은,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복 있는 자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③눅16장에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를 대조시킨다.
전자는 ‘4복’의 사람이고, 후자는 ‘4화’의 사람이다.
④눅18장에도 두 사람이 대조되어 나온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와서, 뒤쪽에서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죄인 세리’와
꼿꼿하게 서서 ‘나는 저 죄인들과 같지 아니하나이다’ 라고 기도하는 바리새인이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복된 사람인가를 대조시키신다.
▲노아의 때, 롯의 때
저는 금욕주의를 칭찬하고, 부자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부자가 되기까지 기울였던 남다른 노력과 수고를 인정해줘야 한다.
부요함, 배부름, 웃음, 칭찬(4개 좋은 것)이 .. 절대로 죄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난해지고, 굶주리고, 울어야만(4개 나쁜 것) .. 복된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이렇게 대조적인 말씀(4복4화)을 역설적으로 가르치시는가?
-노아 홍수로 인류가 멸망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 세례를 받아서 초토화 되었다.
그 멸망 직전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을,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시는데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눅17:26~30
위 말씀이 이해가 되시는가?
사람들이 치고 박고, 싸우고, 음란히 행하고, 동성연애 하다가 망한 것이 아니라 (물론 그랬지만)
위 누가복음의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들고, 집 짓고, 사고 팔고 하다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그게 무슨 잘못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먹는 게 무슨 잘못이며, 결혼하는 게 무슨 잘못이며
사고 팔고 집 짓는 것이 도대체 무슨 잘못인가?
왜 그게 ‘멸망의 전조’가 되는가?
→그것이 그들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없이 사고 팔고, 집 짓고, 결혼하고.. 바빴던 것이다.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 심고, 세우고, 노력하는 모든 일은
‘화려한 저주’에 불과하며, 결국 불타서 없어질 것이라는 .. 말씀이다. 눅17:26~30절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나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그 세상일들에 취해서 ‘열심히’ 사는 것은.. ‘멸망의 징조’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4복’이 아니라 ‘4화’이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영원토록 소유하지 못할 것들을 버리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짐 엘리엇
우리가 목숨을 걸고, 그것을 얻지 못해 밤잠을 못자고 몸부림치는 것들은
사실은 ‘영원히 소유하지 못할 것들’이다.
그렇게 몸부림치는 동안에 우리는
실제로 영원에 속한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다.
▲제자들에게 처음부터 가르치신 이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듣기에 너무 무겁다. 또한 상당히 부담을 주는 말씀들이다.
그래서 요6장에 보면, ‘생명의 떡’에 관한 말씀을 듣자,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다.
그런데 이 부담스러운 말씀들을, 나중에 가서 가르치시지 않고
제자들을 불러 놓고, 아예 처음부터 가르치셨다.
마5장, 눅6장은.. 공생애 초기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초신자들에게
이 엄청나게 부담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첫 인상/첫 단추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처음 입문하는 사람에게, 성경이 요구하는 바를 그대로 가르치면
그 사람은 남은 생애 일평생... 신앙생활이 아예 그런 줄 알고 산다.
굉장히 강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오리 같은 동물은
알에서 부화되어 처음 본 존재를 ‘자기 엄마’로 여기고 살아간다고 한다.
첫 인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4복 4화’를 배운 제자들은
아예 초신자 때부터 ‘십자가를 지고 핍박 받을 각오로 나를 따르라’를 배운 사람들은
그 교훈들이 자기 일생일대의 ‘신앙생활의 거울’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오용/남용되어, 성도들에게 율법적 규율로
자기도 지기 힘든 무거운 멍에를 더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저는 사역중독자가 아니다.
성도들이 날마다 교회에 나와서 ‘사역, 사역’ 부르짖기를 원치 않는다.
다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때문에 기쁜 그 기쁨이 흘러 넘쳐서
저절로 사역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 아이들이 아토피로 고생이 심하다고 한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왜 요즘 어린아이들이 그런 피부병으로 고생하는가?
누가 이런 관측을 내 놓았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본다.
요즘 아이들은, 거의 무균실과 같은 환경에서 자란다는 것이다.
너무 깨끗하고 병균 없는 것만 먹고, 입고, 덮고 하다가 보니까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현저히 감소된 것이다.
외부의 공격력이 적으니까, 내부의 방어력(면역)도 그만큼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조그만 병균이 공격해도, 질병에 쉽게 걸린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토피’다.
지금 21세기에도 동남아 시골이나 아프리카에서 크는 아이들은
빵이 땅바닥에 떨어지면, 주워서 흙을 툴툴 털어내고, 금방 입에 넣어서 먹는다.
한국 사람들이 보면 경악할 일이고, 그 흙 역시 그리 깨끗한 흙도 아닌데도
아이들은 전혀 병에 걸리지 않는다.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어릴 적부터 길러졌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마시는 물은, 더 오염된 물이다.
한국 사람들이 마시면, 금방 배탈 나고, 아니 도저히 입에 댈 수 없는 구정물이다.
그런데도 현지인들은 잘 마신다. 마셔도 아무 탈도 나지 않는다.
적응력과 면역성이 생긴 것이다.
이런 예를 든 이유는,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이 ‘마치 무균실과 같은 환경 속에서 자라서’
모두가 허약체질이 되어버렸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4복 4화’같은 말씀은... 까마득하게 먼 옛날 얘기로 들린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예 시작 초기부터, 제자들이 초신자일 때부터
강한 말씀으로, 강력하게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처음부터 강한 체질로 성장하기 원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에도, 8살쯤 되면 여자 애들은 집에서 밥 짓기 시작하고
애가 애를 자기 등에 업고 키웠다.
그렇게 고생하며 강하게 자란 것이.. 나중에 크면 다 도움이 된다.
▲진실로 예수 믿는 성도의 특징은.. ‘자기 자신과 만나 본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다.
‘나는 이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어!’ (죄인 중 괴수야)
‘예수님을 따라서 진실 되게 사는 길은.. 쉽지 않아. 날마다 애써야 해!’
그런데 평생 교회 다니면서도
이런 말을, 임종 직전에야 비로소 하고서.. 세상 떠나는 분들이 많다.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교회를 다녔다 하면서도
일생에 한 번도 이런 말 하지 않고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과 한 번도 대면하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난다.
이것은 ‘그가 아직 예수님을 못 만났다’는 증거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진실로 만나게 된다.
자기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되고,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그런데 이런 자기 자신과의 깊은 만남은
내가 행복해하고, 승승장구할 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괴롭고, 힘들고, 어려울 때... 자기의 실상을 비로소 들여다보게 된다.
‘4복 4화’의 말씀이 진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난, 굶주림, 슬픔, 핍박이 ‘4복’인 것은.. 바로 이때 자기 자신을 대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내가 누구인지 진실로 깨닫고 절망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다.
부자, 웃는 것, 배부른 것, 칭찬이 ‘4화’인 이유는.. 이런 순간에는
자기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진정한 자기 내면과 대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칭찬 받을 때는.. 자기의 진정한 내면과 대면하지 못한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6:20~22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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