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9

은혜를 모르는 자라도 사랑하라 1971

LNCK 2009. 7. 6. 11:24
 

◈은혜를 모르는 자라도 사랑하라                         눅6:27~28                     09.06.07.설교일부녹취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6:27~28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에 부담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사랑하라’는 말 때문에 그렇다.

원수를 웬만큼 참아주고, 용납해주는 것까지는 그래도 순종할 수 있겠는데,

적극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내게 무리한 요구로 느껴진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오붓하고 따뜻한 마음 정도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선혈이 낭자한 피가 있어야 가능하다.

나의 깊은 상처, 아픔, 고통, 눈물이 있어야.. 비로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저 그렇게 이웃/원수를 사랑할 때는.. 별 고통/상처가 없지만

우리가 진짜 따뜻하게 이웃/원수를 사랑할 때는.. 심한 고통/상처를 내가 통과한 이후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쉽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밤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면서

고민과 갈등을 통과하고, 기도하면서, 자기 마음속에서 미움을 이긴 가운데서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미움과 갈등을 회개한 가운데서

비로소 생기는 ‘원수 사랑’이다.

결코 쉽게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랑하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다.. 라고 말하는 이유는,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어떤 의지적 결단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시부모가 자기 며느리를 사랑하는 데는.. 강한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관계는 자연적인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서로 핏줄이 아니니까..

그런 가운데서 며느리/시모를 사랑하려면.. 강력한 의지적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상처와 눈물 없이는.. ‘원수 사랑’이 안 된다.

‘너희가 상처 없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눈물 흘리는 밤이 없이, 원수를 축복할 수 있겠느냐?’


'네 가슴에 멍 자국이 없이, 너를 저주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겠느냐?'

'가슴을 치는 통곡이 없이, 너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는,

<눈물과 상처를 극복하는 사랑>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이다.


◑뺨을 맞고도 의연하신 예수님


▲한쪽 뺨을 맞고서, 따지신 예수님

예수님은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는데,

대제사장 안나스 앞에서, 예수님은 그의 부하에게 뺨을 맞으셨다. 요18:22

그 때 예수님은 물끄러미, 다른 쪽 뺨을 돌려대지 않으셨다.


이 때 예수님은 내가 옳은 말을 했는데, 어찌하여 네가 나를 치느냐고 하셨다. 요18:23

예수님은 따지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앞서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고 가르치시고는,

정작 자신이 뺨을 맞았을 적에는, 다짜고짜 따지신 것일까?


이 대목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①우리가 옳은 일을 행하고, 옳은 말을 할 때에.. 뺨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뺨을 맞았다고 해서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데, 이게 어디서 내게 덤벼들어?’ 하면서

예수님은 거칠게 덤벼들지 않으셨다.

그렇다 거칠게 덤벼들면 안 된다. 아무리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더라도...


②반대로 (한 대 맞았다고 옳은 일을 하다가) 무작정 물러서지도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제사장의 부하에게 뺨을 한 대 맞으셨다. (요18:22절 상황에서)

그 때 꼬리를 내리고.. 조용히 물러가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옳은 말을 했는데, 어찌하여 네가 나를 치느냐고 하신 것은 요18:23

   적극적으로 싸우고 대항하라는 것도 아니요,

   무조건 피하고 도망가라는 뜻도 아니다.

   비겁하지 않으면서도, 의연하게 대처하신 것이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셨다.)

뺨을 맞으면서도 계속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셨다.

다른 뺨을 맞을 수 있는 자리에 계속 머물러 계셨던 것이다.(실제로 또 맞으셨다)


▲저와 여러분은, 주의 일을 행하다가 뺨을 한 대 맞았을 때

다른 뺨을 맞을 수 있는데도,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으시겠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그 뜻을 이루는 일 말고는,

다 양보할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양쪽 뺨까지도 내어줄 각오!

자기 사명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내어줄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왜 두렵고 머리가 복잡한가?

내 마음속에 ‘다 빼앗기더라도 이것만큼은 절대 안 돼!’ 라고 생각할때 그렇다.

그게 명예이든지, 자존심이든지.. ‘이것은 절대 못 내 줘!’ 하니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이러니까 다른 쪽 뺨을 못 대주고, 내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것이다.


여러분, 다른 쪽 뺨을 내어준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 외에는.. 다 내어주겠다고 각오하는.. 그런 뜻이 된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그 뜻’을 이루는 일 외에는.. 다 양보하고 지겠다는..

그런 뜻이 된다.


수치심, 명예심, 자존심 이런 것들을.., 내가 다 버릴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두고서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눅6:35

 

▲‘내게 볼 때, 저 사람은 절대로 변할 인간이 아니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저 인간은 너무 배은망덕해, 아무리 잘 해 줘봐야 은혜를 모를 인간이야!’

나는 이렇게 말하는데,

그러나 내 어머니나 누이들은 계속 그에게 잘 대해 준다.

 

그러면 나는 더욱 화가 난다.

‘그렇게 잘 해 줄 필요 없어요, 저 인간은 절대 변할 인간이 아닙니다!

괜히 나중에 배신당하지 말고, 지금 이 정도에서 끊으세요!’ 라고 말한다.

- 이렇게 말하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눅6:35

여러분, 우리는 배은망덕한 자에게, 우리가 상식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은

그를 따돌리거나, 내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당장 순간은 고소한 것 같다.


그가 소외되고, 겉돌고, 혼자 배회하는 것을 보면.. 순간은 속이 후련하다.

그런데 내가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수 닮은 사람으로 무릎을 꿇을 때

내 양심이 비수같이 날카롭게 내 마음을 찌른다.

‘너는 어찌하여 그를 내팽개쳐놓고, 지금 내 앞에서 떳떳하게 기도하고 있느냐?’

그 아픔, 그 신앙양심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괴로워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망설이는 것은 ‘그가 은혜를 전혀 모르는 자’이기 때문이다.

‘거봐요,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하나님,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끌어안고 사랑해줘 봤자, 아무 소용없고, 도리어 화만 당한다니까요?’

우리는 종종 이렇게 하나님께 항변한다.


여러분,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시다. 눅6:35

‘그는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라고 항변해서는 안 된다.

 

그를 볼 때, 그를 통해, 도리어 자기 자신을 보면 된다.

‘내가 얼마나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 했었는지...’

그것을 깨닫고 회개하라고,

하나님은 내게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자’를 붙여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안 변할까봐, 안 사랑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가 안 변할게 뻔하니까.. 그에게 사랑 베푸는 일을 취소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가 변하든지/ 안 변하든지..’

‘그가 은혜를 갚든지/ 배은망덕하든지..’

우리는 그것을 고려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는 그런 결과에 관계없이, 무조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하는 존재일 뿐이다.


내가 순종했을 때, 나타날 결과를 예측하면서.. 내가 가려서 순종하고,

내가 말씀에 순종했을 때, 전혀 아무 결과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그래서 ‘은혜를 아는 자’만 가려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교만이 된다.

그를 바꾸시든지/ 안 바꾸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내가 할 일은, 오직 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19~21

  

여러분,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내가 계속 선을 행했더니, 저가 악을 멈추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라고 기대한다.

‘내가 선을 계속 행하면, 저가 악을 그치게 될 것을, 그래서 선으로 악을 이길 것을..’


그러나 악이 결국 죽을 것을 예상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주의 뜻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승부는, 내가 선을 행함으로써 악한 자가 꺾이고, 무너지는 시점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그 악인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참고 선을 행한 자의 승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악인에 대해 용서하고 계속 선을 행하는 그 시점에

이미 영적인 승리가 내게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원수가 패배하고, 대적들이 무너지고

다 망해서 내 앞에서 물러가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아니다.


원수들은 계속 나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있고,

나는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내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승리하는 순간인 것이다. 스데반이 그랬다.


▲마치는 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님은 어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결단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원수를 사랑할 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된다.

또한 역으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면.. 어떤 원수라도 사랑하게 된다.


배은망덕한 자가 전혀 변화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믿음의 승리는.. 내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지,

내 원수가 회개하고, 변화되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주기도문을 바꾸어서 기록한 어떤 글을 소개해 드리면,

당신이 다만 땅에 있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 이라고 말하지 마시라.

당신이 오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의 아버지가 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시라.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와 물질적인 성공을 혼동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지 마시라.


예수님의 주기도문 안에도,

눈물이 없이는, 억울함을 품고 가는 상처와 아픔이 없이는

절대로 그 기도대로 행할 수 없는.. 어떤 눈물과 멍 자국이 있다는 것이다.                    ▣ 크리스천 인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