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년 째의 신앙 - 김영준 목사 주일설교 (3/3).wmv - YouTube
◈7년째의 신앙 신15:12~18 10.04.25.설교녹취, 출처
우리가 6년동안은 (처음에 일정기간은) 억지로, 무서워서, 마지못해 신앙생활 했다면
7년째부터는 자유인으로서, 자발적으로, 주인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1. 초대교회 사도들의 메시지 와, 오늘날 강단 메시지의 비교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 사도들의 메시지를 우리가 읽어보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듣는 메시지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메시지를 읽어보면,
오늘날 설교자들이 흔히 하듯이
‘신앙을 가져야 하는 동기motive’를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도들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가?’ .. 이런 설교를 하지 않았고,
‘사람이 어떻게 병고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느냐?’ .. 이런 설교도 하지 않았다.
(병고침의 역사는 있었지만, 그것을 신앙을 가져야 하는 동기로 가르치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느냐? .. 이런 설교도 하지 않았고,
(바울서신에서 가정에 대해 가르쳤지만, 설교의 주된 메시지main topic로 강조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어떻게 갖고 살 것이냐?’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자기 소원을 이룰 수 있느냐?’ ... 이런 설교를 하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자기 배우자를 잘 찾을 수 있느냐?’ ... 이런 비결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요즘 유행하는 ‘긍정의 힘’이라든가,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해서도
이런 주제를 다루는 책이, 그 당시에는 발간되지 않았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런 종류의 책을.. 기독교 서적이라고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오늘날 기독교 서적이라는 것들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그들은 이 책들이, 기독교서적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희한하게 생각할 것이다.
정리하면, 사도들은 철저히 ‘복음 설교’를 전했고,
오늘날 강단은 ‘성공주의, 자기계발’ 설교가, 일각에서 많이 범람하고 있다.
▲2. 초대교회 신앙의 특징은... 자발성, 자유, 사랑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던 이유는,
인간이 자기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찾은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시고 사랑하신데 대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응답이었다.
이것에 대한 좋은 예가 ‘귀를 뚫은 종’의 규례이다.
아래 단락을 읽고 나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귀를 뚫은 종>의 규례 신15:12~18
‘히브리인 종이 6년을 섬기고, 7년째가 되면.. 그를 자유롭게 풀어주라’
이런 규례가 있었다.
그런데 예외조항이 있었다.
‘만일 종이, 주인과 주인의 집을 사랑해서,
자기가 그 집을 떠나지 않고, 함께 살기를 결심하면’
그 종의 귓불에다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아마 거기에 고리를 달았을 것이다... 이렇듯 옛날에 귀걸이는 노예의 상징이었다.)
자기는 ‘자원한 종’임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평생 주인을 섬기게 하라는 규례가 있었는데,
이것은 엄격한 주종의 관계라기보다는, 물론 주종의 관계이지만
그 속성은 사랑과 의리로 함께 사는 관계였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비유한다고 본다.
하나님은, 당신의 힘과 강제로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묶어두려고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부득이 안 믿을 수 없어서
안 믿으면 벌 받을까봐 두려워서
안 믿으면 내가 손해 볼 것 같아서
할 수 없고 마지 못해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7년째가 되면, 종이 원하면, 얼마든지 주인집을 떠나갈 수 있다.
하지만 종이 주인을 떠나지 않고,
주인의 집에서, 주인의 종으로서 함께 거하기 원하는 이유는,
그 주인(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갖는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하나님도 이것을 원하신다.
즉, 신앙은 철저히 <자유, 자발,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7년째의 신앙’이다. ←설교제목
6년까지는 종으로 살았을지라도,
제7년에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하게 되는데,
완전한 자유를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종이 ‘내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인을 떠나지 않고, 주인을 섬기며 함께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스스로 자원해서 영구히 종으로 살기로, 헌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에
-내가 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벌 받을까봐 무서워서)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소위 기복신앙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진짜 기독교 신앙을 갖는 근본 목적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런 신앙을 가졌었는데...
▲3. 초대교회 성도들 과 오늘날 성도들의 비교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자원, 자발, 사랑>이.. 그들 신앙의 근본 동기였다.
그 동기가 순수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부르실 때,
‘내가 너희에게 무슨 혜택을 주리니,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버리라는 것이다.
그래야 ‘자발, 자원, 사랑’의 순수한 동기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을 얻기 위하여 ('버리라'의 반대로)
교회에 다니고 있다.
지금 우리는, 2천년 전 성도들보다,
더 풍성하게 살고, 더 건강하게 오래살고, 더 사회적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더 부족해서 더 갖기 위하여.. 주님께 매달린다.
이것은 사실, 신앙이 아니라, 자기 소욕을 채우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무엇을 더 얻기 보다는,
오히려 잃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랐다.
때로는 사회적 자유를 잃기도 하고, 직장을 잃기도 하고,
경제적인 어떤 불이익을 당하고, 심지어는 순교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기쁨으로,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 기쁨과 은혜 속에서, 자기 소유를 서로 나누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들 속에 강력히 임하는 것을 체험하며 살았다.
그리고 예수 믿기 때문에 잃는 많은 것들을,
그것을 손해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자기들의 영광과 특권으로 여겼다.
이렇게 볼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늘날 우리보다도 더 현대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자유/자발성/진정한 사랑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현대적인 요소)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정말 말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이상하게 기독교 신앙적인 면에서는
미신적이고, 타성적이고, 기복신앙적이고, 율법적이다. (not 현대적)
또한 의존적이며, 이방인적的이다. 마6:32
그런 면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귀를 뚫은 종처럼, ‘자유하는 신앙인’
‘스스로 결정해서 자발적으로 믿는 신앙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원래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는지, 여기서 알 수 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초대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아마 민망해서(부끄러워서).. 그들에게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동기는.. 지극히 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다.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짐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고, 내가 어떤 혜택을 입고,
내게 하나님이 해 주실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냐?’ 하고 사람들은 따지고 있다.
하나님은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원래 이유는 아니다.
▲4. (자발적 사랑 대신에) 피상적 사랑이 난무하는 현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여기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늘 듣지만, 그것이 여전히 생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꺼려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친근하게 여기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내 안에 진정한 사랑이 없고, 주님과 사랑의 친밀한 교제가.. 평소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았지만,
그러나 내 안에 여전히 미움, 싸움, 원망, 이런 것들이 더 많다.
내 안에 단물보다는, 쓴물이 더 많다.
내 쓴물 때문에, 내가 남을 보는 눈도 쓰게 보고,
세상을 보는 눈도, 쓰게 보고,
하나님을 볼 때도, 쓴물의 관점으로 본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저 입술로, 말로만 사랑한다고 말할 뿐이다.
그 깊은 사랑의 묘미를 실감하거나, 누리거나, 즐거워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그것이 부담이요, 힘든 일이요, 부득이한 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바로 ‘노예근성’이요, ‘노예신앙’의 실상이다.
아내가 남편의 빨래를 하는 것과,
가사도우미가 빨래를 하는 것은.. 일의 내용은 똑같다.
그러나 그 동기는 전혀 다르다.
일의 내용은 같지만, 그 이유와 동기는 전혀 다르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섬기고,
그 일의 내용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또한 구약의 ‘귀를 뚫은 종들’처럼
하나님을 자원/자발해서/사랑할 수 있게 되기 원한다.
그 사람은, 매일 평소에,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가지며/누리며/즐기며 산다.
그 증거가 없는 사람은.. 자기 신앙을 재점검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구하여 얻을 것인가..' 하는 목적으로 새벽기도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 교제를 누리기 위하여' .. 새벽에 일어나면 기도부터 드린다.
부디 우리는 ‘본질적인 신앙’을 갖게 되기 원한다.
그래야 살아서 천국을 누리며,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단에서부터, 초대교회처럼, 복음이 전파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각자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자발/자유/사랑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기를 바란다.
오히려 손해가 날 수 있는데도 말이다.
▲5.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예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시고, 우리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실 때,
하나님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섬길 분으로
하나님을 믿으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어떤 자신 개인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신앙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무슨 개인적 허물이 있어서, 마음에 아픔이 있어서,
그것을 해결하는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든지..
무슨 가정의 불화가 있었다든지,
이런 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인간이셨다.
그는 우리처럼 질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시는 분이었지만,
그 질고를 해결하려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도 (초대교회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셨고, 또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셨다. 신앙생활에 어떤 이기적 목적이 없으셨다.
이런 신앙이..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모델이요, 모범이다.
................................. 더 읽으실 분 (위 설교문의 서두).............................
인간의 자유가 점점 더 확대되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점점 더 사라질 것인가?
▲과거에는 모든 면에서 ‘신앙적 관점으로 판단’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과거에는 그 사건의 발생 원인을 하나님으로만 설명할 수 있었던 일들이
이제는 하나님이 없이도,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에는 풍랑, 지진, 질병, 기근이든,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이것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로 보았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일어나는 일로 보았다.
지금도 그러한 과거의 사고방식이
계약서류상에 남아있는데,
계약서에 명시된 ‘Act of God’은 주로 자연재해를 일컫는 말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더니, 하나님이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셨다는
요나서 성경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우리는 자연재해든지, 내 개인적 재난이든지
불행한 일이 닥치면, 그 원인을 2가지 방면으로 모두 생각해 봐야 한다.
-우연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일어날 수도 있고,
-둘 다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
꼭 우연으로만 돌리거나,
꼭 하나님의 진노로만 돌리는 것은,
즉, 한쪽 원인으로만 돌리는 것은... 글쎄, 극단적인 견해라고 본다.
과거에는 아기를 갖지 못할 때, 그 이유를 하나님에게만 전가했다.
‘하나님이 태를 닫으셨다.’ 라고 말했다.
비가 오지 않을 때도, 그 이유를 하나님에게서만 찾았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로를 막으셨다’
사람의 몸에 질병이 났을 때도
과거에는 주로 영적으로 그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병을 고치는 방법도 영적(이방종교에서는 주술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다 그랬다.
▲그러나 근대이후 점점 합리적, 이성적, 과학적 판단으로 바뀌고 있다.
오늘날 실제로 우리는 일단 병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자기 질병에 대해서, 일단 의학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의사선생님과 의학적인 관점으로 상담한다.
어느 의사도,
‘환자님, 혈압이 오르셨군요. 죄가 많으신가 봐요. 회개하셔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체중을 줄이시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시고, 음식을 조절하시고, 운동하세요.’
이런 식으로 의학적으로 판단하고, 의학적으로 치료를 한다.
어느 의사도, ‘위장에 염증이 있으시군요.
누구를 미워하시는 모양입니다. 회개하셔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식사습관이 불규칙적이군요. 너무 짜고 맵게 드시는 모양입니다.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입니다.’ 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다만 인간의 이성적, 합리적, 과학적 영역과
신앙적 영역이 점점 더 많이 분리되고 있다.
신앙적 영역은 점점 축소되어 가고 있고,
반면에 인간의 합리적/과학적 영역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창세 이후로, 오늘날처럼
인간의 이성적, 합리적, 과학적 영역이 이렇게 넓어진 적은 없다.
반대로, 신앙적 영역은 상대적으로 축소가 되어지고 있다.
▲현대가 될 수록, 인간의 자유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①인간의 활동범위는 점점 넓어져서, 자유가 너무 많아졌다.
일례로, 사람들에게는 경제적인 자유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래서 노동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면서, 휴가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주5일제 근무 및 엄격한 법적 휴가기간이 정해진다.
옛날 같으면, 휴가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일례로 유럽 인들은 보통 연중에 1달 휴가를 가진다.
이것은 경제적인 여유와 자유를.. 사람들이 더욱 누리고 있다는 뜻이다.
②여성의 자유도, 아직 부족한 면이 많지만
1백 년 전과 비교를 해 본다면, 큰 변화가 있은 것이다.
③정치적인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그리고 '도덕의 자유' 라는 것도 있다.
옛날에는 금기되었을법한 일들이.. 지금은 많이 허용되고 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그것을 나타내고,
그것을 금지하는 것을 오히려 인권침해로 여기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이런 <자유화, 인간의 자유의 향상>은
우리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면이 많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민주화 되고, 인간 자유의 폭이 넓어졌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점점 확대되는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신)으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해방할 것인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신앙의 영역은 점점 더 축소되어왔고,
인간의 자유의 영역은, 반대로, 그 축소되는 만큼 도로 더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 종국에 가서는,
인간들은 완전히 하나님/신을 버릴 것인가?
모든 면에서,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떠나서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갈 것인가?
제 생각에는, 만약에 그런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입지는 좁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분명해질 것이다.
하나님과 신앙에 대해서 오해했던 부분이 (과학과 이성으로) 정리가 되면,
핵심적인 하나님의 역할은 더 분명하게 될 것이다.
일례로, 에덴동산에는 부족함이 없고, 질병이 없고, 사회적인 부조리가 없는
모든 것이 풍성한 낙원이었다. 완전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어야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서 그들의 신앙는, 자유, 자발, 사랑이 근본동기 였다.
또한 그 완벽한 죄가 없는 에덴동산에서도... 인간은 타락해서 죄를 지었다.
그래서 그들은 구세주를 필요로 했다.
인간의 죄는,
가난이나, 질병이나, 환경적 고난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풍성한, 완벽하게 보이는 환경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유념해야 한다. (학자들은, 죄가 열악한 사회환경의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사회가 혹시 낙원처럼 변화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역할과 위치는.. 여전히 지금처럼 그대로 있을 것이다.
지금 세상은 (외형적으로는) 의학, 과학, 문명이 진보하면서
점점 에덴동산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인간수명 백세 시대'를 넘보고 있다.
그러나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보더라도
-그들의 자발적 신앙의 모습을 보든지
-그들의 타락한 죄성을 보든지
이래 저래 그들은 하나님 신앙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앞으로 인류의 미래가 얼마든지 에덴동산처럼 변하여 간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변질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조심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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