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납하기 마18:4~6 스크랩
◑1. 용납하기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18:4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려면 어린아이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순진하고 거짓 없고 착하다는 것만 연상합니다.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이라고 모두 순진한 것은 아닙니다.
영악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어린이일수록 질투심이 적나라하고,
쉽게 토라지고 쉽게 다툽니다. 이러한 특성을 닮으라는 말씀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가장 큰 특성은 ‘어머니가 없으면 불안해한다.’는 점입니다.
아이일수록 어머니 없는 세상은 불안 그 자체입니다.
어른인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익혀야 할 어린이의 마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어머니 없는 어린이의 세상과 같다는 느낌입니다.
이 느낌을 생활화하라는 것이 위 말씀의 교훈입니다.
어른인 우리는,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있습니다. 믿고 전적으로 맡기는 자세입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처럼 되는 것이지요. 그런 아이는 편안합니다.
전부를 맡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맡기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평화를 체험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삶의 본질은 단순합니다. 살면서 우리가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사는 것’은 언제라도 잘 사는 것입니다.
연습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쓰시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린아이를 용납하라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18:5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축복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용납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18:6
(마18:4~6절의 문맥상)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의 부족함 때문에 거절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2. 직장에서 용납 : 악연도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
정말 속상했습니다. 왜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과 꼭 마주쳐야 하는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서너 명을 악연으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제 앞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듯이 잘하는데
뒤에서는 저를 헐뜯고 다녔습니다.
심지어는 결혼한 제가, 직장 동료와 연애한다는 헛소문까지 퍼뜨렸습니다.
마주앉아 경위를 따지면 금방 잘못했다고 빕니다.
그러고는 다시 뒤에서 이상한 말을 하면서, 저와 동료들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결국 저는 그를 피해 다른 부서로 옮겨갔습니다.
또 한 사람은 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가 저를 싫어하는지도 모르고, 그와 마주치면 꼬박꼬박 인사를 했는데
하루는 면전에서 “아유, 재수 없어.” 하고 지나가더군요.
그 당시 제가 느낀 당혹감과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와 함께 한 사무실에서, 몇 년을 일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제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로 인해 인사상의 불이익, 이른바 '물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이 악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체하지만, 속으로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저를 위해
(제 인격수련을 위해) 짝지워 주신 동반자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동시에 오지 않고, 차례차례 제 곁에 머물렀는데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지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교만함에 걸려 넘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온 것입니다.
자신을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제 무심함이, 상대방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지,
제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 된 상황이, 상대방에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편과 아내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많은 동반자들을
하나님은 짝지워 주시는 것 같습니다. 악연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말입니다. 임영숙 님 글
◑3. 용서의 사람 : 恕(서)를 자기 싸인으로 쓰는 사람 *‘용서할 서’
사람 사이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기억하려고 하지, 용서하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를 철저하게 돌려주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고 보면
용서란 무척 힘든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본인의 싸인을 용서를 뜻하는 ‘恕’(서)자로 사용하는 선배 수녀가 있습니다.
자기 이름과 상관없는 싸인이라 궁금해서 직접 물어본 적 있습니다.
그때 선배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라고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상처’ 때문에 고통 받고 살아갑니다.
송봉모 님은 자신의 저서『상처와 용서』를 통해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제시합니다.
▲용서는 .. 나 자신을 위한 것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서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몇 번이면 되는지”
우리는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니까
용서는.. ‘그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그를 용서하라면.. 죽어도 용서 못합니다.
죽이고 싶은데 어찌 용서를 합니까?
용서하려 해도 억지로 되지 않을뿐더러
용서하려 할수록 더 생각나서, 더 죽이고 싶습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안에 있는 그의 가시를 빼내는 것입니다.
빼내지 않고 그냥 놔두면
그가 던진 말이
그가 한 행위가
그가 끼친 손해가
계속 나를 후벼 파 상처를 덧내고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심장에 가시를 박아놓았다면
원한을 품고 그를 미워한다고, 그 가시가 뽑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렇게 상처 주고 괴롭게 하였으니
너도 상처 받고 괴로우라고 미워해도
무디고 뻔뻔한 사람은
아무리 미워해도, 상처받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움과 원한을 품고 사는 자기만 손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함은 하나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고
그러니 몇 번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선>
(※북쪽 사람들을 이기는 길도.. 한 편으로는 용서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빠진 대응은.. 결국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적 원리 아닙니까.)
◑4. 사랑은 구체적으로 내 주위의 한 사람으로부터
(문제 제기)
외국의 어느 수도원에서는 원생들이 수련기 때
특별히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금지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동기 내에서도 친한 몇 그룹이 형성이 되고
또 소외되는 사람도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과의 관계가 너무 깊어지지 않도록 주위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너무 깊이 사랑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소홀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또 반대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
인류가 시작된 지 수천 년이 넘지만
예수님은 단지 한 세대만을 짧게 살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시대에 산 사람은 소외된 것일까요?
또 세상이 넓지만, 좁은 팔레스타인에서만 활동하시고
어쩔 수 없이 이집트로 피신하신 것 외에는, 외국으로도 일절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소외된 것이고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사랑하신 것일까요?
또 세상에는 수많은 가정이 있지만
예수님은 당신 생애 33년 중 30년을 조용히 요셉과 마리아와만 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부모들은 무시 된 것일까요?
또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12제자를 뽑고, 그들과만 함께 다니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던 맣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편애를 하신 것일까요?
또 예수님은 그 12사도들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사건 때,
즉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타볼산에서 변모하실 때,
겟세마니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3명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리고 베드로에게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평하게 사랑하지 못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왜 부활하셔서는 공평하게 남녀 만인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자에게만 나타나신 것일까요?
그리고 부활하셔서 유일하게 그녀의 이름만을 부르신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구체적으로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면
누구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없이 ‘아가페 사랑’을 논하지만
구체적으로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콘크리트는 집을 짓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벽돌과 벽돌을 연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콘크리트가 없으면 벽돌집은 완성될 수 없고, 지었다 하더라도 곧 허물어집니다.
그런데 콘크리트는.. 또한 ‘구체적인’이란 뜻입니다.
콘크리트가 없으면.. 집이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구체적이지 않으면 (피상적, 관념적인, 말뿐인) 사랑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먼저 내 옆에 있는 배우자부터 완전히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렇지 못하면 항상 콘크리트가 부족하게 지어진 집에서 사는 것과 같을 것이고
참 사랑의 맛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5.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적극적으로> 살아야
지난 달 말 저희 교구 신자가 함께 강원도의 내린천에서
전체 캠프를 가졌습니다.
재미있었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저 그렇다는 사람도 몇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잘 보면.. 이런 규칙이 있더군요.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임했던 사람입니다.
반면에 그저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프로그램에 잘 참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결국 내가 주축이 되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삶은
기쁨과 열정이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기쁨과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의 삶을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왜 힘들게 살고 있는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은 나를 주인공으로써 세워 주신 삶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주인공보다는
조연이 자기 역할인 것처럼 착각하며 (매사에 소극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연극 주인공을 맡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워야 할 대사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결국 대사를 외우지 못해서.. 주인공 배역에서,
대사 한 마디 없는 지나가는 ‘행인3’의 역할로 변경되었습니다.
일단 외울 대사가 없어서 기뻤습니다.
그러나 연극이 끝난 뒤에 괜히 역할을 바꿨다고 후회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사람은, 지나가는 ‘행인3’이 아니라,
힘들게 대사를 외우고, 어렵게 감정을 표현해야 했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내 삶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그리고 이 주인공인 내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주인공의 역할을 피하면서, 우리는 조연만을 하려고 할까요?
바로 그 과정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피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조연만을 선택한다면.. 박수 받을 일도 전혀 없게 됩니다.
바로 지금의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젊은 내가, 지금 당장 주인공의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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