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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으로 내주하신다 2454

LNCK 2010. 5. 17. 09:39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주하신다          딤후2:1-13          10.04.18.설교스크랩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복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교제, 동행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느끼며, 체험하며 사십니까?

 


◑잊혀진 복음, 가벼운 교회 생활


미국의 기독교 잡지인 [크리스천 센튜리] 1990년 2월 7일판에

로버트 몰리Bob Morley는 미국연합감리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교회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는 복음전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긴급한 이슈였지만

(‘복음전도’는 여기서 설교를 뜻함. 설교시간에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다는 것)

지금에는 누구도 복음전도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생사 간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 일은 너무 심하거나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착하고 스스로를 개선할 수 있는 능력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온전하게 선하시고 완벽한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방식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시리라고 소망합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부 구원받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만인구원론자(universalist)들이 되었습니다.

탄식할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전도의 긴박성과 긴급성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잃어버린 자를 구출하는 일, 죄인이 회개하는 일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에 다니게 하는 일에 대해 말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만 나오면, 다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 속에서 그 사람이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아마 요즈음은 이렇게 노래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한 때는 교회와 상관이 없던 내가 이제는 교회에 있게 되었으니…”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을

교회에 다니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다보니,

우리 교회들 안에는 구원받지 않거나,

회심하지는 않고서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람들의 교제를 좋아합니다.

부드럽고 따스한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름다운 음악과 감동적인 설교로 충만한 예배를 즐깁니다.


그들이 교회에 대해 헌신하고 계속 나오는 이유는 일종의 ‘느낌’이나 ‘분위기’ 때문입니다.

예배 전체가 매끄럽고 아름답고

성도간의 교제가 친근하고 따스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들을 것이 있고, 느낄 것이 있고, 감동 받을 만한 것이 있고,

포근함과 평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격적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한다고 합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한 방에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알고 받아들이고 사는 삶의 즐거움과 기쁨에 대해서,

그들의 삶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면,


틀림없이 어색한 침묵이 흐를 것이며

대부분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복음전파의 용맹스런 군인으로 모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격요건이 안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궁극적 진지함, 즉 복음이 얼마나 심각하고 궁극적인 문제인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궁극적 진지성이 ‘하나님께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몰리(Morley)가 그의 교단에 널리 퍼져있는 심각한 상황,

즉 복음에 대한 긴급성이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썼다면,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의 신앙의 아들 디모데에게

매우 긴박한 어조로 써내려간 편지에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4:1~2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들 과 3개의 이미지 


바울에게 있어서, ‘최후의 심판’, ‘그리스도의 재림’, ‘하나님 나라’ 등은

매우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이 문제들 때문에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어려움과 환난을 견디어 내야합니다.


아니 어려움을 견디어 내야할 만큼

이 문제들은 중대한 가치와 긴박성을 지니고 있단 말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2:3


바울이 이 말씀을 한 것은 그가 감옥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가 평생 수고해서 복음을 전했던 많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바울을 버리고 신앙에서 떠나고 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심히 근심하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누가 나를 대신하여 복음전파의 일을 감당할 것인가? 디모데가 하겠는가?

그래야하는데 너무 어린 것 같다. 경험도 없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이처럼 바울의 걱정은 깊어만 갔습니다.


디모데를 격려하고 새롭게 도전하기 위해 바울은 세 가지 은유,

즉 3개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말하게 됩니다.

①군인 이미지 2:3-4, ②육상선수 이미지 2:5, ③농부 이미지 2:6


자,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①충성스런 군인이 힘들고 고된 일들을 견디듯이 견디라.

②운동선수가 강한 훈련을 통해 몸을 만들 듯이 그렇게 영적 몸매를 만들어라.

③농부처럼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라.


다시 말하면,

- 군인은 어려움과 난관들을 기대해야 합니다.

- 운동선수는 강한 신체 훈련을 해야 합니다.

-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는 긴 세월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들 각자가 인내하고 견디는 이유는 끝에 있을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 군인은 최후의 승리를 생각하면서 고난을 견딥니다.

- 운동선수는 면류관을 쓸 것을 상상하면서 견딥니다.

- 농부는 풍성한 추수를 소망하면서 견딥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자, 네 앞에 있는 이 이미지들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여라!

이 이미지들로부터 영감을 받기를 바란다!”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미지들이나 은유들은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영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용기를 주거나 마음에 격려를 줍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동안은 그럴 수 있습니다만 오랫동안 지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충성스런 군인처럼 싸우고,

잘 훈련된 운동선수처럼 달리고,

열심히 애쓰는 농부처럼 수고하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지나 은유는 기적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이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시다.

여러분에게 테레사 수녀의 일대기를 상영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녀처럼 헌신된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처럼 긍휼이 많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감동을 받은 여러분들은 얼마동안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참 부럽다.

어떻게 저렇게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고 마음을 새롭게 다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테레사 수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간증이나 영화상영이나 이야기나 은유나 이미지들이

여러분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테레사 수녀처럼 긍휼이 많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녀 안에 있던 동일한 ‘정신’(mind), 동일한 ‘영’(heart), 동일한 ‘기상’(spirit)이

여러분 안에도 있어야 합니다. 동일한 영에 의해 능력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도 그녀와 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동일한 정신, 동일한 기상spirit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이며,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내주’입니다.



◑복음의 핵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내주 內住


바로 이 점을 바울은 딤전2: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이것이 나의 복음이라!” 딤후2:8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이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부활)이 복음의 심장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았다면,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말하기를, 나의 전파하는 것이나 너희의 신앙이나 모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전파나 그에 대한 믿음이 모두 헛되다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죄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쓸모없이 죽은 자들이 될 것이며,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스런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매년 6주 동안, 그러니까 40일 동안 크리스천들은 사순절을 지키고 기념합니다.

그리고 사순절의 절정은 부활절입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합니다.


부활절은 매년 밀물과 썰물처럼 왔다가 갑니다.

우리는 일 년 후에나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게 됩니다.

부활절과 또 다른 부활절 사이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하거나 듣거나 기억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회 당시의 크리스천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 년에 한번 정도 기억되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들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절의 위대한 진리는

그들이 죽은 다음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죽은 후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은, 그리 큰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큰일, 즉 엄청난 충격적 진리는

우리 가운데 내주(內住)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 영원한 삶은 지금 여기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 크리스천들이 경험하고 인식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초기 크리스천들의 신앙은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초기 크리스천 공동체는 ‘부활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의 주일 예배는 언제나 작은 부활절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회의 크리스천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각 사람 안에 거주하시고 계신다는 확신 아래 살았습니다.


▲단봉낙타 크리스천

그러나 우리가 이런 사실을 잊기 시작하게 되면,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살고 계신다는 사실,

그분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면서, 내 마음속 지성소(영)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

그분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 안에 내주하고 계시다는 사실,

 

이런 사실에 눈이 멀게 되면, 우리는 ‘단봉(單峯) 낙타 크리스천’들입니다. 


단봉낙타는 잔등에 봉이 하나인데, 그 안에 필요한 것을 집어넣고 있는 낙타입니다.

단봉, 즉 혹 안에는 대부분 물이 들어 있습니다.

단봉낙타는 등에 있는 혹의 물을 의지하여 긴 사막을 건넙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단봉낙타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혹’으로 사는데요...


이 등 혹 속에는 부모님이나 목사님이나 선생님들이나 책들이나

잡지나 TV가 전해준 지식(not 복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지식으로 사막을 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등 혹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이 다하게 되면 그들은 사막에서 죽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단봉낙타 크리스천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들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8

하신 그 생수의 강물 말입니다.


▲생수의 강 크리스천      ↔단봉낙타 크리스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들 가운데 거주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길고 긴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 크리스천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떨어지는 않는 물’입니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생수의 개울’입니다.


이 생명수,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부활의 생명수를 갖고 사막을 횡단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들을 갖고는 도중에 죽게 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주하신다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사고방식, 인생관, 생사관, 삶의 목적, 삶의 방식 등

모든 것을 새로운 전망대에서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바깥에 살아계신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안에 살아계시며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의 삶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성도 안에 내주하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크리스천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크리스천과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을 나누는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차이는

그가 교회에 다니느냐 안다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차이는, 크리스천은 그들 속에 거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부활하신 그리스도)을 소유한 자들이고,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안에 살아계시고,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능력과 힘의 원천이며 여러분 안에서 솟아오르는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이미지나 은유들은 어느 정도까지만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충성스런 군사, 경쟁하는 운동선수, 열심히 노력하는 농부의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런 이미지들은 우리 삶의 기동성을 가능하게 하는 연료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 이미지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능력과 힘을 공급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성경번역가인 J. B. Phillips가 말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복음의 가장 좋은 부분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현대적 소경됨’(modern blindness)입니다.”

-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똑같은 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며

우리는 전혀 새로운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면

우리는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다르게 살고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우리의 자연적 삶의 본능들에 따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식적 동의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실감나지 않는 복음’입니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피부로 실감나는 복음’입니다.                        ▣ 복음 관련 


*관련글 : 내 안에 거처를 정하시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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