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규정은 예수 안에서 안식의 삶을 살아라는 뜻 마12:1-8 출처 보기
주일과 일상(2)
부제 : 천하가 성전이요, 만사가 제사다!
※신학 전공자만 읽으세요.
▲도입.
사실을 말하자면, 예수님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교인이었다!
그분의 어렸을 적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이 경건한 유대교 가정에서 유대교 교육을 받고
유대교인으로서의 영성 생활을 실천하며 성장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나사렛 방문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눅4:16
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보듯, 유대교인으로서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며,
예수님은 여기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식일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에 대해 예수님은 다른 유대교인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달라도 매우 심하게!
복음서들은 이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 중 하나가 <밀 추수에 관한 논쟁>이다. 마12:1-8, 막2:23-28, 눅6:1-5
예수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예배를 위해 회당으로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이 때 제자들은 허기를 면하기 위해,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껍질을 까서 씹어 먹었다.
당시의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이것은 추수와 탈곡에 해당하는, ‘금지된 노동’이었다.
이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눈에 띄었고, 그들이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두 가지의 예로 답변하신다.
▲1. 첫 번째 예는 다윗이 전투 중에 시장할 때 회막 지성소에 드려졌던
진설병을 가져다 병사들에게 먹인 사건이다. 삼상21:1-6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것은, 다윗의 행동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은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 드려진 떡은, 제사장만이 먹게 되어 있었다. 레24:5-9
그렇다면 왜 다윗의 행동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던가?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어 ‘여호와께서 지도자로 삼으신’ 다윗의 신분과 관련 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처럼)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안식일에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일을 해도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야‘)로서
자신에게도 같은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으셨다.
▲2. 두 번째로 그분은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제사를 위해 분주히 일하는 것을 예로 드신다.
당시 율법은, 안식일에 집에서 회당까지 오고가는 거리 이상을 걷지 못하도록,
그리고 회당의 성경 두루마리를 나르는 정도 이상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규정에 의한다면, 안식일에 성전 업무를 볼 차례가 된 제사장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안식일 율법을 어겼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28:9-10
즉,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제사를 위해 분주히 일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질상 그들의 노동은 ‘수고하는 노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신다.
이 주장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주목하시라!
예수님은 지금의 시간을 안식일로,
지금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을 제사장으로,
당신이 일하고 계신 현장을 성전으로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시는 일을 제사로 비유하고 계시다.
지금 걷고 있는 밀밭이 성전이며,
밀 이삭을 비벼 먹는 행동이 제사라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진정한 의미의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부제가 : ‘천하가 성전이요, 만사가 제사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런 다음, 그분은 두 가지 혁명적인 선언을 하신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느니라’, 마12:6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선언이다. 마12:8
이 두 말씀에서 드러나듯,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의 권위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셨다.
오히려 율법 규정을 폐기하거나 수정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으셨다.
그것은 제사장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권한이다.
가장 위대한 계시자였던 모세도 꿈꾸지 못했던 엄청난 권한이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다고 믿었던 권한,
그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예수님은 믿었다.
이 발언은 유대교인들에게는 이단적이요 신성 모독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권한을 넘보는 사탄적 음모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분에게는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한 결과, 그런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것이 결국 유대교가 그분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거침’이 되었다.
◑참된 안식일 준수는.. 선을 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중적 율법 이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성전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고
안식일 준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순서를 뒤집어 놓으신다. 성전도 안식일도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마가복음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막2:27
그렇다면 뒤이어 나오는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막2:28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바꿔 쓸 수도 있다.
‘인자’에 해당하는 아람어 ‘바 에나쉬’는
‘사람’, ‘그 사람’, ‘나 같은 사람’, ‘나’ 등의 의미로 사용되던 관용어였다.
이렇게 풀면, 이 말씀은
안식일이 사람들의 참된 삶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뜻이 된다.
성서학자들은 여기서 ‘바 에나쉬’를 ‘인자’로 번역해야 옳은지
아니면 ‘사람’으로 번역해야 옳은지를 두고 논쟁해 왔지만,
나는 두 가지 뜻이 모두 있었을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회당 안에서 벌어진 연속된 사건에서 더 잘 드러난다.
밀밭을 지나 회당에 들어가시자
사람들이 손이 마비된 사람을 빌미로 예수님께 논쟁을 걸어온다. 마12:9-14,
막3:1-6, 눅6:6-11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냥 두면 죽을지 모르는 심한 경우에만 치료를 허락했다.
따라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은,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신다. 마12:12
누가복음에 나오는 또 다른 말씀,
‘그러면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 눅13:16
안식일은 모든 사람 혹은 모든 생명을 구속된 상태에서 풀어줌으로
선을 행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모든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선한 일을 하도록 마련된 날이다.
▲이 일화에 대한 분석 끝에 페르디난드 한 Ferdinand Hahn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선의의 표현으로 이해되기를 원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전통에 직면하여
그분은 종말론적인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드러내셨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결과다.’ 주1)
◑율법에 안식일 규정을 주신 목적은.. <안식의 삶을 살아라>가 그 목적
▲그렇다면 예수님은 안식일과 평일의 차이를 부정하셨는가?
예수님의 행동을 이런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은, 그분의 진의를 무시하는 처사다.
그분은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을 나누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안식일 율법을 표면적으로 위반하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뜻의 핵심을 다음의 유명한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11:28-30
유대교적인 배경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말씀이 율법에 관한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유대교에서 ‘멍에’는 곧 율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까다로운 율법 규정을 지키느라 지친 사람들을 가리킨다.
율법은 참된 쉼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 본래 목적인데,
그것이 왜곡되어 오히려 참된 쉼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잘못된 율법 준수는, 외적으로는 인생사를 더 고단하게 만들고
내적으로는 영혼을 더욱 황폐하게 만는다.
예수님은 그 멍에를 벗어놓고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초청하신다.
당신의 멍에는 쉽고 가벼워, 참된 쉼을 제공해 줄 것이란다.
여기서 말하는 참된 ‘쉼’은 일을 멈추는 쉼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삶을 가리킨다.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하면
그 일을 통해 안식과 위로와 평강과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초청은 ‘안식일’로의 부름이 아니라 ‘안식의 삶’에로의 부름이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며 열망했던 그 안식(메누하, 쉼)이
예수님을 따라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삶의 태도를 예수님은 ‘회개’와 ‘믿음’으로 요약하셨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방향 전환하는 것을 가리키고,
믿음이란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과정을 가리킨다.
불행하게도, (외식적) 율법 준수는 자주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방해한다.
그것들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그것에 매어 있는 한,
하나님은 관심 밖에 있게 된다.
그것을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고
그분과의 살아있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멍에요, 그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 처럼 사는 삶이다.
그 삶을 살아갈 때 종말에 누리도록 예정되어 있던 하나님의 안식(메누하)을
지금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있어 모든 날은 동일해진다.
그 사람은 ‘언제나’ ‘모든 일’을 ‘모든 생명’에게 ‘이롭도록’ 행하면서
하루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간다. 그 삶은 결코 생명을 고갈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일할수록 생명력이 더 충만해진다.
▲월터 윙크 Walter Wink는 베자 사본 눅6:4절에 첨가되어 있는 한 구절을 소개해 준다.
그 사본에는 다윗의 진설병 이야기 끝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날에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어떤 사람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안다면 당신은 복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면 당신은 불행한 사람이요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월터 윙크는 이 구절이 예수님이 실제로 한 말씀이 아닐 가능성은 높지만
그 사상만큼은 예수님의 의도와 일치한다고 믿는다. 주2)
위의 논의의 연장에서 볼 때, 틀림없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시야로 세상을 보시고
새로운 태도로 인생을 사셨다.
안식일 즉 참된 안식의 날은 이미 와 있다! 천국이 이미 와 있는 것처럼!
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천하가 모두 성전이고,
무슨 일이든 제사로 드려질 수 있었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모두 제사장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거룩한 시간(안식일)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의 구분이 있을 수 없고,
거룩한 장소(성전)와, 거룩하지 않은 장소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 이 땅은 이미 천국이고,
이 삶은 안식(메누하)이며, 이 생은 곧 영생이 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매일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셈이며,
어딜 가나 성전을 모독하게 되고, 무엇을 하든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나머지부분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를 클릭해서 보세요. 길어서 2등분 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유독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일한다'고 비난을 퍼부었지만, 예수님은 태연히 계속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평일을 놔두고) 안식일에 특별히 병자를 고치셨다고 성경에 계속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 안식일의 병고침을 통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얽매여 짐지고 살지 말고, <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그 참된 안식을 누리는 한 가지 방식은..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었습니다.
.................................
1) Ferdinand Hahn, The Worship of the Early Church, p. 15.
2) Walter Wink,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Fortress, 2002),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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