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주의와 은사주의의 균형 막16:17~20 09.06.07.설교녹취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끝이 약간씩 다르다.
①마태복음 28:19~20절은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서 제자 삼으라>로 끝난다.
그러니까 <말씀>을 강조하며 끝을 맺으며, 말씀은... 장로교에서 좋아한다.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를.. 마태복음의 결론처럼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②마가복음16:17~20절은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로 끝난다.
그러니까 <은사>를 강조하면서 끝을 맺으며, 은사는... 오순절교회에서 좋아한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끝은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을 말하며, 독을 마셔도 해 받지 않고, 병든 자를 고치는 등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과 ‘승천 직전 관점’이 180도로 다르다.
③누가복음의 마지막은 찬송으로 끝난다.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누가복음의 시작도 예수님이 태어날 때 <천사들이 찬송>한 것을 기록한다.
그리고 마지막도 <찬송>으로 마친다.
그러니까 찬양/송축/축복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가복음에 은혜 받는다.
저는 젊은 시절에, 왜 4복음서가 비슷한 내용을 4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했는지,
그냥 복음서 1권으로 우리에게 전수해 주었으면 훨씬 더 편할 터인데...
‘이러니까 교단이 갈라지는 거야! 4명의 저자가 미리 모여서 상의한 다음에
통합 복음서 한 권만 썼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틀린 생각이라는 것을.. 곧장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은 놀라는 것이,
예수님의 행적을 4복음서의 저자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로 각각 저술함으로써
오늘날 우리는 그 행적을 보다 더 자세하고 다양하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도 약간씩 ‘마지막 결론의 관점이 다르다’고 볼 수도 있다.
다 같은 ‘대위임령’이라도 강조점이 다른 것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자면
오늘날 우리가, 마태와 마가(복음을 의미) 둘 중 하나에 치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
①<말씀/성경공부>를 유난히 강조하는 사람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이런 말씀을 강조하다 보니,
그것만 전부인줄 알고, 방언과 예언 등 <은사>를 고의적으로 무시할 수 있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많다)
‘방언을 한다고 자기 삶이 달라지나?’
‘예언을 해도, 이상한 예언이 많던데...’
‘그래서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야!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②반대로 <성령/은사>를 유난히 강조하는 사람은..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혀 죽이지도 못하면서
오직 성령의 능력/방언/신유/예언 등
십자가를 도외시하고, 외적 은사 쪽으로만 치우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공부를 하면 뭐하나? 능력이 없는데...’
‘저러다가 사람들이, 배운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치는, 바리새인이 되는 거야...’
그런데 자아가 처리되지 않은 채, 성령의 은사에만 몰두하다보면
방언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교만해 지는 사람들이 있다.
예언을 하면 할수록..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예언하려다 보니.. 이상해진다.
병을 고치면 고칠수록.. 교만해진다.
날마다 바라보아야할 십자가를 점프하고, 은사에만 매달릴 때.. 그렇다.
▲내가 받은 은혜가... 전부가 아니다.
여러분, 마태복음에만 은혜 받지 마시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에 은혜 받으시기 바란다.
우리는 4복음서를 두루두루 다 보지만, 그 중에서 자기 ‘선호복음’이 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좋아하는 이들은 - 마태복음(의 종결부분)
은사를 좋아하는 이들은 - 마가복음(상동)
찬양을 좋아하는 이들은 - 누가복음(상동)
이렇게 자기가 선호하는 부분이 없을 수 없지만,
다른 부분도 다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래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데,
자기가 선호하는 부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다른 부분을 배척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를 못 받았을 때, 그렇게 한다.
▲내가 <체험/경험>한 것도... 전부가 아니다.
①자기가 한때 불치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나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신유의 복음>에 치우칠 수 있다.
자기 체험에는 <신유>만큼 중요한 것이 세상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다른 부분에 대해, 검은색 안경을 끼고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②자기가 큐티하고, 말씀을 묵상하다가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 체험에 따라서 <오직 말씀>만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은사도 하나님이 필요해서 주신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잘못된 것을 주신 것처럼.. ‘그런 것은 필요 없어!’ 하는 태도는
대단히 극단적인 신앙이 되고 만다.
③어떤 분은, 교회를 개척하고, 늘 교회개척하고 건축한 말씀만 하신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자기가 체험한 것을, 사람은 주로 말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신앙에 균형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말씀/은사/체험적 신앙 ... 이런 모든 분야에 두루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④어떤 분들은 설교시간에는 주무신다.
그런데 교회를 처음 오셨는데도, ‘이웃돕기 바자회’ 같은 거 하면
무슨 교회 중직자처럼 활동적으로 뛰어다니는 분도 있다.
평소에는 헌금도 거의 안 하시던 분이, 바자회 하면, 많은 물품을 내기도 하신다.
이런 스타일은 ‘행함으로 은혜 받는’ 스타일이다. ‘말씀’이나 ‘은사’보다...
또한 평소에는 교회도 잘 안 오시던 분이
소풍 갈 때면, 오셔서, 재직처럼 활동적으로 봉사하시는 분이 계신다. (미국 한인교회)
마찬가지로 설교시간에는 꼬박꼬박 졸다가도
찬양시간이 되면.. 눈물을 쏟으면서 발을 구르시는 분도 있다.
⑤또한 마가복음에는 <행하며 움직인다>는 말이 4복음서중에 제일 많이 나온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등이다. 막16:20
나가서 사방에 다니며 활동적인 사람,
두루 돌아다니며 복음 전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마가복음에서 은혜를 제일 많이 받을 것이다.
이런 다양한 방면에서 은혜 받는 스타일이 있는데, 각각 다른데,
‘저 사람은 말씀도 없이 뛰어만 다닌다’고 비평하지 마시기 바란다.
십자가에서 자기 자아가 처리되지(죽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은혜만 최고인 줄 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진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제일 먼저 겸손해진다. 자아가 죽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은사가 놀라운데, 자아가 죽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언으로, 방언으로, 통변으로 ... 놀랍게 성도들을 도우고, 예수 안에 세워주는데,
조금 지나보면 스스로 교만에 빠져서...
은사가 강하면, 당연히 교만해지기 쉽다. 능력 없는 사람과 금방 차이가 나니까!
그렇게 교만에 빠지면 우리는 헷갈리게 된다.
‘어느 게 하나님께 받은 예언이고, 어느 게 저 분 스스로 말씀인지...’ 구분이 안 된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음성’과 ‘자아가 말하는 음성’이 섞여서 나오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자아=육체로 마치게 된다.
이런 현상을 목격한 ‘말씀 주의자’들은
‘은사 주의자’를 혹평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은사 자체’를 혹평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말씀에 강하고 은사에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며
‘은사를 사모해야 될 사람’이
오히려 ‘은사를 혹평’하는 것은.. 예를 들면 ‘방언, 아무 소용없어!’
마귀에게 미혹되는 것이다.
말씀주의자든지/은사주의자든지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부인의) 십자가가 빠진 신앙은.. 즉, 자아가 죽지 않은 신앙은..
아무리 그것이 좋은 것이라도.. 결국은 육체로 마치게 된다.
여러분, 말씀도 마찬가지다.
말씀으로 은혜를 끼친다는 분들도, 자아가 죽지 않으면
자기 생각을 전하면서, 성경구절을 빌려서 전하는 것을 본다.
‘저 분이 말씀을 전하는 건지, 자기 생각을 전하는 건지..’
그래서 듣는 우리가 헷갈리게 된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노라 고전14:5
이전에, 나는 이 말씀을
바울 사도가, 문제 많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으로만 들었다.
그런데 언젠가 내 눈이 열리면서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린도 교인들이 아니라) 나에게/우리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듣게 되었다.
‘은사’는 ‘선물’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에게 ‘선물’을 주시려는데,
왜 우리들은 자꾸 무슨 탓을 하면서, 고의적으로 선물을 거부하는가?
- 이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자기가 회개하고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려고 해야지,
선물 받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입장에 서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혹시 거품 물고, 괴성 지른다고 ... 이상하게 느껴지시는가?
여러분, 진짜 성령의 역사에 의한 거품과 괴성은.. 이상한 게 아니라, 신비하게 느껴진다.
자기 혈기로 괴성을 지르면.. 듣기가 싫지만
성령의 은사로 괴성을 지르면.. 그 앞에 오히려 엎드리게 된다.
내가 분변을 잘 해야지.. 모든 은사를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은.. 내가 잘못된 것이다.
▲마치는 말
①치우치지 맙시다.
말씀과 은사 -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
다른 쪽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결국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특별히 말씀을 강조하는 말씀주의자들 중에서
은사주의를 무조건 비난하고, 그것이 오늘날 필요 없고, ‘오직 말씀!’만 외치는 것은
역시 성경의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 되고 만다.
(저희 교회는 장로교회라서 지금까지 말씀만 강조하고,
성령의 은사에 대해 무시해 온 경향이 있었다.
이제는 양쪽에 균형을 맞추어 가려고 한다.
아직 우리가 잘 모르고, 깊이 체험하지 못한 것은.. 점점 배워나가려고 한다.
이것은 말씀을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②먼저 (십자가 복음으로) 내 자아가 처리되어야 합니다.
말씀주의든지
은사주의든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주의를 통해 내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깊은 말씀을 전해도, 내 자아가 처리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게 되며...
아무리 깊은 은사를 나타내는 능력의 사람이라도, 내 자아가 처리되지 않으면,
결국 성령의 은사를 나타낸다고 하면서도.. ‘거짓 은사’로 변질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후략)
<주> '말씀'과 '은사'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이 가야 정상적입니다.말씀이 참되게 전파되는 곳에.. 은사가 '따르는 표적'으로 나타나며참된 은사가 나타났다는 것은.. 먼저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을 떠난 은사'는 거짓된 은사로 발전하게 되며,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은사를 떠난 말씀'도 당연히 능력 없는 '인간의 말'에 불과하게 됩니다.매번 말씀마다 은사와 능력이 나타난다는 뜻은 아니지만, 간헐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내가 제어 못함)그런데 매번 말씀을 전해도, 3년~5년이 지나도 아무 '따르는 표적'이 없다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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