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9

치유에 관하여 2403

LNCK 2010. 4. 14. 21:44

◈치유에 관하여                               마17:15                           거의 가톨릭 글 스크랩



◑약도 먹고 병원에도 가야하지만.. 사랑이 꼭 필요하다.


"주님, 제 아들이 간질병으로 몹시 시달리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마17:15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 중에 한 가지는

자녀가 불치병에 걸려, 아파서 고생하고 있는데,

그저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부모이겠지요.


(본문에) 오랜 세월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 아버지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효약도 없던 시절에, 간질병으로 인해 하루하루 죽어 가는 아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습니다.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하는 증상을 봐서

아이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한 중증이었습니다.

수시로 넘어져 온 몸은 성한 데가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수시로 뒤로 넘어가면서 입에 거품을 무는 아이,

아버지의 가슴은 철저하게도 내려앉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대책 없이 쳐다만 보고 있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가산을 다 탕진하면서까지 좋다는 데는 다 다녀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다 허사였습니다. 아이의 증세는 점점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마음은 오직 한가지였겠지요.

"차라리 내가 아이 대신 아팠으면"하는 마음 말입니다.


아버지의 자식을 위한 간절한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예수님 앞으로 이끕니다.

이제 더 이상 체면도 부끄러움도 없이 만듭니다.

예수님 앞에 털썩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그저 간절히 외칩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결국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치유의 원동력이 됩니다.

결국 치유의 원천은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병의 회복을 위해서 약물치료도 좋습니다. 물리치료, 심리치료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치료 가운데서 가장 좋은 치료는.. '사랑'이란 약에 의한 치료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한 인간을 향한 측은한 마음이..

      환자의 마음에, 또한 주님의 마음에.. 결국 기적을 불러옵니다. <국>

 

      덧붙여서, 가족 중에 중환자가 한 명 생겨서 입원이라도 하면,

      온 집에 초비상이 걸리게 됩니다.

      환자 1명에 가족 3~4명이 관심을 갖고 교대로 돌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과 사랑>입니다.

     돈 문제도 있고, 다른 문제들도 있지만,

     <관심과 사랑>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환자가 차라리 (남은 가족을 위하여) 빨리 죽어주기를 바란다나요?  


 

◑질병을 친구처럼

 

젊은 시절, 오랜 날들 저를 괴롭히던 고질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병이 장기화되다보니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 병 때문에 병원도 자주 다녀야 했고,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치료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주 자리를 비워야했기에

회사 정기인사 때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병은 내 삶을 망쳐놓은 ‘웬수’였습니다.


병에서 빨리 헤어나려면 몇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좋은 의사의 정확한 진단과 처방,

-효능 좋은 약과 적절한 치료방법,

-그리고 환자 본인의 긍정적인 마음과, 치유를 위한 적극적인 의지가

한데 아우러져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가 제 마음에 가득하니,

아무리 병원을 다니고, 약을 복용한다한들 치유가 제대로 이루어졌겠습니까?


병이 장기화되면서..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는데,

우연히 한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질병을 친구처럼!’


이 병 역시 여기저기 떠돌다 내 육신에 둥지를 튼, 가엾은 친구로 생각했습니다.

이 병은 내 몸을 더 소중히 여기고,

평소에 좀 더 신경 써서 가꾸라는 ‘친구의 충고’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병도 내 몸의 일부이니, 예민한 친구처럼 조심스럽게 대하고,

‘잘 다스려보자’고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함께 살아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바꿔먹는 순간부터

몸과 마음이 편해지고, 약도 잘 들고, 신속하게 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를 친구처럼!>

     우리네 인생, 어찌 보면 숱한 십자가들의 연속입니다.

     한번 다가온 십자가는 찰거머리처럼 우리 몸에 딱 달라붙어

     여간해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희한하게도 도망가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십자가의 무게는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질 때 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냐에 따라, 십자가가 은총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과 영광스런 승리를 맛보셨습니다. <국>


     뭐든지 자꾸 피하려고만 하면.. 일이 더 어려워집니다.

     피할 일은 피하더라도, 당당히 맞설 일은 당당히 맞서는 것이

     일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길입니다.

   


◑긍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의사


야고보(세례 명) 씨는 30년 넘게 시골 병원에서 환자를 보살피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인근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소탈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분이라..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했습니다.


야고보 씨는 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였습니다.

그의 편안한 웃음은,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연로한 그이건만, 환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줄을 잇습니다.


야고보 씨의 말은 늘 긍정적입니다.

“별거 아니야. 심한 병이 아니니까 곧 나을 수 있어. 힘내.”

자식에게 타이르듯 그의 말에는 늘 정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환자들은 힘을 얻고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의술보다는 인술이 사람을 낫게 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관련글 한마디 말의 위력 (강추)



◑질병도 전도의 기회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올해 정년퇴직한

이무석 박사가 의과대학에 학생으로 다닐 때의 일입니다.

당시 교수님 중에는 고함지르고 욕도 하시는 매우 무서운 분이 한 분 계셨는데,

심지어 수술 중에 실수한 레지던트를 발로차서 내쫓았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수술실력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찬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무석 박사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사나운 은사분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은사가 교회에서 겸손히 헌금위원으로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궁금해진 이무석 박사는, 그 은사 교수님을 찾아가서,

겸손해진 경위를 묻자, 은사는 이렇게 간증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 비과학적이라 생각했지.

의사 생활을 하면서..

말기암 환자들이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고 욕을 하며

불안에 떨다가 죽어 가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그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한 환자가 있었는데,

그분의 얼굴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어.

그분은 지독한 통증을 잘 참으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어.

내가 회진 나가면, 그분은 언제나 나에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했어.


나는 그때, ‘나라면 저렇게 죽음 앞에서 편안할 수 있을까?’

‘저분에게는 무언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는데

그분은 예수님을 믿고 있었어.

그분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지.


그 후 주위를 살펴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다르더라.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데 대해서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분의 영향이 제일 컸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


지난 여름캠프 중에 어떤 초등학교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데

그 아이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신부님, 저는 그 남자선생님이 정말로 싫어요. 그 선생님은 군대도 안 가요?”


저는 그 선생님이 왜 싫으냐고 물어보았지요.

그랬더니만 그냥 ‘모든 면이 다 싫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날, 그 초등학생이 싫어하는 교리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그 초등학생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해요.


“신부님, 저는 아이들이 다 좋은데, 왠지 그 아이만큼은 정이 가지 않아요.

괜히 싫고 가까이 가기 싫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서로가 싫어했던 상대방은 직접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상대방을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주 간단한 진리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 사람 역시 나를 좋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완동물을 키워보신 분은 더 잘 아실겁니다.


애완동물들은..

자기를 좋아해주면, 자기 자신도 좋아한다는 애정표현을 끊임없이 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느끼면.. 적대심을 표현하지요.


사랑이나 미움의 감정은

이렇게 내가 표현한 대로..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받고 싶습니까? 아니면 미움을 받고 싶습니까?

아마 모두가 사랑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사랑해야..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데.. 그가 어찌 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변화산 사건을 읽을 때 드는 생각


'부스럼', '마른버짐', 이런 말들 들어보셨습니까?

전쟁이 끝난 후 아무것도 없던 시절, 영양 상태를 점검할 겨를이 없던 시절,

그저 배만 채워도 감지덕지이던 시절,

환경적 요인으로 저희 또래 중 많은 아이들이 이런 병을 끼고 살았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어서 얼굴 여기저기가 허옇게 부스럼이 일어났습니다.

너무나 보기 싫어 수돗가로 달려가 씻고 또 씻어 겨우 없앴는가 하면

어느새 다시 일어났습니다.


머리카락 속은 군데군데 부스럼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약을 바르려고 어머니는 부스럼 주변머리를 가위로 잘라내다 보니

그 몰골이 참으로 볼만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친구들이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양아치'였습니다.


이런 저였는데, 많이 발전한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바람을 지녀봅니다.

아직도 이렇게 중심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영혼이지만,

아직도 주님 보시기에 부족하고 부끄러운 영혼이지만,

언젠가 그분 도우심으로, 또 다른 변모가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이 초라한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나는 구원의 갑옷을 입혀주시리라는 희망 말입니다.

그 때 우리 얼굴은, 성인성녀들과 더불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토록 고달파도, 이토록 부끄러워도,

이토록 힘겨워도 다시금 힘을 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그래서 성경 변화산 사건을 읽으며,

변모하신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생각할 때마다,

어떤 희망과 용기가 솟아오릅니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일이지만,

그럼에도 나의 인격적/신체적 변화를 반드시 꿈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변화산 사건’이 나에게 주는 복된 희망입니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닮습니까?

그 이유는 동고동락(同苦同樂)하기 때문입니다.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고통당하고, 같이 십자가를 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반드시 주님과 닮아지지 않겠습니까?  <국>


 

◑탈진에 관하여


10년 전부터 한국 사회는 '전방향 탈진全方向 脫盡'의 중증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너무 힘을 많이 써서 힘이 다 빠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먼저 저는, 저의 이런 이해가 잘못된 판단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런 증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감지되어 왔었습니다.


10년 전에 한 신문사에서 <희망지수>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희망지수란, ‘어떤 일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나 앞날에 대한 기대’를

수치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국민들의 희망지수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최고지수를 100으로 할 때 평균61.5점이 나왔다고 합니다.


연령별로 보면 20대가 65.2점, 30대가 60.2점, 40대가 56.9점으로 답해서

연장자일수록 더 희망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이 사회의 중추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40대가 60점 이하라는 것은

걱정스런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탈진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 하면,

일을 너무 많이 하고 난 후의 공허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나라 전체적으로는 70년대부터 밀어붙인 무리한 성장정책이

지금의 탈진을 불러온 게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 태어나는 세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열심히 일한 결과 성취감을 가져야 마땅한데,

어째서 도리어 탈진감을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들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증세를 전문용어로 post-adrenalin depression

즉,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우울증'이라는 정식 병명으로 부른답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오래 몰두하면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많이 소진된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면 온 몸과 마음이 쉽게 탈진하고 공허감을 느껴서 우울증에 빠진다는 거죠.

특히 이런 우울증은 어떤 전문직에 종사해서 중요한 업적을 남기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큰 회사를 위해 중요한 프로젝트를 완성한 사람이

그 이후에 느끼게 되는 공허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가수들이나 연예인들이

공연을 끝내고 나면 찾아오는 허탈감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이기지 못해 술이나 마약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교회의 사역자나 설교자들한테도 찾아올 수 있다고 합니다.


    신앙의 내공을 쌓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내면을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외면을 버린다는 뜻은 아님)

    그러므로 아무리 큰 일을 치르고 나더라도.. 탈진하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평소에 이미 ‘자기를 부인(자기 죽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중증 탈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신앙의 지향점이 잘못 되었고,

    내면보다 외형적인 면을 더 치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때는 본질적 신앙으로 회귀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구도자의 길을 찾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안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탈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노숙자도/ 집에서 노는 사람도 다 탈진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가 전방위 압박을 가하잖아요...                                                           ▣ 신유, 기적  

'분류 없음 > 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것까지 참으라 2414  (0) 2010.04.22
용납하기  (0) 2010.04.19
주여, 비통함을 제게 주소서 P1 / David Wilkerson  (0) 2010.04.14
'나의 중보기도의 삶' 나눔 2389   (0) 2010.04.06
만약 부활이 없다면  (0) 2010.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