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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세상에 주어야 할 것은

LNCK 2012. 3. 13. 20:48

 

◈성도가 세상에 주어야 할 것은        행3:1~10      설교축약, 정리



오늘은 지난 번 영적 사각지대를 어떻게? 설교와, 다른 쪽 측면의 설교를 해서

지난 번 말씀과 균형을 이루고 싶습니다.


공중의 새로 비유하자면, 새는 언제나 좌우의 날개로 납니다. 

당연히 양쪽 날개에 똑같이 힘이 가야, 오래 날 수 있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필요에 따라 우리 가진 것을 나눠 주되,

‘그게 물질만으로 전부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당연히 ‘복음도 나눠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美門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친 본문입니다.



◑이 남자는 여러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 우선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

왜 사람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오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가운데도

‘나면서부터 갖게 된 핸디캡’을 안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말이지요. 


선천적으로 나면서부터 핸디캡을 가졌든..

후천적으로 어릴 적부터 핸디캡을 가졌든..


우리 각자 역시

본문의 주인공처럼 ‘나면서/어려서부터 어떤 심각한 핸디캡’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죠.


왜 이렇게 나는 자주 외롭고 마음이 어둡습니까?

왜 이렇게 나는 의지가 약하고, 쉽게 욕망에 사로잡힙니까?


왜 이렇게 나는 정직하지 못하고, 그리도 오래 못 참을까요?  

왜 이렇게 나는, 신체적으로 남이 이해 못하는 약점이 있을까요?


▲2.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이 사람은 또 다른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 떠메어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떠메어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똑똑하고 현명하고 자기 정체성이 뚜렷한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가 놀랍게도 ‘남들처럼’ 이라는 사실을 아세요?


어떤 목표를 이루려는 내적 동기가 ‘남부럽지 않게 살기 위하여’

또는 ‘남보란 듯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두들 잘 배우고 좋은 실력을 가지고,

당당하고 멋지게 자기만의 꿈을 펼치며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떻습니까?


끊임없이 나를 타인과 비교하며, 남들 보기에 그럴 듯하게 살려고 아등바등합니다.

그런 삶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떠메어 사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으나 자유롭지 못하고,

내가 살고 있으나 내가 없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나 무언가 텅 비어있고,

내가 걷고 있지만 마치 누군가에게 떠메어 가고 있는 것 같은 삶 아닙니까?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다른 사람에게 떠메어 움직이는 이 사람’

오늘날 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3.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있는 사람’ 입니다.


우리 성경에 미문이라고 부르는 이 ‘아름다운 문’은  beautiful gate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정문이었습니다.

비상구나 쪽문이 아니라, 주 출입구였습니다.


정문이니까, 또 더 아름답게 치장했겠지요.

이 문은, 고린도에서 가져온 청동으로 특별히 아름답게 만들어서,

‘미문’이란 별명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초라한 행색의 앉은뱅이가

‘아름다운 문’ 곁에서 구걸하는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시지요.

그 슬픈 대조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야 할 목적지는 따로 있습니다.

그 목적지는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성전 안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핵심장소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당시에 장애우들을 성전 안뜰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별하는 율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 이 사람은,

날마다 성전 문 앞에 나아오지만, (누가 데려와 주지만)

결코 성전 안 뜰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까이로 나아가지 못하고, 바깥에만 머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빠짐없이 나오지만, 결코 주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에 들어가 보지 못하는 사람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결코 사랑의 지성소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


익숙한 교회생활과 격식있는 종교생활로서 ‘아름다운 성전 문’을 드나들긴 하지만

결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라는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


▲4. 그는 한 푼의 구걸을 원했습니다.

 

더 우리의 존재를 슬프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려고 하는 이 사람이

구하려는 게 뭐였지요?


동전 한 푼이었습니다.

결국 한 푼이었습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를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는 한 푼!

자신의 인생을 변화 시킬 수 없는 한 푼!


결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한 푼!

바로 그것을 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나의 전 인생을 걸고 얻으려는 것이

큰 성공이고, 큰 명예고, 큰 물질인지 몰라도

그것은 오늘 이 앉은뱅이가 구했던 ‘한 푼’인지도 모릅니다.


시간과 능력과 열정을 다 쏟아 얻으려고 하는 그 숱한 노력들이

죄송하지만 어쩌면 하나님께 ‘구걸’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내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우리를 핵심장소로 데려다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푼을 구하며’ 소중한 내 인생을 소모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한 푼을 구걸하는 사람’ 이것은 또 누구의 이름이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교회를 상징하고, 그리스도인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따라가면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우리의 정체성은 제 모습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진정으로 줘야 될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도

자연히 답이 나올 것입니다.

 

▲1.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될 대상은 앉은뱅이 같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복음서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그들은 무르익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급하고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습니다.

도무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통해

그들 마음속에 사랑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변화하기 전의 눈으로 볼 때.. 앉은뱅이는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전부터 앉은뱅이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요.

하지만 그 동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주님을 진심으로 만난 까닭입니다.


그때부터는 주님이 보시기를 원하는 장면이 보이고

주님이 보시기를 원하는 자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앉은뱅이는 그들 눈에 발견된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는 지금 주변에 있는 앉은뱅이가 보입니까?

연약한 자들이 눈에 보이시나요?


육체에 장애가 있고, 정신적 장애와 각종 공포증(포비아)에 신음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십니까?


그런 사람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교회가 아닐 것이고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금과 은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드리려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 이름은.. 그 동안 이 사람이 갖고 있었던 이름과 전혀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라는 이름,

‘남에게 떠메어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이름,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는 이름,

‘한 푼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이름...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자기가 평생 달고 다니던 이름표를 떼 내고

새 이름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면서부터 가졌던 문제,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남에게 떠메어 움직이던 사람이 자기 발로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문 곁에만 앉아 있던 사람이 이제 자기 발로 하나님 살아계심의 중심,

그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2. 교회는 ‘우리를 보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침반이 없었을 시절에, 뱃사람들은

밤하늘에 떠 있는 북극성을 보고 항해를 했습니다.


모든 별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지만

북극성만큼은 북쪽 하늘에 자기를 두고 결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해서 그 별을 따라가면 북쪽이요, 등을 지고 가면 남쪽이요,

그 별빛을 비스듬히 두고 가면.. 동쪽이나 서쪽이 됩니다.


교회는 그렇게 빛을 내면서 결코 요동하지 않는

방향이 되고..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곳이라는 겁니다.


‘우리를 보라’고 말한 두 제자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외치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내가 가진 물질이나 지식 또는 그 외에 다른 것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주라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문제는 ‘진정성’ authenticity에 달려 있습니다.   ←하이라이트

두 사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변화가 나타난 것은

두 사도의 평소 삶과/기도와/사랑의 실천에.. 진정성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두 사도의 평소의 신앙과 삶에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면,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그윽한 눈빛과 목소리로 ‘일어나 걸어라’고 했든지

아니면 천둥 치는 듯한 음성으로 ‘일어나 걸어라’ 했든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는 속으로 ‘너나 잘 하세요!’ 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 능력은 전혀 감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진정성은.. 감소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아무리 ‘예수 이름!’을 외쳐도..

결과는 뻔합니다. ‘너나 잘 하세요!’


그러니까 평소에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고, 기도해 주고,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하면..

반드시 그 진정성은 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그가 당장 일어나 걷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주님의 사랑의 온기를 느끼며.. 그는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오늘날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권세가 없다는 것은.. 평소 내 신앙에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덧붙여서, 오늘날 설교가 힘이 없고, 사람들이 별 감동을 못 받는다면,

전하는 자가, 진정성이 부족할 때.. 그렇습니다.

 

말(설교)은 유창하게..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성은.. 그게 연기가 안 통하거든요.

 

평소에 경건과 구제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만..

설교에 별로 화려한 내용이 없더라도

신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달시킵니다.

그러면.. 앉은뱅이 같은 신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나서.. 걸으며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마치는 말

교회가 할 일이 많이 있고, 물질로도 당연히 나눔을 실천해야 하지만,

그보다 가장 중요하고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일입니다.


오늘도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치는 일을 계속 해야 할 것입니다.


평소에 신실하게 기도생활을 하면서,

평소에 자기의 소유를 나누며 베푸는 삶을 실천하면서

평소에 경건의 훈련을 쌓아가는 사람이 (두 사도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할 때

반드시 권세와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두 사도처럼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각종 핸디캡을 갖고 있는

나 자신부터 스스로 고침을 받읍시다.


성 프란시스가 '탁발수도회'를 만들어서, 교황청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교황을 찾아갔습니다.


탁발수도회란, 가진 것 없이, 그저 얻어먹으면서 전도하고 다니는 단체입니다.

지금도 신자들은 이것을 본받아서 '거지전도' 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를 만난 교황은, 그가 하는 일이 너무 우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많은 보화가 가득한 창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을 다 보여준 후에 프란시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그러자 프란시스는 이 말을 받아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고 외칠 능력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지체들만큼은

은과 금이 없더라도.. 예수의 이름만은 영원히 간직하십시다!


그 예수 이름의 권세는,

우리도.. 성 프랜시스처럼

평소의 삶에서 경건과 나눔을 신실하게 실천할 때,

그게 라이프스타일이 되었을 때,

    

우리도 두 사도처럼,

또한 성 프랜시스처럼,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반드시 가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