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서문 렘 1:1-3 -스크랩, 출처보기-
*원제목 : 예레미야서의 자기소개 - 나의 왕은 누구인가?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11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5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렘1:1~3
※아래 글은, 해외 선교지 신학교에서, 예레미야서를 가르칠 때 꼭 필요한 강의안입니다.
◑1. 둘 다 불순종의 40년
▶1. 예레미야서의 서두는 다른 예언서들과 아주 큰 차이를 보입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라는 기간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예레미야의 예언은 ‘요시야 13년에 시작하여, 시드기야의 11년까지’ 임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다른 예언서..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미가서에는
예레미야서처럼 연대가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래 구절들을 보세요.
(사1:1) 유다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호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암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
(믹1:1)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이 부분은 예레미야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는데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요시야 13년부터 시드기야 11년까지’는 이스라엘 신앙전통에
아주 중요한 어떤 기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시야 13년부터 시드기야 11년의 기간을 보다 쉽게 표현하면,
기원전 626년부터 기원전 586년이 됩니다. 즉, 이 기간은 40년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전승에 있어서, ‘40년’은 출애굽을 뜻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해서, 그 벌로 40년간 광야에서
소멸되는 기간이라고 민14:34절은 증언합니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서도 동일하게 ‘불순종’한 사람들이 소멸되는 기간으로
40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1)
▶2. 예레미야와 모세
예레미야서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사역기간이 40년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렘1:1~3)
그러므로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읽을 때,
출애굽과 그 시대의 사람이었던 모세를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례를 들어보면, 렘1:9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렘1:9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과 똑같습니다.
신18:18을 읽어봅시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신18:18
이런 표현(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은, 이 두 사람에게만 나타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사역은 ‘신명기와 모세’를 떠나서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나의 왕은 누구인가?
(※아래 3부류의 왕 중에, 나는 어떤 부류에 제일 가까운가요? .. 라는 뜻인 듯)
자! 다시, 우리의 관심을 ‘요시야 13년부터 시드기야 11년까지’로 정해봅시다.
다시 말해서 유다왕국이 소멸되기 직전 40년 기간에 눈을 돌려봅시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다윗의 왕조가
완전히 사라지는 마지막 40년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과연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성서를 꼼꼼하고 깊이 읽음으로써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렘1:1~3절에 4번이나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왕’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이 3번은 명사로 쓰였고, 1번 동사로 쓰였습니다.
‘왕’에 동그라미를 쳐보십시오. 그리고 ‘다스린’에 동그라미를 쳐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2~3절에 4번이나 반복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유다왕국 40년을 정리하면, ‘인간의 왕이 다스렸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1:3절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로 끝나고 있습니다.
본문 렘1:1~3절 사이에 세 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시야, 여호야김, 시드기야입니다. 주2)
이 세 왕은 ‘여호와의 율법’에 대해서, 각기 다른 독특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왕과 율법의 밀접한 관계성
제가 느닷없이 ‘여호와의 율법’을 꺼낸 것이 아닙니다.
‘왕’과 ‘여호와의 율법’의 관계는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신17:14~20절에, 왕이 지켜야할 규례가 나와 있습니다.
이 법규를 잘 지킨다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20
그 법규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읽고, 배우며, 순종할 것’
이었습니다.(신17:18~19)
그러므로 우리는 이 3명의 왕에 대해서 ‘기도생활’이나 ‘전도생활’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여호와의 율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다 합당한 성서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3명의 왕들은 제각기 ‘말씀/율법’에 대해서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데요...
▶1. 요시야 왕 - 말씀을 무식하게 복종하려한 자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 <열왕기하>에 의하면,
요시야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열왕기하에 의하면,
요시야는 성전을 보수하다가 잊혀졌던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왕하 22:8).
그리고 이 율법책에 따라서 ‘말씀 그대로’ 실천하게 됩니다(왕하 23:3).
자세한 내용은 왕하 22:1~23:30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왕기하>에 의하면, 이 요시야를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유일한 임금이었다’라고 평가했다는 점입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5
여기까지만 보면,
‘아! 요시야는 말씀대로 살았던 멋진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순종의 사람’이 아니라, ‘복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는 3가지 법전이 있습니다.
출20:19-23:19이 ‘계약법전’으로 있었고,
레17:1-26:46이 ‘성결법전’으로 있었으며,
신12:1-25:16이 ‘신명기법전’으로 있었습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출애굽기의 계약법전이 제일 오래되었고,
그 다음으로 신명기법전이고, 마지막으로 성결법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에서 요시야가 발견한 ‘율법’은 바로 신명기법전이었습니다.
즉,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법대로 요시야는 가감없이 그대로 지켰다는 것입니다(신6:5, 왕하23:25).
그렇다면, 신명기에서는 무엇을 강조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핵심은 바로,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려라’입니다.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신 12:12
이 명령에 따라서 요시야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곳의 예배당의 문을 닫게 합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것 같지만, 사회적으로는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말로 쉽게 말해서, 서울의 중앙에 있는 교회만 허락되고,
그 외의 모든 지역의 교회는 허락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전국의 목사님들은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왕하 23:9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산당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단에 올라가지 못하고,
다만 그 형제 중에서 무교병을 먹을 뿐이었더라. 왕하23:9
이러한 모습(인격적 교제가 없는, 말씀의 문자적 무식한 적용)은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바른 인격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때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오해할 때 생기는 인간의 잘못된 종교의식의 한 형태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식한 ‘복종의 사람’입니다.
‘순종’과 ‘복종’은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종’은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복종’은 권위에 굴복하여 무조건적으로 명령을 좇는 것을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요시야는 ‘복종’이 좋은 신앙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즉, ‘앞뒤 따지지 않고 무식하게 말씀 그대로 행하는 것’이 좋은 신앙인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교제가 목적인데, 그 본질을 상실하고 무조건 외적 규율 준수에 매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스라엘에는 3가지 법전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대 상황에 맞추어서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사랑하시는 ‘그 방식’은 시대를 따라서 변하심을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법전인 출애굽기의 계약법전의 명령을
‘글자 그대로’ 지키지 않고, 약간 변형시켜 시대상황에 맞춰 적용하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지킴'보다, 그 지킴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쌓는데, 그 본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가 실수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의 좋고 나쁨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고 제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줄 알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족쇄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일당들을 ‘거짓되다’고 평가합니다(렘8:8).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발견된 신명기법전)’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렘8:8
이렇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없이,
무작정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다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하야 할지니라. 마23:23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답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적인 교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종’의 차원을 뜻합니다.
‘복종의 신앙’은, 삶을 의미 없게 만드는 사단의 전략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게 합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맹목적 복종
▶2. 여호야김 왕 - 하나님 말씀을 불태운 자
두 번째로 소개드릴 왕은 여호야김입니다.
이 사람은 추운 겨울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웠던 한 가지 사건만으로 충분합니다(렘 36장).
이 사람은 말씀 자체를 무시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말씀에 ‘복종’하기는 커녕, 말씀을 ‘복종’시킨 사람이 바로 여호야김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여호와의 저주는 당연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밖에 던지우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렘22:18~19
▶3. 시드기야 왕 - 흔들리는 갈대
렘1:1~3절 본문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왕은 시드기야입니다.
시드기야는, 한마디로 말하면 ‘흔들리는 갈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야김이 죽임을 당하자,
백성은 ‘여호야긴’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옹립합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이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가고(왕하 24:15),
빈자리에 ‘시드기야’를 심어놓았던 것입니다(왕하 24:17).
시드기야가 왕이긴 한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이라는 왕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시드기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렘 38:5).
포로로 잡혀갔던 예언자들도
여호야긴이 다시 유다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거짓 예언하기도 했습니다(렘 28:4).
백성들에게 있어서 시드기야는 ‘굴러온 돌’이었습니다.
그러니 시드기야의 왕위는 바늘방석임에 틀림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 모든 일들이 여호와의 섭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시드기야를 오히려 격려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드기야가
여호와의 율법을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좋은 왕이 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렘23:5-6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하사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컫음을 받으리라. 렘23:5~6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1차적인 의미는 ‘시드기야’를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이중 의미의 예언)
왜냐하면 렘22장에서 시드기야 이전의 왕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어지는 23장은 자연스럽게 ‘시드기야’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원래 성서에는 장과 절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의 이름의 뜻이 바로, ‘시드기’(우리의 의)와 ‘야’(여호와)의 합성어입니다.
즉, 시드기야가 바로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와 매우 각별한 사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렘37:17, 38:14).
그래서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기존의 왕들이 아무도 실천하지 않았던
동족 유대인을 노예 삼았던 일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도록 합니다.
그것이 바로, 렘34장의 노예해방입니다.
다윗왕을 포함해서, 요시야 왕까지, 율법에는 나와 있으나, 그 어떤 왕도 실천하지 않았던
여호와의 사랑의 핵심인 ‘동족 노예해방’을 예레미야는 부탁했던 것입니다(렘34:14).
렘34장에 보면, 시드기야는 유대인 동족을 노예 삼았던 것을 해방하라는..
율법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번복합니다. (노예를 해방시켰다가, 다시 노예로 삼음)
왜냐하면 시드기야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나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좋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렘 34:19).
이것이 시드기야의 한계였습니다.
말씀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말씀을 무작정 복종하는 로봇도 아니었지만,
그는 말씀과 사람들 사이에서 ‘흔들리는 갈대’였을 뿐입니다.
사실, 거의 모든 신앙인들의 모습이 ‘흔들리는 갈대’입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갈1:10):
“내가 사람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데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시드기야는 그 대가를 치르기를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마치는 말
남유다의 멸망직전 세 왕이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말씀’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렘1:1~3절의 ‘예레미야서의 서두’는
남유다의 멸망직전 40년을, 출애굽 포로40년과 연관시킵니다.
즉 두 시기 다 율법에 불순종했다는 것이지요.
예레미야 시대에 마지막 세 왕들이
어떻게 율법에 불순종했는지, 위에서 대략 살펴보았습니다.
요시야는 말씀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의 기초는 ‘인격적인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문자적 맹종 이전에
주님과의 끊임없는 사귐의 관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야김은 말씀을 자기에게 복종시킨 신앙의 패역자로 나타납니다.
이는 마치 가롯 유다를 상상하게 하며, 그는 정말 유다처럼 처절한 죽음으로 끝납니다.
시드기야는 갈대처럼 오락가락하며,
환경을 이기지 못하는 신앙인의 나약함을 보여줍니다.
이것 역시 우리의 모습일 수 있기에,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인생의 길을 살아가야 할까요?
지금 우리는 말씀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나요?
......................
주1)
사실, 시드기야 11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있었습니다.
우리는 렘40:7~44:30절을 통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함락 이후 애굽에 내려간 과정)
물론 함락 후에도, 즉 40년이 지난 후에도, 예레미야가 계속 예언했지만,
그것은 보너스 사역이고,
그의 주된 예언자 임무 수행은, 함락까지, 40년이었습니다.
주2)
유다왕국 멸망직전 40년 기간에는 3명의 왕이 아니라, 사실 5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요시야, 여호야김, 시드기야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 ‘여호아하스(혹은 살룸)’와 ‘여호야긴(고니야)’이라는 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왕은 제위기간이 똑같이 3달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쨌든 예레미야서 서두에, 이 두 왕에 대한 언급은 빠져있습니다. ▣ 선지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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