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독신 1 고전 7:1~7 출처 ▣ 행복한 가정
고전7장부터 주제가 결혼, 이혼, 독신 등입니다.
너무 한 주제마다 다룰 내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결혼의 문제만 다루겠습니다.
독신, 이혼은 다음 시간에 다룹니다.
▲고전 7:1~7을 보시면, 우리는 일반 독자이다 보니
아무래도 성경에 원어로된 헬라어를 직접 대하지 않습니다.
또 헬라어를 배운 적도 없고요. 그래서 원 뜻을 이해하기가 한계가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 원문은 특징이 주어 동사가 순서가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특별히 인용부호(따옴표)가 없습니다.
영어나 우리 말에는 따옴표가 있어요. 누가 말한 것을 인용할 때 쓰죠.
그런데 헬라어에는 인용부호가 없어요.
그래서 후대에서 원전을 학자들이 대할 때, 해석에 혼선이 많이 생깁니다.
누가 한 말인지 몰라서 그렇죠.
그런 혼선이 본문 고전7장에도 나옵니다.
◑고린도교회의 결혼에 대한 양극단적 주장
▲고전7: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고전7~16장은 사실 어떤 유형의 글들인가 하면,
이 편지에 앞서서 고린도교인들이
교회 설립자인 사도바울에게
자기들끼리 심각한 논쟁거리가 된
그래서 그것이 교회에 상당한 문제가 되어있는
어떤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한 질의서를 던진 것입니다.
‘바울사도님, 이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거의가 질문을 위해서 질문을 했다기 보다는
자기네들이 의견이 나눠져서 한 쪽은 이걸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걸 주장하다가
각자가 자기들의 주장에 대한 어떤 정당성을 확인받고 싶거나
또는 그것이 옳다 라는 것을 의로운 차원에서 드러내기 위해서
질의를 던진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본문을 봐야 되는데
7~16장까지는 전부 그런 질문에 대한 사도바울 나름대로의
순서를 따라서 답변을 쓴 편지 형식입니다.
그래서 시작이 이렇게 되죠.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자 또 25절을 보면
‘처녀에 대하여는’
이런 주제도 이들에게는 상당히 나름대로 편이 갈라져서
심각한 이슈가 되었던 문제입니다.
8:1에도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전부 이런 투죠.
12:1에도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같은 패턴입니다.
16:1에도 ‘성도를 위하여 연보에 관하여는’
헌금 문제로 시비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7장부터 전부 사도바울에게
교인들이 이슈가 되어 편이 갈라져 격렬하게 논쟁하던
논쟁의 주제들을 질문한 것을
사도바울이 나름대로 순서에 따라서
거기에 대한 답변을 서신으로 쓴 것입니다.
그런데 7:1절,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
얼핏 우리 말을 보면, 사도바울이 자기 견해를 얘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실 인용부호가 빠져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 말은, 1) 사도바울의 견해입니까?
아니면 2) 그들이 질의할 때 주장한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까?
답은 2)입니다.
즉 이 말은 고린도 성도들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 원문에 인용부호가 없으니까
그 당시 문법에는 인용부호 자체가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후대 학자들이 1절을 해석하면서
사도바울의 견해로 오해한 적이 한 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사도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을 금했다.. 이렇게 해석을 밀어부쳤어요.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해석학 적인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 뜻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이제 질문을 받고, 그들의 말한 내용을 인용하면서
‘너희가 이렇게 말했지만..’ 하면서 자기 답변을 이어가는 갑니다.
그러니까 1절은 사도바울의 견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일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느냐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옳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이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이해를 갖고서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고린도전서 강해를 하면서, 한 주도 빼놓지 않고 매 시간 강조한 것은
‘헬레니즘에 근거한 영지주의,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은 영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논리입니다.
영은 깨끗한 것이고, 육은 악하고 더러운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에서 양극단적 견해가 나왔습니다.
하나는, 영만 깨끗하게 잘 관리하면 된다.
그리고 육이 죄짓는 것은 아무렴 문제 없다.
그건 진정한 자기가 아니니까!
이렇게 영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아주 편리한 방식이죠.
이런 견해는, 육이 죄짓고 방종하는 형태가 나타나기 쉽습니다.
이것이 음행이라는 문제로, 교회 안에까지 이 분위기가 물밀 듯 밀려와서
‘심지어는 너희에게 음행이 있다는 말을 내가 들었는데’
이렇게 교회 내에서도 방탕의 분위기가 일부 있었습니다.
또 한 편에는 다른 극단으로 금욕주의가 발생했습니다.
육은 악하고 더럽다. 그러면 이것을 대처하는 방법은
육을 쳐서 금욕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소위 열심 있다는 그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성령파 쪽에서
발생했던 또 하나의 극단입니다.
그래서 금욕을 강조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내용으로 교인들을 힘들게 만들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이상은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결혼을 했더라도 이혼을 하던지
아니면 이혼을 못 하겠으면, 일절 부부관계를 갖지 말라!
이런 논리가 실제로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1절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7: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금욕파)의 견해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 하겠다.. 고 바울이 말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린도교회 안에 금욕주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앞에서는 음행이라는 방탕주의가 문제가 되었다면,
이제 7장에는 그 반대 극단으로 금욕적 부류의 성도들에 대해
지금 말씀하는 겁니다.
7: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Touch 아니함이 좋으나’
여기서 ‘터치’ 라는 말을 썼어요.
그 말은 그대로 직역하면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입니다.
이것은 일반 남자와 일반 여자에게 한 말이 아니라
더더욱 부부에게 한 애기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이 그런 식의 논리를 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입시키고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혼을 하든지, 그게 싫으면 일절 건드리지 마라’
는 식의 잘못된 금욕주의를, (헬라 영향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은
영어성경에는 터치하지 말라, 원문에는 ‘관계를 맺지 말라’로 나옵니다.
이 말은, 금욕주의 자들에 대한 사도바울의 입장을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이제 입장 정리를 해 준 겁니다.
▲7: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이 구절을 보면서, 이런 오해를 가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결혼은 그저 음란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2절은, 결혼의 목적이 단순히 부도덕한 음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라는데 이 구절의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물론 결혼이라는 다양한 얼굴속에는 그런 측면도 한 가지로 포함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결혼이란 음행을 방지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라고
이해해버리면, 결혼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시 고린도교회의 특수한 금욕주의자들에 대한 상황 때문에
사도바울이 2절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면 2절의 본래 뜻은
정확하게 일부일처제를 성경이 강조한 겁니다.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두거나
한 여자가 여러 남편을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결혼 제도를 설립하실 때부터
시작된 중요한 기본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 결혼이라는 얼굴은 매우 다양하고 풍성한 얼굴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의 얼굴이 ‘피차 부도덕한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
한 아내를 두고, 한 남편을 두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는 결혼에 대해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오늘은 우리가 에베소서를 중심으로
대체 하나님은 왜 이 땅에 결혼이라는 제도를 허락하셨는가..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흙으로 아담을 만드셨어요.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어요.
그리고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에
여자를, 아담의 갈비를 취해서 만드셨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업을 하나 하셨는데
각종 짐승들을 아담에게 데려오셨습니다.
아담이 하나 하나를 보더니 ‘이건 곰, 저건 사자..’ 이름을 붙입니다.
히브리 개념에 이름을 준다는 말은, 단순히 작명이 아니라
그 속성과 의미를 꿰뚫어 본다, 그 가치를 꿰뚫어본다.. 그 말입니다.
그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속에 성경이 기록하기를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그러면 하나님이 단순히 아담에게 짐승 이름 어떻게 짓나 보시려고
데려오신 걸까요?
아니면 어떤 필요를 일으키기 위해서 짐승들을 데려오신 걸까요?
돕는 배필의 필요를 위해서 짐승을 데려오신 것입니다.
보니까 다 암수 짝이 있었어요.
그 중에는 아담에는 격이 맞는 배필이 없더라는 겁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옳지 못하니(좋지 못하니)’
그제야 하나님은 하와를 데려오십니다.
자기 몸에서 취한 그 여자를 데려다 주십니다.
그 여자를 보자마자 아담이 ‘시 중의 시요 노래 중의 노래’인
유명한 고백을 터트립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 말은 정확하게 이런 뜻입니다.
‘딱 보니까 유일하게 격이 나하고 같고, 보니까 나이구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딱 보니까 자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빚으사..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단수로 썼어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되었어요.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인 신부가
어떻게 결합되고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인가를
이미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엡5장을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 당시는
우리나라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할 때보다 더 여성을 무시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여자들이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그런데 1세기 때는 더했습니다.
일절 여자는 남자를 택할 권리가 없었어요. 그냥 버려졌어요.
신명기서 모세율법에 ‘이혼증서를 주라’는 말은
이혼을 허락한 말이 아니라, 못된 남자들이 별별 흠과 트집을 잡아서
여자를 버렸습니다. 내쳤습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법을 하나 더 만든 것입니다.
원 뜻이, 이혼을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걸 문자적으로만 보면, 마치 이혼을 허락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걸 예수님 시대에 바로 잡아주시죠.
성문법에 그 원래 뜻이 무엇인지를 나중에 예수님이 바로잡아 주십니다.
성경을 보시면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여기 잘 보시면, 남자에게도 아내를 복종, 사랑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피차 복종입니다.
결혼의 제도가 왜 중요한가요?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위 구절은, 이상하게 부부관계에 주된 목적지를 행복으로 말하지 않고
거룩으로 설명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세상의 일반 가정은
가정의 가장 숭고한 가치를 어디서 찾으려 하는가 하면
‘행복’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위 구절은 가정에 가장 핵심 가치, 기초는
즉 부부관계의 목적지를 ‘거룩’으로 설명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를 들어보십시오. ↓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위 구절은, 아내가 바로 자기 자신이랍니다.
아담이 고백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과 같습니다.
이 부부관계를 통해 계속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이 서신을 통해서
뭘 강조하는가 하면↓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여기 그리스도와 교회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부부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깨닫고 배워야 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 그림’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래서 몸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가 나오는데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여기서 자기 육체는 자기 몸임과 동시에, 자기 배우자를 가리킵니다.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니까요.
누가 그렇게 사랑했나요?
예수님이 교회를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첼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결국 이 부부간 상호간의 의무, 책임, 사랑의 문제가
엡5장을 보니까 어디로 결론이 나느냐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 이야기’로 결론 납니다.
그러니까 이 부부관계는 단순한 기초관계가 아닙니다.
부부관계를 통해서 뭘 배우느냐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교회공동체의 가치를 이해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부부관계를 ‘사랑이 식어지면 헤어진다’ 그럽니다.
뭐가 만족하지 못하면 성격차이 때문에 헤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뭘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냐면
결혼이란 관계가 ‘법적인 계약’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저도 매주 거의 주례를 하고 있는데
결혼식 순서 속에 반드시 서약식이 들어갑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이 계약은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맺은 계약을 연습하는 관계가
그 부부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훈련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살면, 신기한 게 뭐냐면
제일 가까운 내 몸인데, 제일 갈등이 많고 제일 다툼이 많아요.
왜 그럴까요?
타락한 본성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들켜가면서
구주의 은혜를 사모하고 소망하며 배우게 됩니다.
무슨 관계를 통해서? 부부관계를 통해서!
그러니까 부부관계는 늘 싸움과 갈등의 연속이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묶어놓았느냐,
그렇게 싸움과 갈등의 연속을 극복함으로써
‘오 참 신랑이신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 분을 소망하는 발판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역설이긴 하지만요!
그래서 배우자에게 진저리르 내가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의 나라를 더 강렬하게 사모하는 겁니다.
서로가 미숙할 때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성숙하면 그 관계를 오히려 누리죠.
그러니 아직 미혼, 싱글은 그 각오로 결혼을 기도하셔야 돼요.
영국에서는 결혼식을 할 때 목사가 주례를 하는데
서약이 끝나면 반드시 청중과 회중에게 질문을 하나 합니다.
‘누구든지 이 중에 이 결혼에 이의가 있습니까?’라고 물어요.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청중이 동의해야 그 결혼이 성립됩니다.
왜 그럴까요?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문화와 세상 가치에 속아서
행복하지 않으면 결혼을 깨겠다 그러고
사랑이 식으면 그 서약을 깨겠다고 하고
성격이 안 맞는다고 깨겠다고 합니다.
그건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더 이상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 관계를 배우기 싫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관계는 그만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이해하고 깨달아가는
중요한 은총의 현장입니다.
신기하게 그 은총은 갈등과 견딤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다시 고전7장으로 가서 봅니다.
▲7: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남편은 아내에 ‘의무’를 다하고..
거기 ‘의무’에 ‘1’이라고 각주가 나옵니다.
그래서 각주를 보면 ‘갚고’라고 나오는데
‘빚을 갚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개념으로 3절을 다시 읽어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하여 빚을 갚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빚을 갚을지라’
▲7: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이것 그 당시 당연한 얘기였습니다.
놀랍게도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아까도 잠깐 언급했지만, 1세기 때는
여자의 지위가 아주 낮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은, 당시 시대 정황으로 볼 때
아주 혁명에 가까운 그런 발언을 한 것입니다.
마치 비유하자면 ‘축도란 목사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발언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건 당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납득 안 가는 내용입니다.
‘아니, 남자가 여자를 주장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여자도 남자를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
바울은 남녀상호간 동등 지위, 동등 가치를 말씀하는 겁니다.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합동)교단은 아직도 여성들에게 목사안수를 안 줍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빚을 갚는다’는 은유적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3절은 정확히 부부관계를 얘기합니다.
부부의 성적인 관계를 얘기합니다.
사도바울이 일부러 이것을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강조했을까요?
금욕주의자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그것을 고치고자 한 것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이 ‘부부일지라도 관계를 갖지 말거나 헤어져라’
이렇게 고린도교회 안에서 방탕의 반대쪽 극단인 금욕주의자들에 대해
보란 듯이 얘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참 맹랑한 게
인간은 종교적 열심을 가지다보면 이상하게 한 내면의 일부가
이런 금욕주의적 성향을 누구나 갖고 있거나
그 쪽으로 가게 됩니다.
종교가 늘 열심이 과장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말씀을 배울 때에도 생각하면서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이 맹신이 되는 이유는
청년들이 ‘검색’만 하고, ‘사색’이 없습니다.
청년들은 다 검색은 잘 합니다. 검색의 귀재들입니다.
금방 찾아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묵상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좀 사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올 때는 꼭 성경책과 뇌를 챙겨가지고 오세요. 하하하.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이 말씀의 또 다른 뜻은
모든 육체적인 관계는, 부부만 합법적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표준입니다.
다른 사람이 주장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 PCUSA 장로교단이 있습니다.
그 교단이 수년째 총회에다 결혼법에 대해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행해지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로서’
라는 문구를 어떻게 바꾸려 하느냐면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하나님의 질서로서’ 문구를 바꾸려는
헌의를 매년 총회에 상정하는 겁니다.
동성결혼을 합법화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매면 캔슬이 되었지만 시간 문제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안에도 쓰나미처럼 밀려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총회 교단이 헌법을 그렇게 바꾼다고
그게 바꿔지는 문제입니까?
총회 헌법이 우선입니까, 성경이 우선입니까?
나라 법이 바뀌고 총회 법이 바뀌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4천만이 예스 해도, 성경이 노 하면.. 혼자 왕따가 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류보편적 가치입니다.
성경은 어느 한 특정 집단에만 적용되는 논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운영하기 위해서
성경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필두로 하죠.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이것은 정확히 일부일처제를 얘기하면서
동시에 남자와 여자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동성애가 아닙니다.
동성애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설교의 메인 주제는 아니라서 좀 비껴갑니다.
나중에 허심탄회하게 노골적으로 얘기할 시간이 있을 겁니다.
여기서 단 한 줄로 정리하고 넘어가자면
‘사람 자체를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구분해야 됩니다.
그도 구원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돌아와야 할 양으로 대해야지
사람 자체를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금하신 그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회복해야 되고, 고쳐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가르치고 전해야 됩니다.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분방에 대한
사도바울의 지적입니다.
이 내용은 ‘원리’로 제시한 게 아닙니다.
애당초 이런 문제 제기는 금욕주의자들이 헀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백 번 양보해서
정 기도해야 될 이유 때문에
그런 필요성이 절실하다면
전제가 하나 있어요 ‘합의 하에’
‘합의’라는 말의 헬라어에서 나온 말이 ‘심포니’입니다.
심포니는 ‘조화롭게 어울려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sym+phony
부부는 하나의 심포니입니다.
이것은 누구 한 쪽이 일방적으로 강요할 문제가 아니고
아내와 남편이 합의한 전제 아래
한정적으로 분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자세히 6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7: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명령은 아니라’는 말은, 성경적 원리가 아니라
개인적 권고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만큼 분방을 강력히 금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남편이 반대하고 가정이 파탄이 난다면,
보따리 싸서 함부로 기도원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의 하에’가 중요합니다. :5
남편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마세요!
아내가 원치 않으면 (분방, 별거)하지 마세요!
왜냐면 부부가 생리상 떨어져서 오래 있다 보면
사탄이 틈타기 쉽습니다.
사탄이 그것만큼 좋은 먹잇감이 없다고 노립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부부는 싸워도 한 침대를 쓰고
아주 작은 방을 안방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아예 결혼할 때 그렇게 하기로 서로 약속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떡 먹듯이 부부가 분방합니다. 따로 잡니다.
아예 기러기 아빠들도 있습니다.
기러기 아빠가 퇴근했는데 맞이해주는 사람도 없고,
컴컴한데서 혼자 밥 먹고..
자녀 양육도 좋지만, 이게 사람의 피를 말리게 합니다.
그러면 별 나쁜 생각들이 다 밀려 들어옵니다.
‘이게 사는 건가?’하며 별의별 생각이 다 생깁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세종시에
부활절 기념예배를 인도하러 다녀왔습니다.
거기 세종시 공무원들이 아주 힘들어 하더라고요.
1/3은 서울에서 출퇴근
1/3은 원룸 얻어서 독수공방
1/3은 가족들이 다 내려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무원들이 정부청사를 나가면 허허벌판 *과거 상황
그런데 도시 인프라가 아직 다 갖춰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살기 힘들어 하시더라고요.
지금 어쩔 수 없이 분방하게 된 분들의 고충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도 가급적 분방하지 않고, 온 가족이 다 함께 사는 것이 제일 성경적이고
그게 본인에게도 가장 안정적입니다.
▲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자 이제 여기 우리가 성경을 몇 번 정도 읽고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한 분이라면
누구나 평소에 가졌던 궁금증 하나가 여기 의도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모태 싱글이었나, 돌싱(돌아온 싱글)이었나?’
여기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사도바울은 모태싱글이었다. 한 번도 결혼 안 했다.
2) 결혼했는데, 나중에 혼자가 되었다. 소위 돌싱
사별인 경우
3) 돌싱으로서 이혼한 경우
사도바울은 모태솔로는 아니었을 겁니다.
왜냐면 랍비는 모태솔로는 랍비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일단 결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글들을 보더라도 결혼한 경험이 엿보입니다.
그런데 7절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럼 그는 이혼을 했을까요, 상처(처를 잃음)를 했을까요?
대표적 두 학자의 견해를 소개해 드립니다.
1) 헬라어 원전에 가장 탁월한 학자가 요아킴 예레미아스입니다.
그는 바울에 대해 ‘아내가 죽었을 것이다’ .. 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2) 그런데 세계적인 신약신학자인 F. F. 부루스는
‘사도바울은 이혼을 당한 사람일 것이다’ 라고 해석합니다.
자기가 이혼을 청구한 사람이 아니라, 당한 것으로 봅니다.
거의가 많은 신학자들은 2)를 지지합니다.
그 근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이 원래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요, 유대주의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괴롭힌 정도가 아니라 감옥에 넣고 죽이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국경도시인 다메섹까지 좇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그 언덕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후 인생이 바뀌게 되죠.
그때부터 예수님의 사도요, 제자가 됩니다.
아마 이때 충격받은 가족들이 특별히 아내가 그를 떠났을 것이다..
이게 요즘 학자들간의 타당한 견해입니다. 저도 2)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뭐냐면, 사도바울이 여기서 무슨 얘길하느냐면
7:24절에 보면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그대로 지내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결혼을 하는 게 맞느냐, 독신으로 지내는 게 맞느냐
이건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부르심을 받은대로 그대로 지내는 게 좋다..
그 말은 어떤 형태가 더 중요한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혼이 갖는 의미
독신의 은사를 가진 자들의 의미가
각각 고유하게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이 낫다/못하다의 우열의 개념이 아닙니다.
다음시간에는 독신의 문제에 대해서
실제적인 이름을 거론하면서
말씀을 나룰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연습하고
그 은혜를 구할 수 있는 현장이 부부사이요, 가정입니다.
부부는 영적인 관계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도
서로에게 대한 아름다운 사랑과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관계가
부부관계인 것을 기억하며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이 소중한 가치와 소중한 명령을
우리 청년들은 가장 높은 고상한 가치와 표준으로 지켜내고 순종할 수 있는
준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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