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이 낮아야 천국을 갖는다 마20:1~16 출처
이 본문은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설교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두 본문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두 본문의 결론이 똑같습니다.
결론이 ‘먼저 된 자 나중되고, 나중된자 먼저 된다’로 똑같습니다. 마19:30과 마20:16
그래서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일부러 이렇게 설정하시다.
자! 한 시간 일한 사람(저녁 5시에 온 사람)에게 먼저 돈을 줍니다,
이게 다 주님의 설정이에요.
실제로는, 꼭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냥 일찍 온 사람부터 임금을 주었다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입니다.
근데 일부러 (어떤 교훈을 주시려고) 이렇게 설정하시는 거예요,
그래야 많이 일한 사람, 포도원에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보고,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니까요..
◑몸값이 높은 사람.. 천국을 못 가진다.
주님은 지금, 그들의 불평 하는 마음!
그걸 보여주시려 그러는 거지요.
그게 천국에 맞지 않는 마음이니까요.
▲자! 저녁 5시에 와서, 오직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침 6시부터 와서 12시간 일한사람,
아침 9시에 와서 9시간 일한 사람들은
‘아! 저 사람이 한 데나리온이면 나는 12데나리온 받겠다, 9데나리온 받겠다’
이렇게 생각 했을 것입니다.
‘더 받을 줄 알았다’ 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즉, 자기 몸값을 높인 것입니다. - 이게 잘못입니다.
▲우리 각자가, 사회 속에서는 자기 몸값을 키우려 하고,
자기 가치를 크게 만들려고 하지만,
천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받을 수 있을 거다, 내 몸값은 저 사람의 12배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이게 예수님의 포인트입니다.
바로 이 상태, 더 받을 줄 알고 있는 (몸값이 높아진) 이 마음으로는
절대 천국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에요.
이 세상살이를 살아가면서 내 몸값에 대한 인식이 크면 클수록(교만할수록)
천국(또는 하나님의 통치, 임재, 연합)을 갖기가 어렵다는 얘기에요.
'내가 연봉이 몇 억, 내가 이런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주어지고 있는 상황은,
내 몸값과 내 가치에 비해서 항상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을 가질 수 없다는 얘기에요.
◑몸값이 낮은 사람.. 천국을 가진다.
본문의 비유는.. 근본적으로 <천국>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 '천국'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임재, 통치, 연합, 동행>입니다.
▲자! 고작 한 시간 일했습니다.
당연히 이 사람의 생각 속에서는,
그 당시 통용되는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자기는 12분의 1데나리온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줬습니다.
이때 이 사람이 ‘어! 거스름돈이 없는데요?’ 아마 그랬을지도 몰라요.
그때 주인이 ‘한 데나리온 다 가지시오’ 합니다.
그때 이 한 시간 일한 품꾼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아니 한 시간 일했는데
12시간 일해야 받는 하루의 품삯을 주다니.. 아휴 어떻게 그렇게 자비로우십니까!’
정직한 사람이라면 그랬을 거예요.
‘어휴, 이건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는 그저 12분의 1데나리온만 받아도 감사합니다, 하루를 공 칠 뻔했는데요 뭐,
정말 감사합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뜻하지 않은 과분한 지불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는 이 마음가짐,
자기 몸값이 너무나 너무나 낮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자기에게 주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이, 모든 현실과 경제형편이
다 나 자신에게는 내 몸값을 생각하면.. 너무나 과분하다고 느끼는 이 사람,
몸값을 키우는 경쟁에서 꼴찌 한 이 사람,
자기 몸값에 대한 인식이 가장 작은 이 사람이
천국을 가장 먼저 차지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핵심 단락
▲여러분의 몸값이 커졌습니까? 지금 몸값을 크게 키우고 싶으십니까?
그런 분들이 평소에 하는 생각이 뭐에요?
지금 주어져 있는 이 세상살이의 현실, 언제나 부족해요 언제나 만족하지 못해요,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 나는 너무 저평가 되어 있다.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보다 더 나은 상황, 더 나은 대우,
더 나은 연봉을 향해서, 자기 몸값을 키우려고 합니다.
이 마음 갖고 살아가는 거예요.
‘나도 몸값을 키워야지,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얻기 위하여,
내 가치를 더 확장시켜야 돼!’
이 경쟁에 뛰어들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절대로 보좌가 펼쳐져 있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그곳,
그 천국을 지금 내 것으로 느낄 수도, 소유할 수도 없다는 얘기에요.
즉, 하나님의 임재/통치/연합/동행을 누릴 수 없거나, 있어도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러분, 지금 경제형편이 어렵지요. 그래서 짜증나고 불평이 생기지요?
왜 불평이 생깁니까?
여러분의 몸값(또는 삶의 환경)은,
즉 여러분이 생각하는 여러분의 자기가치는
지금 이 상황보다는 더 나아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 포도원 비유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또 다시 반복해서 마20:1~16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수난 받고 죽으시고, 마20:17~19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이야기를.. 왜 또 예고하시는지 아십니까?
천국을 가지려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내 몸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세상살이 속에서
내게 주어지고 있는 모든 삶의 처지와 형편이, 과분하다고 느낄 때라야,
천국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리에 있어야,
도대체 이 세상에서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과분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까?
바로 ‘십자가의 자리’ 입니다.
십자가가.. 이 세상에서 내 몸값을 가장 낮게 쳐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곳이 실제 내 몸값이에요, 하나님이 보시는 내 몸값,
내 자기가치가..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찢기고, 창에 찔려 죽어야 마땅한,
바로 그 자리가.. 실제로 하나님이 정산하시는 내 몸값이라는 얘깁니다.
그 몸값을 자기가치로 갖고 있는 사람은,
즉 십자가에 매달려 찢겨 벌거벗고 죽임을 당해야 마땅하다는 몸값을 갖고 있는,
그런 자기가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 그 어떤 형편과 어떤 처지라도 과분하지 않은 게 없는 거예요.
이 십자가에 달려서 느끼는 과분함이 마음속에 없으면,
하나님 아버지가 다스리시는 천국은, 절대로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없고,
이 세상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그 천국을 느낄 수도, 가질 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리하면
오늘 이 본문의 말씀 속에서는,
지금 내 모든 형편이 다 과분해야 된다는 거예요.
직장관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인간관계도, 가족관계도
그저 십자가에 달려 죽어 마땅한 내 몸값에 비하면,
내 아내가 과분하고, 내 남편이 과분하고,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내 몸값을 생각하면, 내 자식이 과분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모든 게 과분해져요. (이게 한 시간 일하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내가 들고 있는 빽, 삼만 원짜리 (레자)빽이에요. *레자: 인조 비닐 가죽
내 몸값을 생각하면 ‘삼만 원짜리 빽도 과분하다’이것이 진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천국을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실제 천국을 현실화 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쩐의 전쟁’인 세상살이 속에서 *쩐: 돈 전 錢
내 몸값을 키우고 키울수록,
내 마음이 나는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어야 된다고 생각할수록
천국은 멀어지고...
반대로
몸값 키우기 전쟁에서 꼴지를 이루어서
몸값전쟁에서 최고 꼴찌가 된 이 사람이,
(즉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마땅하다는 가장 낮은 몸값의 사람이)
천국을 내 것으로 먼저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녁 5시에 와서 ‘1시간 일한 사람’이.. 이런 과분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죠)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쩐의 전쟁인 세상살이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함을 통하여, 몸값경쟁의 꼴찌가 되게 해 주셔서
천국 소유의 일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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