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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기준이 너무 낮아져 있다 2258

LNCK 2010. 1. 12. 13:16

◈구원의 기준이 너무 낮아져 있다              갈1:8                 09.01.04.인터넷설교녹취



◑구원자 예수 or 해결사 예수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요셉이, 자기와 정혼定婚한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조용히 파혼코자 했을 때,

천사가 나타나.. 태어날 아기 이름을 ‘예수’라고 정해 주며,

그 이름의 뜻은, 저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니라고 가르쳐 준다. 마1:21


다시 말해서, 천사가 가르쳐준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자’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리고 유대는, 로마제국의 최전방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대로부터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세력이

육로로 통해 로마로 진격하는 것을 차단할 최전방이 ‘유대 땅’이었다.


또한 유대가 속한 ‘근동 지역’은, 동방의 파르티아 제국(중앙아시아 서쪽)

의 공격을 막아 줄 최전방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연천, 동두천 같은 경기 북부에 해당한다.

그래서 A.D.70년 경,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그 이듬해 로마황제로 등극할 정도로,

유대는, 로마제국 내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인정받았던 땅이었다. 


그런데 당시 유대백성이 얼마나 어려웠는가 하면,

총 소출의 40%를 로마제국이 세금으로 걷어갔다.

원래 소출을 유대가 다 사용해도, 풍족치 못한 상황에서,

거기서 40% 가량을 세금으로 바쳤으니.. 사람들의 피폐한 상황은 극에 달했다.

(이것은 세속 역사가들의 로마제국 연구에 의해 밝혀진 자료이다.)

결국 시민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면, 노예로 팔려 나가게 되었다.

2009년도 1월, 현재 미국 경제상황은 (서브프라임 사태의 여파로) 매우 어렵다.

그러나 2천 년 전, 유대 상황과 비교하면, 여기는 그래도 천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적으로 유대인들이 꿈꾸었던 것은, 유대의 독립이었다.

유대에 ‘메시아 다윗 왕국’이 회복되는 것이었다.


유대는 5백 년 전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이제는 다윗왕국을 회복하는가 했더니..

(다니엘의 예언대로) 바벨론이 망하자, 메데와 페르시아 제국을 거쳐서,

철과 같이 아주 강력한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산 넘어 산’이었던 것이다. 유대는 도저히 소망이 없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 때부터 5백년을 간절히 기다려서, 드디어 메시아가 오셨다는데,

<당장 살아갈 현실적 문제>가 아니라 <저희를 자기 죄에서 구원>해 준다고 하신다. 마1:21


그런데 오늘날의 전도지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구원자’보다는, ‘해결사’ 이미지로 보인다.

예수를 믿으면, 각종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해결사 예수’이다.


여러분, 2천 년 전에, 로마식민지의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끼니를 건너뛰고 살던 그 시절에서도,

예수님은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이 잘 사는 데도 <문제에서 구원>을 바란다.

이것은 오늘날의 복음이 뭔가 타협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당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 예수’이신가, 아니면 ‘해결사 예수’이신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데,

뭔가 자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너무 커서, 감당을 못해서.. 자살한다.

그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돈)문제라고 한다.

돈을 신god으로 섬기던 사람은, 돈 문제가 생기면.. 절망하고, 자살한다.


‘자살이 지옥 갈 죄인가?’에 대해서.. 신학자끼리 서로 생각을 달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도 물론 큰 죄지만,

그 보다 그 ‘동기’가 더 큰 죄라고 본다.


만약 ‘돈’을 신으로 섬기다가, 낙망하고 자살한 것이라면.. 구원받지 못한다.

만약 ‘자아’를 신으로 섬기다가, 낙심하고 자살한 것이라면.. 구원받지 못한다.

각종 ‘우상’을 자기 신으로 섬기다가, 절망하고 자살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자살’이라는 외적 행위 이전에,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 말고, 다른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살자가 구원받기 매우 어려운 이유이다.


▲출애굽 10번째 재앙의 교훈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애굽과 히브리 백성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임했다.

어린양의 피를 문에 칠하지 않으면, 양쪽에 구분 없이 모두 장자가 죽었다.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바로 왕의 진노’로부터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진노는, 괴롭히는 애굽 백성이나, 괴롭힘을 당하는 히브리 백성이나 동일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잘 살거나/못 살거나,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 양의 피를 통해서 ‘죄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기준이 너무 낮아져 버렸다.


▲오늘날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2009년 1월 상황)

그래서 모두가 ‘경제 문제 해결’을 바라며, 신년부터 주님께 부르짖지만,

주님이 더 먼저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이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 믿고 세례를 받아도,

‘자아’나 ‘경제’가 자기 주인(우상)인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다.

청교도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했다.


저는 어제 <요한 웨슬리의 일기>를 읽고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이런 18C 기독교 저서나, 17C 청교도 저작들을 읽어보면,

오늘날 21세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중에,

과연 몇 %나 구원을 받을 지... 의문스럽다.


여러분, 17C 청교도, 18C 영적대각성운동, 이런 시기에

‘교회 안에도 구원 받아야 될 (불신자 같은) 사람이 많다’는 초점을 두고

많은 책과 설교들이 씌어졌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에, 너무 안주하고 있다.

사실은 자기가 ‘구원자 예수’가 아니라, ‘해결사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예수 믿지만, Lordship을 드리지 못하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여러분, 지금 내 삶에 주인이 누구신가?

‘예수’가 내 삶에 주인이신가, 아니면 ‘내 자아’가 내 삶에 주인이신가?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더라도, 자기 삶에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하면

구원 받지 못할 것이다.      

                                                                                                       ‘영접한다’는 말의 의미 (강추)

오늘날 비록 절에 가서 부처에게 절하지 않더라도

‘자기’를 부처처럼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도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해결사’정도로만 생각한다.

여러분, ‘구원’의 기준을 너무 하향下向 설정하지 마시라. 구원 못 받으면 큰 일 난다!


▲경제적인(돈) 문제로, 예배와 삶의 기쁨이 사라지고, 복음전파의 소망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경제가 자기 하나님>이라는 증거다.


여러분은 ‘예배만 안 빠지고 잘 드리면 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실 것이다.

그런데 한 번 4복음서를 펴 놓고, 예수님 말씀을 심각하게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내가 구원 받을 자인지/아닌지.. 기도하며 물어보시기 바란다.


4복음서에 ‘바깥 어두움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전혀 몰랐던 자들이 아니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 다녔던 사람들’이었다.


▲19세기에 찰스 스펄전 목사는, 소년시절부터 청교도 서적들을 탐독했다.

그런데 요즘은, 성인 집사들도, 그런 책을 안 읽는다.

청교도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책을 읽으면서.. 자기 구원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17~19세기 기독교인들이 읽던 신앙서적들과

오늘날 20~21세기 기독교인들이 읽는 신앙서적들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기독교가 변해도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진리는 2천 년 전이나, 지금 21세기나 ‘변하지 않으니까 진리’인데,

그 진리를 해석/이해/적용하는 우리는.. 너무 많이 변한 것 같다.


2009년도 저희 교회는

‘진정한 구원의 기준을 회복’하기를 소원한다.

청교도 시대의 구원의 기준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태권도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오늘날의 태권도는, 1천5백 년 전 신라의 화랑들이 연마하던 태권도와

너무 달라져 버렸다. (복음과 비유해서 이해하시기 바람)


물론 오늘날의 태권도는 ‘대중화’에 성공했다. 아프리카 각 나라에도 진출했다.

그래서 태권도는, 오늘날의 한인교회만큼, 전 세계로 널러 퍼져있다.

그런데 태권도의 질이.. 원래 무술에서→이제 한낱 스포츠 수준으로 추락한 것이다.


액션 영화에 보면, 거물급 무술인은 츄리닝 입고 나오는데,

낮은 수준의 부하들은, 꼭 태권도복 입고 나온다. 

그래서 대결하면, 도복 입은 부하들은 항상 나가떨어진다. (나는 기분 나쁘다)


그리고 실전에서도,

태국의 무예타이(킥복싱)는 가격을 당해도.. 맷집으로 계속 버티는데,

(일부) 태권도는 가격을 당하면.. 나가떨어진다고 한다. 

※이 주장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며,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음


제가, 태권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 복음이 꼭 태권도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계화’에는 성공해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지만,

그 질quality이 확 떨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수준이 하향평준화 되어 버렸다.


이것은, 오늘날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할 사명이 있는 한국교회로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선교사를 많이 내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공주의/기복주의/자기계발 메시지’로 무장한 선교사를 내보내는 것은

마귀와의 영적전쟁에서 교묘하게 패하는 것이다. (이긴 것 같은데, 지고 만다)


▲마치는 말

오늘날 경제가 가장 큰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기독교가 ‘죄에서 구원자’을 버리고 ‘경제/삶의 문제의 해결자 예수’로 가고 있다.


실제로 그런 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이 혹시 있다면,

‘자기 구원 문제’를 심각하게 갈등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청교도 수준>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죄에서 구원자 예수’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 결코 놓칠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 가운데,

‘일정한 수준까지, 내가 채워지기 전까지, 결코 남을 도울 수 없다’는 분이 있다.

물론 그 겸손과 신중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아무리 자기가 모자라고, 아무리 자기가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수준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한다.

반드시 하게 되어 있다.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전신불수로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세상 구원을 위한 ‘기도’라도 한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 가운데, 교회에 나오면서도,

아직 ‘내가 일정 수준까지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자기가 자기에게 ‘우상’인 것이다.


혹시 이런 분이 있다면, 금년에는 반드시 청교도 수준의 ‘회개’를 통과하고,

확실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시기 축원 드린다.

제일 먼저 자기가 성경 펴고 한 절 한 절 읽으면서, 기도해 보시기 바란다.

그러면 ‘회개의 은혜’부터 임할 것이다.


▲앞으로 과제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전적 타락total corruption’ 이런 말을 들으면 생소해 한다.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또한 그 사실(전적타락)을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많은 교인들(not세상 사람들)이 repent(회개)의 은혜보다는

repair(수선, 고침)의 은혜를 받기 사모한다.


20세기 후반 들어 설교에 ‘적용’이 너무 강조되면서

이제는 ‘원리’가 너무 약화된 결과를 빚었다.


새해에 우리에게 ‘경제가 회복’되기 이전에

‘구원의 기준이 회복’되게 되기를 소망한다.

참 구원받은 사람은, 혹시 ‘경제 회복’ 안 되어도, 늘 기쁘고 승리하는 삶을 산다.


여러분, 술 끊고, 담배 끊는 것이 ‘회개/믿음’인줄 아시는 분도 많이 있다.

(그것도 끊어야 하지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구원 받지 못하는 자가 많아지는 비극이.. 결코 없어야 하겠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진정 회개하지 않은 교인’들이 양산되고 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갈1:8  - 사도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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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서적/설교 소개


죄 죽이기 / 존 오웬  (밑줄 위에 클릭)

[스크랩] 목사의 의무/ 존 오웬

유사 그리스도인/ 매튜 미드

천로역정 (요약집) / 존 번연

근심하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치료/ 존 번연

고난 과 말씀 / 존 번연, 루터

「상한 심령으로 서라」/ 존 번연

경건한 두려움 (경외심)/존 번연


※그런데 오늘날 혹자는, <구원에 대해 청교도의 기준은 너무 높다>고 평가합니다.

위의 청교도 목회자들은 물론이요, 그 후예인

조나단 에드워즈 등의 설교는.. 너무 기준이 높고, 극단이다 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 평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편집자의 개인적 의견은.. 안전하게 (=기준을 좀 높게)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대중적 기준은.. 너무 낮아져 있습니다. 이것도 초극단입니다.                                   ▣ 믿음론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