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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깊은 묵상

LNCK 2010. 7. 12. 04:55

◈보다 깊은 묵상                           요15:13~15                      여러 조각글 스크랩

 


◑상대를 종으로 만드는 사랑, 혹은 친구로 만드는 사랑

 

언젠가 한 분과 대화를 하는 중에

그분이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는 말에

제가 거부감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뉘우치는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도.

‘베풀다’는 말이 상당히 시혜적(자기가 은혜를 나누어주는)으로 들렸습니다.

 

자기가 상당히 높은 사람의 위치에서

자기 재량으로 사랑을 줘도 되고/ 안 줘도 되는데

선심을 써서 줄려고 했는데

자기가 바빠서 미처 주지 못했다.. 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제 귀에 약간 거슬리면서도 

   큰 소리 칠 수 없는것은 

   저 또한 많은 경우에 '시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을 위해 일을 할 때에도

   제가 시혜적인 태도를 취할까봐 매우 신경이 쓰입니다.

 

   '너희는 얻어먹으면서도 어찌 그리 배짱이냐!

   또 한 번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는 북한 구호활동을 때려 칠거야!'

   말은 안 해도 만일 이런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시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내 사랑>을 큰 희생으로 주는 것이라면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지만,

우리가 베푸는 사랑은, 내 것이 아니라

나누라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심부름꾼인 셈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심부름을 하면서도, 마치 자기가 주인인체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시혜를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 취급 당하는 느낌'을 갖게 하기가 쉬운데요...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친구를 대하시듯 하는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형제)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요15:13~1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사랑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만드신 사랑입니다.

누구를 비참하고 비굴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군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사랑이라면

사랑 받는 이로 하여금 자존감을 갖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황송하게도 발 닦임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우러러 나오는 마음으로 형제의 발을 닦는 마음으로 섬길 때

우리는 예수님 사랑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 사랑은

으스대는 사랑,

칭송과 감사를 대가로 요구하는 사랑,

그러지 않으면 포기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내가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사랑,

받은 사랑이 하도 많아 넘치는 사랑,

사랑할 수 있음에 대한 감사의 사랑,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사랑,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계명의 사랑입니다.

 

 

 

 

 

◑믿음은.. 내 삶에 작용하는 것 

 

‘네스 호의 괴물을 믿느냐?’고 묻는 것은,

네스 호lake에, 공룡 같은 거대한 괴물이 숨어 살고 있어서

가끔씩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는 사실

여러분이 믿는 지를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예’일수도 있고 ‘아니오’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괴물의 존재를 믿거나, 혹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믿음’이란 단지 지적인 문제입니다. 사실fact을 믿는 믿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아스피린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여러분이, 고통을 경감시키는 약인 아스피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을 전제하고 묻는 것입니다.

   제가 묻는 바의 진의는 "여러분에게 두통이 발생할 경우, 아스피린을 복용하면

   그 약효가 작용한다는 것을 정말 믿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믿음은, 단순히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 두 번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속에 형성되어야 할 믿음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가 존재하며,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fact을 믿는 차원을 넘어서,

그 분을 믿는 믿음이 ‘내 삶에 역사’을 일으키도록 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번째 종류의 믿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토대 위에서 두 번째 종류의 믿음을 가짐으로써

죄의 지배에서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진짜 내 삶에 역사하시게 해야 합니다.

 

 

◑사랑과 공의.. 이것을 서로 모순적 명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판사가 법집행을 공의롭게 해야 하지만,

판사가 일반 죄인들을 보는 눈과,

법정에선 자기 아들을 보는 눈은.. 엄연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공의로운 법정에서

‘일반 죄인들’을 쳐다보는 눈이 아니라

‘자기 아들들’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서로 모순된 명제로서,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집행하면, 다른 하나를 희생시켜야 하는 논리가 아니라)

둘은 항상 같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높이 나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합니다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사 린드버그는 말년에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젊은 시절을 함께했던 그 비행기가 몹시 보고 싶어

비행기를 기증한 박물관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박물관장은 그를 위해 특별히 다시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몇 십 년 만에 다시 비행기에 오른 린드버그는

감격에 벅차 소감을 묻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비행기라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도계도·유량계도, 기타 어떤 안전장치 하나도 없는 그저 엔진과 프로펠러,

그리고 몸을 실을 의자가 전부인 탈 것에 불과하군요.

어떻게 이것을 탈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린드버그가 그 초라한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하게 한 것은

훌륭한 비행기도, 어떤 안전장치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데 필요한 장치 이외의 것은 모두 떼어내고

최대한 가볍게 만든 비행기, 먹을 것조차도 싣지 않은 비행기였기에

당시에 그런 초유의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편안한 땅을 박차고 오르게 했던 젊은 도전정신이

그를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높이나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립니다.

 

   심지어 뼈 속까지 비워야 (骨空) 합니다.

   무심히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가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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