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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신 모습

LNCK 2010. 12. 24. 19:25

 

◈예수님이 오신 모습               시105:19                    편집자 글

 

 

예수님이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셨을 때,

정말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대책 없는 아기’ helpless infant로 오셨다는 것은

두고 두고 묵상해봐야 할 미스터리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대책 없는 아기’ 모습으로 무장시켜 보내신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주의 종으로 선뜻 자원하고 나서겠습니까?

 

    하나님이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시려 하실 때,

    군주를, 장군을, 대 학자를, 대 부호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책 없는 아기 helpless infant’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 왕조를 세우실 때도, 다윗을 택하실 때도,

군주를, 장군을, 대 학자를, 큰 재벌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동을 택하셨습니다. 거의 대책 없는 소년helpless boy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 모세를 택하실 때도 마찬가지로, 대책 없는 노인 helpless old man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을 택하심이나, 예수님을 택하여 보내심이나.. 너무 비슷한 정황입니다.

아무 대책 없는 사람을 택하여.. 주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을 봅니다.

 

그럼 왜 이런 무모한 방식을, 하나님은 선택하시나요?

 

그 이유는.. 제 생각에는..

그분의 구원 방식이 ‘군대를 통하여’가 아니어서.. 큰 군주나 용사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분의 구원 방식이 ‘지식이나 물질을 통하여’가 아니어서.. 당대의 유력한 사람들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 분의 구원 방식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고 죽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아마 ‘강한’ 사람일수록..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기도해서, 축복받아, 자신이 강해지기를 원합니다.

‘강함’으로 일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자기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합니다.

 

‘강함’의 힘으로는.. 외모를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사람의 내면을 바꾸지 못합니다.

‘약함’의 힘으로는.. 외모를 바꿀 수 없을지 모르나, 사람의 내면을 바꿀 것입니다.

자기가 희생하고 죽는 방식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감동과 충격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군주나 전쟁영웅에 의해 ‘만들어져’ 내려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사람의 성자에 의해서 ‘변화되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진정 가정, 사회, 나라, 역사를 바꾸는 힘은.. 사실은 ‘약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암흑시대 중세교회를 살린 힘은, 약하고 가난했던 성자 프란시스였고,

그것은 매 시대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은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김용기, 장기려 등 약하고 가난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는,

오히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었습니다.

 

날 때부터.. 여관주인이 도와주었고,

자라나실 때에는.. 육신의 부모에게 도움을 받았고,

공생애 때도.. 많은 여인들이 따라다니며 쓸 것을 도왔는가 하면,  눅8:3

베다니 촌의 나사로 가정은.. 예수님이 정기적으로 숙식 도움을 받으셨고,

돌아가신 후에도.. 요한에게 그 모친을 부탁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오해하면..

성도가 평생 남에게 ‘빈대’로 살아야 된다는 뜻이 됩니다만,

그런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냥 평생 겸손 humility과 낮아짐 lowliness으로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비굴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군림하고, 지배하고, 힘으로 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들은 성품의 연단이 필요합니다.

 

시105:19절에 보면,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요셉를 단련하였도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이 어려서 꿈을 꾼 그 비전들이, 실제로 현실이 될 때까지.. 란 뜻입니다.

그때까지 말씀이 요셉을 단련하였다... 요셉이 인격수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NLT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Until the time came to fulfill His word, the Lord tested Joseph's character. 

그 분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하나님은 요셉의 성품을 연단/시험하셨다...

 

요셉이 어릴 때, 꿈을 통해 말씀하신 그 예언들을 이루기까지,

요셉의 성품을 연단하셨다.. 는 말인데요,

 

‘요셉의 성품의 훈련이 끝나자.. 비로소 그 분의 말씀(요셉의 꿈)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성품이 훈련되기까지,

그 분의 말씀/꿈을 통한 비전이, 성취되기가 기다려졌다.. 는 뜻도 됩니다.

 

    요셉은, 총리라는 자기 지위로, 힘으로, 애굽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라면,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졌더라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동안 연단된 자기 성품을 통해서, 애굽을 다스렸습니다.

    보디발의 종으로, 또한 감옥에서 배운, humility와 lowliness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성품이고, 또한 다윗의 성품이죠.

 

    그래서 그는 성공적인 총리가 되었던 것이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자기 시대에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모세가, 힘으로 다스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품으로 다스린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칼로 일어났더라면.. 칼로 망했을 것입니다.

   

    돈도 마찬가집니다.

    돈으로 사역하는 사람은, 결국 돈으로 망합니다.

 

오늘날, 자꾸 뭐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자원들이 없어서’ 괴로운 분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이 성탄 시즌에,

물질이 넉넉지 못한 분들은, 더 자괴감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방식,

주님이 다윗을 택하시고, 요셉을 택하시고, 모세를 택하신 방식을 유의해 보십시오.

 

주님은 종종 당신의 종들을 ‘없게 만드셔서’

‘그 성품을 연단하시기’ 원하십니다.

 

그 성품의 연단이 일단락, 끝나는 날

주님이 당신에게 계획하신 일들이.. 요셉처럼..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입니다.

 

덧붙여서, 적어도 헛된 꿈은 제발 좀 깨주세요.

내가 뭘 많이 가진 후에.. 무슨 일을 하겠다는 발상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차라리 비즈니스를 시작하세요, 아니면 정계에 입문하시죠.’

 

 

*관련글 : 주께 피하는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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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있습니까?                                (펀 글)

 

어느 추운 겨울 날 성덕이 출중했던 프란치스코 보르지아가 여행 중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너무 늦은 시각에 머무르기로 약속한 수도원에 도착했답니다.

때마침 세찬 눈보라까지 몰아치니 이빨이 자동으로 딱딱 마주칠 정도였습니다.

 

너무 늦게 도착했기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보르지아는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누구 한사람 문을 열어주러 나오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수도원의 높은 담은 그의 목소리를 가로막았고,

아무리 수도원 주변을 뺑뺑 돌아 다녀봐도

철옹성 같은 수도원 담벼락으로 인해 내부로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보르지아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나긴 밤이 지나고 첫새벽이 되어서야, 문 앞에서 꽁꽁 얼어있던

보르지아를 발견한 수사들은 너무나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보르지아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한 평생 지난밤만큼 기쁘게 지낸 날도 없었습니다.

지난 밤 제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 높은 하늘에서 하느님이 눈송이를 하나씩 제게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길고 긴 밤을 얼마나 포근하게 지냈는지 모릅니다."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의 일화를 묵상하면서,

오늘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아기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자신을 낮춰 인간세상으로 들어오신 하느님께서도

허름한 여인숙 방 하나 잡지 못해

찬바람이 만만치 않은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밤, 또 다시 인간세상으로 내려오신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밤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추위에 오들오들 떠시면서 간절히 문을 두드리시는데,

나는 그 분께 내어드릴 방(공간)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한 작은 공간 하나>

예로니모 성인께서 예수님의 성탄과 관련해서        (AD 340-420)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아무리 성탄이 수 백 번 계속된다 해도

여러분 각자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잠깐 시내에 들렀더니 정말 대단했습니다. 번쩍번쩍, 시끌시끌, 와글와글,

캐럴송이 크게 울려 퍼지고, 구세군의 종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으신다면

다 헛것입니다. 그저 세상의 상술에 우리까지 덩달아 놀아나는 것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처럼 이 예수님의 성탄 전야,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은..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일입니다.

 

잠깐만 우리 마음 안을 한번 같이 들여다보실까요?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을 위한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확인해보면 좋겠습니다.

 

의외로 우리들 내면이 너무 많은 것들로 빼곡이 들어차 있어서

공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위해 조금 비집고 들어오시려고 해도

워낙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공간이 없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시는 여러분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성탄절, 예수님은 더 이상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요란한 성탄파티에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휘황찬란한 도시 한 가운데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번뇌와 슬픔,

고독과 상처로 가득한 우리 각자의 상처받은 인생 안에 탄생하고자

우리 옆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될 준비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우리 삶 가운데로 모시기 위한

아주 작은 공간 하나 마련하는 일입니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