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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빠진 말씀의 역사, 성령의 역사

LNCK 2009. 6. 8. 17:07

 

십자가가 빠진 말씀의 역사 성령의 역사의 위험성 - YouTube

◈십자가가 빠진 말씀의 역사, 성령의 역사의 위험성    갈3:1~6    2009.05.23.설교녹취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1~3

 

 

◑1. ‘십자가’가 빠진 성령의 역사.. 는 위험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아야 한다.  갈3:1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게 되기를’

기도드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꾀임을 받게 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를 구한다.

십자가의 보혈의 피가 역사하는 곳에는.. 자연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함 받고,

그 십자가에서 정사와 권세(마귀)를 드러내시고 승리하신 결과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가 결과적으로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 ‘십자가는 밝히 보이지 않고’,

그것을 생략한 채로

‘성령의 역사’만을 목표로 애쓰는 사람들이 과거에 꽤 있었다.  

십자가를 간과하고, ‘오직 성령을 주시옵소서’만을 부르짖고 구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공로가 밝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성령을 쫓아가는 것은

미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십자가의 은혜,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지,

십자가의 역사를 생략하고.. ‘성령’ 자체를 부르짖는 것은.. 잘못되기 쉽다.

 

‘성령’으로 시작하지만,

입술로만 늘 ‘성령, 성령’만 언급하다가는, 

‘육체’로 마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십자가의 은혜/깊은 묵상/깊은 믿음이란 중간과정이 빠질 때.. 그렇게 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으로 몰려간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 복음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

오직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운운하는 것은.. 실상은 미혹된 결과가 일어나기 쉽다.

 

가만히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기 목적과 뜻,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을 추구하고,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이렇게 잘못된 성령사역을 두고서.. '성령을 (내 마음대로) 부린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여러분, ‘이런 미혹의 역사’가 분별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미혹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2. ‘십자가’가 빠진 말씀의 역사도 ... 위험하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가 밝히 보이지 않고,

십자가에 대한 감격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말씀의 비밀(신비하게 푸는 것)들...

결국은 다 율법주의로 결론 나게 되어 있다.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라서 한 번, 두 번 강조하다 보면

점점 그 중요한 말씀이 ‘명령’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은 본의 아니게 ‘율법주의’(명령)로 마치게 된다.

 

십자가 복음이 빠진/약화된/덜 강조된

어떤 말씀 운동도...

결국은 ‘인간의 교훈’이 되어버리고, ‘율법주의’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에 말씀(구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말씀은.. 교훈이고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이 빠지거나 생략된 말씀이나 교훈은,

그것이 아무리 한 때는 유익한 것이더라도... 결국은 ‘율법주의’로 귀결되게 되어 있다.

 

▲세상적인 축복도 필요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에서 멀리 떨어진 ‘세상적 축복’의 강조는

역시 복음을 변질시킨다.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기쁨보다

더 큰 세상의 물질의 복, 명예의 복...  이런 것은 없다.

 

(백 번 양보해서 그 축복들이 주님이 주신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축복들이 강조되고, 십자가의 은혜와 감격이 만약에 시들해 진다면...

십자가 복음에서 이탈된 것이다.

 

오늘날 만약 사도바울이 되살아 난다면,

마치 그가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은 바울사도로부터 강력하게 책망을 받을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붙들지 못하고, ‘축복의 복음’을 붙들고 있다고.. 말이다.

 

          “너희 눈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밝히 보이거든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3:1  ... 사도바울의 책망의 말

 

▲십자가의 감격으로부터 멀어질 때

사탄을 이길 자가,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외관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속으로.. 점점 썩어 들어가게 되어있다.

복음은.. 점점 변질되게 되어 있다.

 

(사실 십자가 복음이 뭔지를.. 그 일부분만 깨닫고,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성도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면서,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깨닫게 되기를 기도로 구해야 한다.)

 

여러분, 간혹 물컹하게 진무른 배나 귤 등 과일을 보신 적이 있는가?

냉장고에 오래 보관해 두었다가, 어느 날 먹으려고 꺼내 보니

과육이 심하게 문드러져 있다.

 

오늘날 ‘진정한 십자가 복음’으로부터 떠난 성도의 영적 상태가

바로 그런 비참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심하게 책망했던 것이다.

 

▲나 자신이 괴로운 것은, 나에게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사라졌을 때

나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다.

내 육신도 이길 수가 없다.

 

공동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들이 파괴되고

율법만이 난무하게 된다.

 

‘주여, 십자가의 감격을 제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천사들이 찬양한 초점은 ... 십자가의 그리스도

여러분, 계시록에 보면

천사들이 예수님을 계속 찬양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다.

천사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는 말

아무리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

아무리 깊고 오묘하게 말씀을 풀어내는 설교가 있더라도

그 어느 것도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견주지 못한다.

 

유사한 것도 없다. 없어야 한다.

다만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에게 언제나

듣고 믿기만 하면.. 그 결과로 성령이 자연스럽게 역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열매와 결과들이 우리 삶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즉 ‘성령의 나타남과 성령의 능력들’이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실제 사례

어떤 공직자 장로님이, 자기가 아는 지인 중에

평생 불교를 믿고 살았던 분을.. 전도했다.

 

한 달 뒤에 교회에 나오는 것을 기대하며

매일, 그 불교도 지인에게 적합한 성경말씀을 골라서

문자메시지로 계속 보냈다.

(물론 다른 전도대상자들에게도,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드디어 한 달 뒤에, 그 지인(아는 사람) 부부가 교회당에 오기는 왔는데,

교회당 문 앞에까지 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뒤늦게 교회 문 앞으로 달려 나온 장로님은, 떠나는 그 지인 내외분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구령의 열정에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장로님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교회 왔다가 떠나던 그 내외분이, 자동차의 백미러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 장로님을 ‘구원’해주기 위해서, 차를 다시 돌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불자 내외분이,

눈물 흘리고 비틀거리는 그 장로님을 양쪽에서 부축해서

교회당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 이 부부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한다.

일평생 철저한 불교 신자로 사신 분들이, 그 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한다.

 

그 부부가 그날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들어오지 않은 것은

심하게 다투어서, 부부가 이혼하려고 그날 가정법원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부부가, 이혼하려던 생각을 취소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공직자 장로님은, 성령을 목표로 먼저 추구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먼저 사모하였고,   

그 때 성령의 역사로 구령의 열정과 눈물이 동반되었던 것이다.

 

‘회심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성령의 역사’는...

만약 그런 현상이 오래 계속되면.. 자체적으로 이상해지기 쉽다.

 

.............................................. 여기까지 녹음 .......................................

 

▲관련글 :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복음   (갈3:14절 중심으로)

갈라디아서에서 ‘왜 믿음이냐, 왜 율법의 행위로는 안 되냐?’의 문제를 다룬다.

바울은 그 답을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이, 믿음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행위는 우리에게 성령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목적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주신 것도

왜 그랬느냐 하면 -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하시려고... 그러셨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야, 마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내적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전히 지키고 순종해야 ... 의롭게 되고/구원받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3:14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길은, 성령의 길인데(성령을 통해 순종의 삶을 삶),

그 성령은 할례를 받는 등, 율법의 준수를 통해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내가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