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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태운 나귀새끼의 부담

LNCK 2012. 1. 9. 19:52

◈예수님을 태운 나귀새끼의 부담        마21:1~11             11.12.28. 설교스크랩, 출처


 

▲서론/ 꽤 부담되는 예수님

우리는 ‘복음’이라 그러면.. 다 복이 내게 굴러들어오는 것이고..

‘구세주 예수’라 그러면.. 뭔가 내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만,


실제적인 측면에서, 한 번 정직하게 따져보면,

신자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뭐냐 하면 ‘부담’이라는 겁니다, 부담!


본문은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1. 우리가 어린 나귀가 되어서 예수님을 태우고 가야하는.. 이것은 부담입니다.

2. 예루살렘 백성들도,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그 길에 깔았습니다.. 이것도 부담입니다.


이런 <부담 burden>이란 측면에서, 본문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생활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어떤 면에서, 예수 믿는 것이 부담되십니까? - 당신은 제자입니다.

예수 믿는 신앙생활이, 당신에게 전혀 부담이 안 되십니까? - 짝퉁입니다.


그러나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듯이  마11:30

예수님을 내 나귀에 태우면

다른 세상 짐들이.. 다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내 나귀에 태우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세상 짐들을, 다 버려야 하는데요...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다.

예수님은, 겸손한 왕, 평화의 왕으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은

적용하자면.. 오늘날 내 삶의 현장으로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신약적 의미로 성전은.. 우리 각자가 성전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오늘날 내 삶의 현장에 입성하시는(들어오시는) 예수님’으로 해석하는 것도

상징적 해석으로 맞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직후, 성전에 가셔서 성전청결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라는, 내 생활 영역 안으로의 입성 하시려면

2가지 조건이 맞아야 됩니다.



◑1. 한 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은, 아직 짐을 져보지 않은 나귀새끼이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태우지 않은 나귀새끼입니다.

내 마음이.. ‘나귀’인데,

내 마음에 온갖 세상 걱정, 야망, 비전, 철학, 경험, 현세적 성공..

뭐 이런 것들로 가득 짐이 실어져 있으면,

거기에는 예수님이 타실만한 공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나귀새끼, 즉 우리 마음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어린아이가 될수록)

예수님을 잘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태우고,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 보십시오. 당신은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사역에 대한 책임감, 부담, 의무감도.. 내 마음의 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태울 수 있는 마음이 되려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책임감도, 그 어떤 부담감도,

그 어떤 마음의 짐도 있어서는 안 되는 상태가 돼야 됩니다.


열심히 주님을 섬겨야 하지만,

필요이상의 내 책임감, 내 의무감은.. 버려야 합니다.


나는 종이지.. 주인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 책임감/의무감이.. 보통은 ‘내 야망’에서 나오는 것이거든요.


어쨌든 내가 책임감/의무감의 짐을 지고 있으면,

예수님이 그 ‘나귀’를 타실 수 없습니다. 내어드릴 공간이 없거든요.

그 결과, 예수님이 왕으로서, 내 삶이라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수도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아내 남편 부모에 대한 책임, 직장에 대한 책임의식,

그 어떤 것도 마음에 (과도하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책임지심을 믿고, 그런 전제 가운데서 내가 가족을 돌보는 것이지..

자식이 부담되는 ‘나귀’ 위에.. 예수님을 태울 수는 없습니다.

이미 ‘자녀’가 타고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취직해야 된다, 결혼해야 된다, 무슨 시험에 합격해야 된다’

이 모든 일들에 대한 부담이나 마음의 짐을 가진 상태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태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만,

모든 결과를 일절 주님의 뜻에 맡기고,

내 마음에서는.. 일체의 부담감이 사라져야 된다는 거예요.


주님의 뜻 가운데서, 내가 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뜻을 벗어나서, 내가 꼭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행하려 하면.. 안 됩니다.


오직 내 마음이 느끼는 부담

예수님 한분일 수 있는 상태에서만

예수님이 내 마음에 (나귀처럼) 올라타실 수 있고

왕으로서 예루살렘(내 생활) 안으로 들어오실 수가 있다는 겁니다.



◑2. 겉옷을 벗어서 깔아드리는.. 의미  


겉옷을 벗어서 길바닥에 까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겉옷은 ‘신분’인데.. 자기 신분의 과도한 책임감.. 이것을 다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겉옷은 신분

사람들은 겉옷을 길에다 깔고, 종려나무 잎사귀를 잘라서 깔아놓습니다.

이게 다 무슨 뜻일까요?


‘겉옷’은 우리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살면서

그 사회 속에서 내가 갖게 되는 신분을 말해요.

군인들이 퇴역할 때 ‘옷을 벗는다’고 얘기하지요, 신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겉옷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아버지라는 신분을 벗어버리고 (아버지로서의 과도한 책임과 의무)

어머니로서의 겉옷을 벗는 것이고,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휘두르지 않습니다.)

직장인으로서의 겉옷, 그 신분의 겉옷을 벗어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위를 나귀를 타고 지나가십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어, 아버지로서의 길을 가야 되고, 어머니로서의 길을 가야 되고,

직장인으로서 길을 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 길을 누가 가느냐 하면.. 내 마음(나귀)에 올라타신 주님이 가신다는 얘깁니다.


다시 말하면 내 부담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오직 다 맡기고, 나는 주님을 따라가는 종이요, 나귀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세상에 많아도.. 주님의 뜻으로 겸허히 수용합니다.)


내가 아버지로서 그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식에게 느꼈던 부담,

직장인의 직책상 느꼈던 부담,

이 모든 부담이 예수님께 집중되고, 천국으로 집중되면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생로병사, 빈부귀천의 모든 상태를.. 다 주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는 것입니다.

세상 일은, 주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것만큼 누리고,

내 주된 관심은 오직 ‘그 (주님의) 나라와 그 의’에 있는 것입니다.

 

그때 나귀타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내가 사회에서부터 부여받은 신분으로서 해야 될 길들을

(주도적으로 나귀타시고) 걸어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께서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고, 한 번도 짐을 져보지 않은 새끼나귀를 타시고,

사람들이 벗어놓은 겉옷 위로 지나가시는 모습의 (상징적) 의미라는 거예요.


◑정리하면


▲자 이제부터, 내 인생의 사전에 있어서 부담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오직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가정이 잘못되는 이유는.. 부모가 가정과 자녀에 과도한 부담(야망)을 지기 때문입니다.


교회지도자가 교회에 대해서, 스스로 과도한 부담을 지면,

그건 잘 되기보다는.. 잘못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부담을 지고 열심히 하지만.. 결국은 주님 뜻과 반대방향으로 열심히 뛰거든요.


이 세상에서는 어떤 것도, 내 마음(나귀)에 짐을 져서는 안 되고,

그래서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 들일 수가 없고.. 그것은 주님을 믿는 게 아닌 거예요.


나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만

결과/성과.. 이런 것들은, 다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꼭 돋보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그 이후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요?


내가 예수님을 나귀에 태우듯이, 모시고 살면,

그리고 내 겉옷을 그 앞에 깔고, 주님과 동행해서 살면..


그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마치 수소를 넣은 큰 풍선(예수님 의미)을, 내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내가 하늘위로 둥둥 뜨듯이, 세상을 가볍게, 날아갈듯이 살 수 있게 됩니다.

내 삶의 짐이 그만큼 가벼워진다는 뜻입니다. 두둥실 뜨듯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그 생명의 기운이

나와 함께 동행/임재/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세가, 여호수아가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 땅에서

모든 대적들을 차례로 무너뜨렸듯이,

예수 이름의 (사랑의) 권세, 예수 이름의 (섬기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이 세상의 어떤 악의 무게가 눌러도 눌려지지 않는

하늘의 수소, 하늘의 기운, 천국의 힘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인생의 사전에, 예수님 한분만이 내 마음에 부담이 되어

내 마음의 나귀가 태우는 유일한 왕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이 몸을 입고 있어서, 사회 속에서 덧입혀진 신분의 겉옷들은

내가 벗어드리고, 주님이 그 위를 지나가심으로써,

주님이 행하시고 이루시는 모든 일들을,

단지 제가 보고 감사할 수 있게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종일 새끼나귀가 되어서, 예수님만을 태운 행로를 걷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