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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경고한 거짓 신앙 2 2539

LNCK 2010. 7. 7. 09:05

예레미야가 경고한 거짓 신앙 2         렘5:30~31                                   10.04.11.설교일부녹취 46‘~60’

                                                                                       *원제목 : 예배회복(16)기복신앙과 예배회복

 

*예레미야서 전반부의 개요를 잘 설명해 주는 설교입니다.

 예레미야서가 너무 길고 방대해서, 그 주제를 찾기 어려웠는데, 그 전반부가 이런 내용인가 봅니다.

 

 

◑성경의 양면을 다 전해야 하는데, 일면만 전하니까.. 거짓이다.


▲간단 복습 : 당시 사람들이 거짓 메시지를 전했던 이유


①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마음이 완악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 .. 이렇게 선포해야 하는데,

항상 ‘평안하리라, 심판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으리라’ 하고 긍정적으로 전했으니,

그들의 메시지는 거짓이었다.↙


렘23: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②앞서, 그들이 거짓 메시지를 전한 이유를,

성경(다윗 언약)에 근거해서 그랬고, 그것은 성경의 일면만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성경에는 축복의 메시지가 있는 반면, 심판의 메시지도 동시에 나와 있다.

-축복장으로 유명한 신28장도, 전반부엔 축복의 메시지가, 후반부엔 저주의 메시지가 나온다.

저주의 메시지가 서너 배로 더 길고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축복보다 저주를 더 강조한 것일까?


-신30:19절에, 내가 생명사망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이렇게 복과 저주의 양면을 다 보여주는 구절이 성경에 너무 많다.

그런데도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메시지가 거짓이었던 이유는,

항상 복(평강)만 집어서, 편향적으로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그러면 오늘날, 축복과 저주의 메시지를 균형있게 전하면서

   '축복과 성공의 메시지'를 전해도 된다는 말인가? - 아니다.

   구약의 물질적 축복의 메시지는 - 신약에서 복음의 축복, 하나님 나라의 축복으로 개념이 바뀌었다.

   그리고 복음의 축복이 물질적 축복과 비교할 수 없이 큰 복이다.

   그런 것을 무시하고, '구약적 물질의 축복'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 특히 신약의 복음을 곡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도.. 무조건 복만 주는 장소가 아니었다.


①대하7:16절에는 ‘내 마음과 내 눈이 항상 그 성전에 있으리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이 먼저 요구하신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10:12~13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마음과 그 눈이 항상 그 성전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성전만 출입하면 복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성전만 출입하면 복을 받는 것처럼.. 거짓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외면하고, 겉형식만 강조한 것이며,

성경의 양면을 다 보지 못하고, 한 면(축복)만 보고 전한, 거짓 메시지였다.


②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그것은 축복과 저주의 양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


그러므로 예레미야 당시에

그들의 메시지가 ‘거짓’이었던 것은.. 항상 축복의 일면만 전했기 때문이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축복)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저주)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왕상9:1~7


그러나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무엇이 신앙의 본질인줄 깨닫지 못했다.

그저 성전에서, 제사만 꼬박꼬박 드리고 있으면.. 다 복 받고, 잘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거짓 메신저(설교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설교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도 아니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전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자기 생각과, 자기 마음에 좋아 보이는 것을 전할 뿐이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렘23:21


▲거짓 메신저들은, 백성을 돌이키게 못했다.

결국 이런 거짓 메신저들의 결과는 한 마디로 이렇다.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못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렘23:22


그래서 제일 억울한 사람은,

교회에 10~30년 다녔지만, 자기 악한 길과 행위에서 전혀 돌이키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안을.. 맛보며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항상 ‘긍정적, 기복적, 현세적 성공’의 메시지만 들었기 때문에,

자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못했다.


그런 사람에게, 예레미야가 외친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지만 평강이 없도다’ 렘8:11

아무리 평강(축복)의 메시지를 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강(축복)이 없더라는 것이다.



◑기복신앙에 빠지면 사람들은 거짓 메시지를 좋아한다.


▲사람은 누구나, 귀에 듣기 좋은 말을.. 듣기 좋아한다.

종교지도자들이 ‘거짓’을 전한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었지만,

백성들도 ‘거짓’에 빠진 책임이 있었다.


백성들이, 그 거짓 메시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이 거짓 메시지를 계속 전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거짓)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렘5:30~31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렘8:5 

  

백성들이 거짓 메시지 듣기를 ‘고집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이비, 샤머니즘의 특징은, 꺼풀을 벗기고, 벗기고 나면,

결국은 ‘사람을 섬기는 종교’이다.


사람이 점을 보러 가고, 점을 봐 주지만.. 결국은 그 고객을 위한 점괘가 나온다.

신을 위한 신앙행위가 아니다.


사람이 어디 가서 ‘빌고 비나이다’ 하지만.. 결국은 자기를 위해 비는 것이다.

그 신을 위해 비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은, 사람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

사람 기분에 좋게 맞춰주지 않고, 하나님 기분에 좋게 맞춰주는 신앙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 기복신앙은,

   섬겨야할 하나님을.. 자기 목적(복 받음)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내 원하는 것을 이뤄달라’고, 무슨 사환처럼 부리고 있다.

   이것은 거짓 신앙이다.


예레미야 당시에 거짓 메신저들이 거짓 메시지를 전하고,

백성들이 그것을 듣기에 좋게 여긴 이유가,

그 신앙 중심에 ‘하나님’이 들어가 있지 않고, ‘사람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곤 했지만,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고,

결국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종교행위에, 그들은 몰두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다니지만

   -자기 자녀가 잘 되고

   -자기 사업과 직장이 잘 되고

   -자기 가족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그런 신자는,

   예레미야 시대에 ‘거짓을 좋아했던 백성’과 똑같은 것이다. 렘5:31, 8:5



▲앞서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도, 백성들은 ‘거짓 메시지’만 요구했다.

진리의 말씀보다는, 듣기 좋은 부드러운 말을 전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환상을 보지 말아라" 하며, 예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옳은 것을 보이지 말아라. 부드러운 말을 하여라. 거짓된 것을 보여라.  사30:10


앞서 이사야, 그 다음 예레미야 시대에

백성들이 거짓 메시지를 듣기 원하고,

메신저들이 거짓 메시지를 전하기 원하다가.. 결국은 그들은 망하고 말았다.


그들이 예배를 안 드린 것이 아니었다.

이사야서 1장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1:4~6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사1:1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그들은 제사를 안 드려서, 망한 것이 아니었다.

‘무수한 제물’을 드렸으나..

그것은 형식일 뿐이었고, 그들의 속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진정한 평강과 생명과 평안이 없었다.


이사야가, 자기 시대에 (예레미야처럼) 탄식한 것은,

사람들이 잘못 믿고 있으면서도, 뭐가 잘못된 것인지 이유를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장탄식을 하면서 이사야서의 메시지를 전했다. 특히1~39장.



▲‘거짓 메시지’는 ‘헛된 자만’을 동반한다.

 

렘23:3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헛된 자만은..

공동번역에는 ‘허풍’이라고 번역했고,

영어성경에는 ‘reckless lies ; 부주의한 거짓말’

또는 ‘lightness : 경박함’ 이라고 번역했다.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가 아니라,

자기 생각에서 지어낸 거짓 메시지(주로 축복과 긍정)는

대개의 경우, ‘허풍, 아무 생각 없는 거짓말, 경박함’을 동반하게 되어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거짓 메신저)를 내가 치리라...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렘23:32


그들이 아무리 평강을 외쳐도.. 실제로 평강이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예언’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었기 때문에.. 효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거짓 메시지를 좋아하는 것은

혹시 일순간 ‘마취 효과’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20년 전에 한 때, 이런 이야기가 돌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어느 목회자가 새로 개척을 시작하면서,

동기 목사 중에, 그래도 중소도시에서 가장 크게 목회한다는 목회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조언을 구했다.


그랬더니 제법 목회를 크게 한다는 그 목회자가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오늘부터 3년 동안, 주일 낮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 할 것 없이

모두 ‘축복의 메시지’만 전해!”


또한 20년 전에, 어느 기독교 잡지에 기고된 글에 보면,

어느 신학자가 수도권 지역에서 크게 성장한 교회들을 여러 곳 탐방하였는데,

대부분 공통점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을, 글로 기고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반드시 예외가 있으며, 또한 20년 전의 과거 이야기다.

과거에 한 때 우리가 그랬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레미야 시대를 살았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다 보면

   하나님의 임재, 교제, 생명력이 점점 떠나가게 된다.

   그래서 건물은 남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버리는

   비참한 교회가 되고 만다.



▲혹시 <제5복음서>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가장 축복된 메시지, 가장 듣기 좋은 말씀,

복 받는다는 말씀만 따로 모아서, 새롭게 편집한 성경이

4복음서 다음에 나오는 ‘제5복음서’라는 말이다.


누가 지어낸 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말이 회자되는 것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축복의 메시지가 있고, 또한 저주의 메시지가 있는데,

신약적 표현으로는 복음의 메시지가 있고, 심판의 메시지가 있는데,

이 둘 중에서

‘현세적 축복’ 메시지만 따로 뽑아서 전하는 것은,


... 문제는 교회가 ‘생명력’을 잃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의 삶이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 퇴보 안 하면 그나마 다행이 된다.

    결국에는..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다 갖추고도, 알맹이가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후략) 

 

<이상 여주봉 목사님 설교 말씀 정리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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