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에 편지할 때 바울의 신앙 빌3:7~14 09.05.18.설교녹취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빌립보서를 쓴 시점은,
그가 다메섹에서 회심한지 약30년 조금 못 된 시점이며,
그가 순교하기 약 5년 전쯤 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성숙 단계에 이른 시점으로 보면 된다.
그의 편지 빌립보서를 보면, 당시 그의 신앙을 엿보게 된다.
◑돈이 귀중한 도시 빌립보에, 그리스도가 귀중하다고 말하다
▲빌립보란 도시는
행16장에 나온 대로, 마게도냐의 가장 큰 성이었다.
(빌립보는, 에베소, 고린도와 더불어 당시 지중해 권에 3대도시로 꼽히고 있었다.)
오늘날 서울의 분당처럼, 새롭게 지어진 신흥도시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비즈니스가 흥행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번영하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사도바울은 행16장에서, 빌립보에서 제일 처음으로
자주옷감장사 루디아를 전도한다.
루디아도 소아시아에서 빌립보에 와서 무역을 할 만큼, 그 도시는 무역이 번성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은 거기서 점치는 귀신을 쫓아낸다.
그런데 그 점치는 일로 돈을 벌던 사람들은, 자기들 사업에 큰 지장을 받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잡아서 시장의 관원들에게 끌고가서 고발한다. 행16:19
다시 말해서 빌립보라는 도시는
<상업, 이득, 성공> 이런 단어를 지향하는 도시였다.
점치는 사업도 성행할 만큼,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하는 물질적 도시였다.
▲그런 성공주의가 팽배한 도시(빌립보)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편지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서 ‘얻고’는, ‘돈을 얻다/벌다’ 말할 때 쓰이는 동사이다.
바울은 마치 돈을 얻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이 단어를 신약에서 여기에 딱 한 번만 썼다.
빌립보란 도시가 상업과 이윤추구에 능한 도시니까, 그들이 통용하는 단어를 썼던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를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아는 사도바울이,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원한다고 말한다.
여러분, 우리가 그동안 주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주님을 평생에 더욱 ‘얻어’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세계에서 성공과 번영을 뿜어내고 있는 뉴욕 땅,
(설교자는 빌립보를 생각할 때, 뉴욕을 연상함)
이곳에서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우리들 되시기 바란다.
사도바울이 다메섹과 다른 도시에서,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전하던 분이었다.
그런데 빌립보 도시의 교인들에게
이곳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를 얻고, 자기가 발견되기 원한다고 했다.
믿음의 고수가, 마치 초신자처럼 '그리스도를 얻고/알고/체험하기 원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 뉴욕(뉴저지)에서, 그리스도를 얻게 되는 우리들 되기 바란다.
기독교 신앙은 평생 '이루어가고, 붙잡으려고 쫓아가는 것'이지,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메섹 체험 후 30년 동안이나 성실히 예수를 믿고/배우고/알아 온 사도바울이
'나는 그리스도를 더 알고/얻기 원한다'라고 겸손히 증거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스도를 얻는 데 방해되는 것은 모조리 배설물로 여긴다고 한다.
여러분, 축복, 물질, 은사 그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를 아는 데 방해가 된다면..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
▲가장 귀한 지식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빌3:7~8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어떤 것이 있었는데,
만약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체험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자신에게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사도바울은, 자기 삶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귀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그리스도를 체험한다/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으심, 부활 등 모든 지식을 포함하지만
그 중에 가장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십자가이다.
▲그리스도를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이.. 더 알고자 했다.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많이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는 일생에 그리스도를 사방에 소개하고 다녔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에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 그것이 가장 귀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3:8~9
아니, ‘그리스도를 얻다니’ ... ?
사도바울만큼 그리스도를 많이 알고/소유한 사람이 또 누가 있는가?
그런데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기를,
자신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고/얻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십자가 vs 축복, 은사, 성경지식
▲‘믿음으로 난 의’의 결국은 ‘십자가’로 가야한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에서 교리를 말했듯이 빌립보서에서도 간단히 언급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써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3:9
그런데 이 '믿음으로써 얻은 의'는 결국 십자가로 가야 함을 역설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3:10~11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난 의>를 주장하면서
그 의로 인하여
주님의 부활의 권능과 그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함을 알고자 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을 본받아..’ 그렇게 사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고 했다. 빌3:10
여러분 2천년 교회사에
2천년동안 모든 시대의 교회들은
부유해지고, 힘을 얻었을 때.. 타락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셨을 텐데,
그러나 십자가에 대한 감격보다 더한 감격은 - 존재하면 안 된다.
이 세상에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십자가의 완성된 사역보다 더한 성령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는 계속해서 이루어져 갈 뿐이지
완성되어진 사역은 아니다.
사탄이 두려워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정사와 권세를 밝히 드러내어 멸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사역을.. 사탄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성령의 역사로 부흥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하늘의 천사가 찬양하는 것은
일찍 죽임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다.
▲축복도 독이 될 수 있다. 십자가 신앙을 잊어버리면
구약에 보면, 여수룬이 살찌매 나를 발로 찼도다 라고 했다.
너희가 살찌면 나를 버릴 것이라는 예언이다.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 신앙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①세상적 축복을 누릴지라도, 그 축복은 좋은 것이지만,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과 생활태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다.
어떤 놀라운 ②성령의 역사(은사)가 일어나더라도
십자가에서 자아가 함께 죽는 신앙을 잊어버리면,
그 성령의 역사는 (세상적 축복처럼) 좋은 것이지만,
점점 미혹되어져 가고, 더 심하면 마귀의 역사(은사)로 바뀔 수도 있다.
‘세상적 축복’과 ‘성령의 역사’를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되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내 자아가 죽는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히려 그 좋은 것이 우리를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축복이건, 성령이건 좋은 것이지만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한 것처럼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고, 그리스도를 매일 매일 체험하는 신앙이
먼저 기본바탕이 되지 않으면,
심지어는 ③말씀을 심오하게 깨달아서 잘 가르친다 하더라도
신앙의 근본 바탕이 흔들리게 된다.
높이 세우면 세울수록, 더 위태하게 된다. 기초(십자가 신앙)가 흔들거리니까!
그게 뭐든지, 그리스도를 알고/얻는데 방해가 된다면
우리도 축복/은사/지식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길 수 있게 되시기 바란다.
그만큼 그리스도(십자가)를 알고/체험하는 것이.. 일생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탄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오직 예수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타나는 ‘축복의 역사’는 ... 온전히 주님 사역을 위한 도구가 되며
그럴 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는 ... 오직 주께만 영광 돌리며, 곁길로 가지 않고
그럴 때 나타나는 ‘말씀의 역사’는 ... 진정한 복음의 역사가 나타난다.
십자가 신앙이 ...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3:10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3:11
라고 한 것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십자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7~8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날마다 자신의 죄를 더욱 깊이 회개하는 신앙도 거기에 일부 포함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3:11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사도 바울이 성령의 능력이 부족했고, 지식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아직 온전히 다 알지 못했고, 다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2
그림으로 설명하면, 예수님은 앞서 가시고, 바울은 잡으려고 쫓아가는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과거>의 체험, 과거의 은혜에 사로잡혀서
<오늘>에도 .. 과거의 자기 체험, 과거의 자기 업적만 주로 말한다.
여러분, 바울처럼,
<과거>에 받은 은혜는 이제 내려놓고
<오늘> 새로운 은혜를 받기 위해, 달려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란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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