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까지 참으라 눅22:47~53 09.10.08.설교대강녹취
◑1. 이것까지 참으라
베드로가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쳤을 때,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셨다. 눅22:51
이 말씀의 뜻에 대해 2가지 해석이 있다.
①이런 일(가룟 유다의 배신과 예수님 체포)까지 받아들이고 수용해라..는 뜻
②칼로 치는 일을 멈춰라. 칼로 대항하는 일을 그만해라... 라는 뜻
그런데 넓게 보면, 2가지가 같은 뜻이다.
요18:11에는, 아버지가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말고의 귀를 주워서, 도로 붙여 주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고,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길에 있어서
그가 내 입장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를 공격하고, 저항하는 일을
베드로야, 이제는 좀 그만 두어라.. 라는 뜻이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육신적으로 대처하는 베드로
베드로는 앞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와 수난을 (1차로) 예고하셨을 때
‘그리 마옵소서’ 하면서 예수님을 제지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나무라기까지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엄하게 대하셨다.
지금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는 장면도, 그 사건과 연장선상에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려고 의연하게 나아가고 계신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도와준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방해를 하고 있다.
베드로의 <자기 육신적 생각>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은
‘베드로야, 하나님의 섭리가 네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너는 언제까지나 충동적으로 거부하고, 반항하려 하는 거냐?’ 라는 뜻이다.
용감하게 칼을 빼들고, 예수님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베드로가 고맙기도 하지만,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조용하게 가르치신다.
‘이제 좀 그만 해’ (‘이것까지 참으라’의 NASV번역, Stop, No more of this!) 주1)
▲적용
‘너는 언제까지, 아버지의 뜻이
현실에서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 (검을 휘두르며) 충동적으로 반항할 것이냐?’
‘도대체 언제까지 너는
아버지의 뜻이, 네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싫고,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변 사람들과 충돌하고 저항하기를 계속할 것이냐?’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언제까지나 너는, 오직 네 입장만 생각하느냐?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상황에서, 그 뜻을 수용하지 못하고
네 입장에서 반항하고, 저항하고, 싸우려 드느냐?’
사실 상황자체는 검과 몽둥이를 든 자들, 즉 가해자들이 잘못 되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가해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내다보셨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참지 못하고
(베드로처럼) 너무나 많이 ‘말고의 귀’를 잘라내었다.
내 눈에 보이기는,
분명히 검과 몽둥이를 들고, 나에게 가해하는 자들이.. 나쁜 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결코 나의 길을 해롭게 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그들이 폭도들이라도
도구로 쓰임 받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너무나 자주,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저들이 검과 몽둥이를 들고 내게 달려드니까,
나도 화가 나서,
내 검을 빼서 그들의 귀를 쳐내면서,
저항하고, 거부하고, 충동적으로 반항하더라는 것이다.
나도, 베드로처럼!
▲가정에서 적용
아내들이여, 남편하고 얼마나 많이 싸웠는가?
그래서 ‘남편의 귀’를 몇 번이나 잘랐던가?
자녀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녀의 귀’를 얼마나 많이 잘랐는가?
무조건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은,
다 반항적으로 나쁘게 보고, 내가 충동적으로 대항하더라는 것이다.
내게 해로워 보이는 일과 환경이 있고,
내게 무지하게 억울해 보이는 일과 환경도.. 끊임없이 내게 주어진다.
그냥 당하고 있기에는
울분이 터져서 못 견디는 일들이.. 우리 인생에 연속된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다.
‘이것까지 참으라!’
이것은 무조건 인내를 위한 인내처럼, 꾹 눌러 참으라기보다는,
제3의 원인자인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 뜻과 섭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가운데.. 참으라는 것이다.
◑2. 내 편을 조심하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을 가장 가로막는 자는.. 내 편이다.
①오히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의연히 걸어가시는데 일조하고 있다.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도움을 주고 있다.
가룟 유다의 미움과, 배신과, 모든 악행을
예수님이 받아들이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마시기 원하시는 잔을.. 예수님은 마시고 계신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진척되어 가고 있다.
②반면에 베드로는, 예수님 편을 들기 위해
자기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칼을 휘둘렀는데,
어쩌면 하나님의 역사에 제일 큰 반대자요,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님을 가장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사명인 십자가의 길에.. 가장 큰 방해꾼 노릇을 하고 있다.
▲이게 아이러니이고, 신자의 어려움이다.
아이러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사실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누가 가장 걸림돌이 되는가 하면..
교회를 가장 사랑한다고 날뛰는 사람이..
베드로처럼..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 쉽다.
목회자에게 누가 가장 큰 시험거리가 되는가 하면,
따지고 보면, 베드로처럼,
목회자의 가장 좌우편에 서는 사람들이다.
목회자를 위해서 칼을 빼 들 수 있는 사람이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목회자가 십자가의 길을 가는데.. 가장 큰 방해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자기 편을 들어주는 사람을 (예수님처럼) 꾸짖어야 한다.
자기 편을 들어주지 말고, 하나님 편을 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쳐야 한다.
▲제/설교자가 심방을 가서,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해 드릴 때, 참 마음에 갈등이 많다.
나는 그 가정이 원하는 기도제목이 뭔지.. 훤히 안다.
그 가정에 닥친 그 어떤 문제를
목사가 기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은 쉽게 극복하기를 원한다.
저는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제가 고민하는 것은,
제 눈에는, 그 가정에 그 문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 휜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치료의 광선을 발하사.. 다 치료하여 주시고..’
‘고객들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몰려들게 하시고..’ 이렇게 기도해드려야 하는데,
제 마음에 그게 허락되지 않아서, 제가 심방 가서, 기도를 애매하게 할 때가 많다.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종종 든다.
‘이 잔은,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게 마셔버리라고 허락하신 잔인데..’
그런데 무조건 피하게 해 달라고, 모면하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가 잘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성도의 편이 되어드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가 될 때가 종종 있다.
우리는 누구든지 인간의 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가 내 편이 되어준다 하더라도.. 그를 물리쳐야 한다.
우리가 편들 것은, 오직 하나님 편뿐이다.
그런데 특히 내편이 되어주려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종종 시험에 빠진다.
하루는 주기철 목사님이, 아마 일본 경찰의 회유책의 일환으로
유치장에서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아마 따뜻한 가정에서 며칠 지내다 보면, 신사참배에 타협할 것으로
일본 경찰이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때 오정모 사모님은, 남편 주 목사님의 편을 들지 않았다.
집 마당에서 단호하게 ‘유치장으로 돌아가라’고 당장 내쫓으셨다고 한다.
계속 신사참배를 반대하라는 뜻이었다.
주기철 목사님, 오정모 사모님..
모두 자기 편을 물리치고, 오직 하나님 편을 들었던 분들이었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기둥과 같은 일꾼이요,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3. 내게 준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예수께서 베드로더라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18:11
▲예수님은 왜 어둠의 권세에 저항하지 않으시고, 잡혀가셨는가?
본문에, 가룟 유다를 위시한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어둠의 권세’가 역사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눅22:53
그러니까 저들이 하는 행동은, 마귀의 역사 아래서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마귀의 역사라면, 당연히 대처하고 대항해야지..
왜 참으라는 것인가? 말이 되는가? 마귀를 물리쳐야 정상이지.
하나님은, 마귀의 역사를 사용(역이용)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수 있으므로.., 참으라고 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길’이 바로 그런 것이다.
내 친구와 내 편은.. 십자가의 길에 오히려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장애가 되기 쉽다.
그러나 마귀의 역사는, 크게 날뛰는 대적은,
바로 내가 십자가를 지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승승장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십자가를 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려면, 내 앞에 놓인 쓴 잔을 내가 들이켜야 한다.
여러분, 술 먹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 길길이 날뛰는 남편이
마귀의 역사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그 마귀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 질 수도 있다.
내가 무조건 대항해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까지도 참아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잔’을 내가 마셔야 한다.
대개의 경우, 그 남편 때문에
그 아내가 성자가 되고, 예수의 형상으로 성화되어간다.
이것이 하나님이 뜻이다.
아내가 먼저 그렇게 변화되어질 때.. 남편도 따라서 변화된다.
그런데 만약 아내가, 술 먹는 남편을 '마귀의 종'으로 규정하고
대항해서 싸울 때는.. 아무 변화도 안 일어나고, 다툼만 끝없이 계속된다.
어린 자녀가 중병에 걸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그 부모에게 주시는 ‘십자가의 쓴 잔’이 될 수 있다.
그 쓴 잔을 마시면서 (아이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 부모가 점점 더 예수의 형상으로 성화되어진다.
그러면서 그 부모가, 하나님의 사명자로 성숙되는 것이다.
▲마치는 말
오늘 여러분에게 닥친 환란, 시험, 고생스런 사건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내미시는 ‘쓴 잔’이다.
그 쓴 잔을 다 마셔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베드로의 충동’이 죽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베드로의 충동’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래서 즉시로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잘라 버리거나
내 앞에 내밀어진 쓴 잔을 뿌리쳐 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시라.
말고의 귀가 베드로의 칼에 떨어졌다.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집어 드시고는,
땅바닥에서 묻은 흙을, 말고의 귀에서 약간 툭툭 털어내셨을 것이다.
그리고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신이 귀를 붙여주시고는,
그 귀가 붙여진 사람의 손에 잡혀 가시는 것이다.
이것까지도 다 참으신 것이다. 눅22:51
당신에게 주신 잔을.. 다 마시신 것이다. 요18:11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
주1) 이 대목에서, 우리는 모두 베드로를 높이 평가할 것이다.
예수님을 무고하게 잡으러 온 폭도들 앞에서
다른 제자들이 모두 멈짓 멈짓하고 있을 때,
베드로만큼은, 자기 몸을 집어던져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었다.
여러분, 이게 오늘날에도 칼을 휘둘렀다면
크게 걸려 들어갈 일인데, 하물며 그 당시에는..
그것도 권력자의 하수인에게 대항했다는 것은..
베드로도 자기 목숨을 걸고 덤빈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검과 몽둥이를 들고 온, 대제사장의 하수인들도 꾸짖지 않으시고,
유독 자기 사랑하는 제자, 그것도 의협심이 불타는 베드로를 꾸짖으셨다.
이런 스승을 두는 제자들도..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제자들이다.
아니 크게 상 받아야 할, 무공훈장을 받아야 할 용맹스런 일을 했는데,
도리어 꾸지람을 들었으니.. 베드로는 심히 억울했을 것이다.
‘베드로야, 고맙다.’ 이렇게 따뜻하게 말해 주셔야 할 상황 아닌가!
▲자기 편을 두지 않았던 장기려 박사
장기려 박사가 부산복음병원에서 이사장으로 있을 때,
장기려 박사를 몰아내고 병원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젊은 수련의들이 들고 일어나서, 급기야 폭력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최중묵이라는 수련의도 그 바람에 2개월 형을 받게 되었는데,
장기려 박사는 (자기편에 서 준) 그를 심하게 꾸중을 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화내는 것을 처음 볼 정도였다고 한다.
장기려 박사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적대하고 쫓아내려던 상대방은 껴안으면서도,
자기편이 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은 그토록 매섭게 꾸중했다.
장기려 박사를 지키려다가 폭력에 연루되었던 최중묵은 나중에 의학박사가 되어
대한의과학회 최우수논문상을 받게 되었을 때
장기려 박사는, 그가 폭력을 쓴 자라며 상을 취소시켜버렸다고 한다.
나중에 최박사가 병원을 개업한 뒤에야
장기려 박사는 위로의 뜻을 담은 상패를 선물했다. ▣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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