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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안 되어도, 후에는 된다

LNCK 2012. 4. 4. 09:38

◈지금은 안 되어도, 후에는 된다          요13:36~37          요한복음85강中, 출처

 

☞지난 호 베드로의 착각 에 계속 이어지는 설교문

 

 

왜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자리까지 따라가겠다고 했을 때,

지금은 안 되고 후에는 따라 오게 된다고 하셨을까요?


요13:36~37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왜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된다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지금은 아직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오십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알려 주셨어요.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고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된다는 말씀은

성령이 오셔야 된다는 말인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의 순교는, 자기 실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그때는 아니지만, 나중에 주님을 위해 죽는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주를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주를 따라가는 것은 성도의 실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힘을 공급해 주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을 막고자 했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는 곳은, 끝까지 따라가서 막아 주겠다고

장담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죽기까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한 말은, 만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기 목숨이 위험에 처하자.. 본능적으로 자기 목숨을 위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넌 지금 뭘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네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죽음 앞에 세워서, 자신의 한계를 알게 하신 겁니다.

‘봐라! 네가 죽음 앞에 서면, 네 의지와 각오는 한낮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으라는 겁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선 “믿씁니다!”라는 자기 결단도.. 아무 소용없어요.

“주여 내가 죽는데도 따라 가겠습니다”는 각오도.. 휴지조각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26:69~75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난 후, 통곡을 했어요.

왜 통곡을 합니까?


이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기력함에서 통곡이 나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왜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죽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셔야.. 성령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성령님은 부활의 영(靈)이에요.

예수님도 성령님의 능력으로 부활을 하셨어요.


그래서 진짜 성령님이 임하시면..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성령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 얼마나 두려움이 많습니까? 사방에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성도는..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이, ‘죽음의 두려움’인데,

(그래서 베드로도 그때는 회피하고 말았는데)

성령의 충만을 받고나서는,

‘죽음의 두려움’을 포함하여, 모든 두려움을 능히 극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렵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전히 두려움은 현실이지만, 그것에 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기고, 극복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시면,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성령이 제자들 속에서 부활의 영으로서 역사를 하십니다.

그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는 그리스도’시라고 담대히 증거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그들은 목격한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의 두려움이..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도리어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을.. 합당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였어요.


행5:41~42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성령 받은 자의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육신을 볼모로 역사합니다.

육신은 자기 몸이 죽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안 죽으려고 합니다.

오래 살고자 해요.

이건 육신의 본능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이 본능을 이기게 하세요.

성령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성도 안에서 일으켜요.


성령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 때 너도 나를 따라 오게 될 것이라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 육신은 눈만 뜨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찾아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들을 염려하게 되어요.

이 모든 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에요.,

세상은 이것들로 육신을 볼모로 잡고 성도를 세상에 붙잡아 두고자 해요.


땅에 속한 자는 절대로 이걸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하늘에 영(靈)을 주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하여 죽게 하세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요.

이럴 때 세상이 작아 보이는 겁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무지하게 커 보이세요? 그래서 세상에 눌리십니까?

-그러면 성령님이 내 속에서 거의 소멸되신 겁니다. 다시 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께 작아 보이세요?

-그러면 성령님이 내 속에서, 현재 나를 주장하고 계신 것이 맞습니다.


아니,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현실의 문제들을 두려워.. 잔뜩 움츠리고 살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예수님 믿기 전이나, 믿고 난 후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여전히 육신으로 살고 있고,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고 있어요.


성령이 내게 오시지 않았을 땐, 세상 가치로 일희일비 했어요.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난 후, 나는 세상 가치관에 죽었기 때문에

세상 가치로 일희일비 하지 않아요.


이상하게 세상이 작아 보인단 말입니다.

세상에서의 실패가 실패로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 세상 것으로 인하여 울고불고 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게 세상이 감당치 못할 성령의 능력인 겁니다.


우린 성령의 능력 안에 있어요.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점점 만들어(성화시켜) 가십니다.


우린 이미 이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삼층천에 가 있어요.


바울이 삼층천에 있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이긴 자로서 넉넉함으로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요한을 통하여서 성도가 가 있는 천국을 보여주셨잖아요.,

요한계시록은 지금 현재 우리 성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우리의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어요.


여러분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쓰여 있는 성도는

지금 시온 산에서, 어린 양이 어디로 이끌든지 다니고 있어요.


홀로 다니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과 함께 다니고 있어요.

이게 지금은 성령 안에서 느껴지게 하는 겁니다.


(먼 미래에 그렇게 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지금 현실에, 천상의 세계에서, 오늘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면

당신은 이미 ‘시온 산에서 있는, 이긴 자’입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하늘에 있던 장막이 덧 입혀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니, 현실의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십시다.

성령 안에서!

성령님과 교통하면서, 친밀히 교제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 더 읽으실 분 ....................


◑편견을 깨는 것도 성령으로라야 가능합니다.


신앙생활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이 뭔가 하면, 편견이에요.

편견이란, ‘한쪽으로 치우침’이에요.


지난 번 신문에 보니

<사람의 사고는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돌이키지 못한다>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한 적이 있어요.

편견은 정신병이라는 겁니다.


지난번 한상열이라는 목사가 북한을 방문해서 우리 정부를 괴뢰도당이라고 하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짓을 하다가 구속이 되었잖아요.


나이가 그렇게 많아도 어그러진 사고는 변하지 않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다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남의 말을 안 들어요.

이런 사람은 안 변해요.


인간적 편견도.. 그렇게 깨기 어려운데,

자신은 하나님 계시를 따른다는데,

즉, 종교적 편견을 누가 말리겠어요.


그러니까 자살폭탄테러도 감행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무서운 것이 종교는 평화스런 것이지만 ‘종교적 편견’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3차대전은 ‘종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잖아요.

‘종교적 편견’은 절대로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단이 생기고, 그 이단을 따르는 이유도, 모두가 이런 편견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는 겁니다.


이건 신앙적으로 말하면, 성령 받지 않으면 안 고쳐져요.

성령이 임해야 고쳐져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정목사 이야기를 조금 할게요.

진리는 아니고, 우리 각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니

참고만 하세요.


예전에 제가 율법 아래 있을 때, 어느 목사님을 통하여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엔 제겐 큰 은혜였어요.


종말론을 하는 분인데 한국교회에서는 대가로 통해요.

지금도 서울에서 큰 교회를 하고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엉터리인데, 그 당시엔 저에겐 너무도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제가 그때 굉장히 갈급해 있었거든요.


아! 이렇게 참신하고 복음 적인 분이 있나 싶어서 10여년을 교제를 했어요.

설교를 들으면 너무도 고맙고 감동이 되어서, 헌금도 보내고 그랬어요.


설교를 듣다가 뭘 좋아한다고 하면, 그걸 사서 보내주고, 보약도 지어드리고 그랬어요.

그 목사님이 운영하는 선교 단체에, 한 동안 선교 헌금도 매달 오십만 원씩 했어요.


그 당시 저희 교회 월세가 20만원 이었으니, 저에겐 엄청난 액수였어요.

그럼에도 그 분의 설교가 너무도 은혜가 되어서, 헌금한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가르침은, 뭐든지 아무 의심 없이 믿었어요.

누가 그 목사님을 공격이라도 하면, 내가 나서서 변호하곤 했어요.


이 분은 철저하게 개혁주의 교회관으로, 자칭 <100점 교인>이라는 카드를 만들어서

교인들을 교회 중심으로 붙잡아 두고, 열심과 충성과 봉사를 강조하던 분입니다.


그 땐 저도 성화주의에 푹 빠져 있던 터라

이러한 개혁주의 신앙관이 제 마음에 와 닿았던 것입니다.


당시 제가 열심이라고 하면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했을 정도로

‘한 열심’ 하던 때였어요.       *열심이 특심했다는 뜻 (교포용 해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제 마음에 딱 맞는 설교를 하니

제가 그분께, 단숨에 푹 빠지고 말았던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광(狂) 팬이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그 목사님의 책이라던가!

설교 테이프라든가!

심지어 그 교회 주보에서부터 신문에 난 기사까지

그 목사님의 이름이 있는 것이면, 다 귀하게 보여서 다 모으곤 하였던 겁니다.


그 분이, 복음을 세계에서 최고로 잘 아는 줄 알았어요.

그 목사가 하는 말은, 모두가 성령께서 깨닫게 해준 새로운 진리라고 믿었어요.


이 분은 온 세계로 세미나를 다녔거든요.

그러니 그 땐 그냥 그 목사님 이름만 들어도 좋았어요.


저에겐 신앙의 모든 판단 기준이 그 목사님의 성경 해석법이었어요.

누가 그 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한다거나 안 좋은 말을 하면

제가 본능적으로 화를 내고 반발을 했어요.


그 목사를 비판하는 자는 죽이고 싶도록 미웠어요.

복음도 모르는 놈이라고 매도하면서 말이에요.


얼마나 그 목사님 설교를 많이 들었던지

나중에 보니, 내가 하는 행동이며 말투가 그 목사님처럼 변해 있더라고요.


제 아내가 그러는 겁니다.

‘당신 말투가 왜 그래?’


그럼 “내가 뭘 어떤데?” 라고 하면서 화를 내곤 했어요.

나도 모르게 닮았던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눈만 뜨면 그 분의 설교 테이프를 늘 듣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자연히 나와 그 목사님은,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이 누군가가 좋다고 느껴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좋게 보여요.


그 목사님에 대한 비판 능력을 상실해요.

이는 이미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목사님을 누가 비판하면 비판하는

그 사람이 복음을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걸 편견이라고 해요.


이단이 왜 생기느냐 하면.. 따르는 사람들이 판단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편견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좋아 보이면

흠도 흠으로 보이지 않고, 다 이해가 되고 넘어가게 되어요.


남이 그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면, 온갖 욕을 하였을 터인데도

그 사람이 하면 ‘뭐 그럴 수 있지’ 라며, 덮어두고 두둔하고 변호하고 싶어져요.


왜냐하면 그 목사님이 비판 받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비판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사님을 내가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긴다고요.


    ※잠시, 맥락을 중간점검하면,

      지금 <편견>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편견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깨어질 수 있다>를 강론중입니다.


이 편견이, 복음으로 둔갑하면 감당이 안 되어요.

맹신과 맹종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다 여기에 걸려든 겁니다.

그러니 비판능력을 상실하여서, 그 누구의 말도 듣지를 않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동료나 친구나 다른 목사의 말도 듣지 않아요.


이럴 땐, 곁에서 아무리 잘못된 것을 이야기 해 주어도, 듣지 않아요.

올바른 말을 해 주어도, 비판으로 들리지, 바로 들리지 않아요.

괜히 시기하고 모함한다고 들려져요.


왜냐하면 난 이미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모두가 복음이다’ 라는 편견으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모두가 옳다고 이미 판정을 내리고 듣기 때문에

그 어떤 말을 해도 내 판정은 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분과 내 자신을 하나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부정하면, 내 신앙과 내 믿음이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용납 할 수가 없고,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어찌하든지 그 분이 옳고

자기가 판단한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이처럼 제일 무서운 게.. <신앙의 편견>이에요.

그 편견이 사람을 추종하게 만들어요.

    자살 폭탄까지는 안 가더라도,

    얼마든지 ‘친위대’를 자처하고 나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을 하는데도,

그 땐 그게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신 심오한 비밀이라고

탄성을 지으며 찬양을 했어요.


‘저 목사가 아니면 감히 누가 저런 해석을 한단 말인가?’ 라는 식으로 감동했어요.

제가 과거에 그랬다니까요.


그땐 제 생각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던 목사였는데

지금 십자가를 알고 나니,

그 분은 율법주의자이고, 교권주의자이고, 바리새인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거짓은 항상 아름답게 포장을 하고서 나타나는 겁니다.

가장 복음적이라고 하면서 나타나요.

그러니 그 안에 빛(성령)이 없는 사람들이 속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하여, 제가 눈이 떠진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흔히들 사기도 당해 보아야 분별력이 생긴다고 하잖아요.

우리는 일평생 살아가면서 이러한 일들을 수없이 많이 겪게 됩니다.

실패만큼 좋은 스승이 없어요.

 

이 세상엔 그 어떤 목사도, 완벽하게 복음적인 목사는 없어요.

다만 복음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있을 뿐이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다 그 속에 마귀적인 요소가 일부 담겨져 있단 말입니다.

저에게도 있어요.


복음을 이용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 하는 죄성이 있단 말입니다.

이린 죄성을 교묘하게 복음으로 둔갑을 시켜서, 자기 지위를 지키고자 해요.


그러므로 신앙엔 냉정함이 필요해요. (물론 단순하게 믿어야 하지만)

베뢰아 교인들처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 늘 상고해 보아야 해요.

성경에서 답을 얻어야지, 사람의 말에 답을 얻고자 하면 안 되어요.


편견에 사로잡히면, 그 사람의 말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어요.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는 능력을 상실해요.

그 사람의 말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게 되어요.

그래서 그 목사에게 묻게 되고, 그러면서 그 목사에게 종속되어 가는 겁니다.


성도 안에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 종속될 이유가 없어요.

만약에 당신이 성경을 덮고, 어느 한 사람의 말만 따른다면

그건 미혹당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물론 성령을 받은 목사는 혼자 다 아는 척 할 수가 없어요.

이런 짓도 (자기 추종자, 자기 친위대 구성, 교주들이 하는 짓) 할 수가 없어요.  


설령 아는 척 하다가도 돌이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을 조심하게 되어요.

자기 안에 성령이 늘 죄성을 고발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화인을 맞으면 안 고쳐지고

그걸 나무라는 사람은 적대시하고, 비 복음적으로 몰아붙이고 원수처럼 단정합니다.


이렇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모두가 신(神)이 되고자 해요.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교주가 되고자 하는 본성을 타고나요.

그렇기 때문에 목사로서도 추앙받고, 대접받고, 스승으로 남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교주가 되고자 하는 본성이 꿈틀 거려요.

누가 저의 말에 공감하고 칭찬이라도 해 주고 따르면.. 우쭐하고, 다 얻은 것 같이 교만해 져요.


이런 연약함을 하나님께서 아시곤, 늘 흔들어대고 있으니 감사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별 신앙을 다 겪어보게 하고 산전수전을 다 겪게 한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란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단에도 빠져 보고!

은사주의에도 미쳐도 보고!

율법주의에 젖어 보기도 하고!


미친 듯이 전도도 해보고!

열심히 특심할 정도로 교회에 봉사와 충성도 해보고

밤이슬 맞아 가면서 기도도 해 보고!


귀신도 쫓아내 보고!

병도 고쳐 보았어요.


비록 짧게 한 것도 있고, 길게 한 것도 있지만, 겪어 보고 나니 이젠 조금 알 것 같아요.

‘아 영적 세계가 참으로 무서운 곳이구나! 마귀의 궤계가 참으로 교활하고 간교하구나!’



◑성령의 역사의 증거..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그러니 이제 조금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안에 들어오고 나니 과거에 행하던 각양의 것들로부터 벗어났어요.

이젠 모든 은사의 실상이신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제 개인적 생각엔, 마귀가 목사를 제일 많이 미혹하고

설교에 제일 많이 역사하는 것 같아요.

설교 속에, 자기 생각이 개입되고, 자기 감정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안한다고 하여도 마귀가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자기 생각을 심어 놓아요.

저도 설교 하면서도 움찔 움찔 놀래고 하고

설교를 다 하고 난 후에도 깜짝 깜짝 놀래요.


사도바울이 내가 이 복음을 증거하고

자신은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하는 심정이, 백번 이해가 되어요.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잘못 전할까봐 두려운 겁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주께서 이끄시니, 그 이끌림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소고삐 끌리듯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설교는,

말은 유창하게 하고 전개하는 논리는 화려한데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없어요.

여전히 건조해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성령이 없는 사람은,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심령이 강포하고 패역해져 가요.

심령이 부드러워지지 않고, 사막에 심기운 나무처럼 매 말라 가요.


그러나 성령 안에서 증거 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영(靈)이 살아나요.


속사람이 강건해져가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가요.

나에겐 의가 없음을 알아요.


하지만 감사가 나오고, 긍휼이 나오고, 용서가 나오고, 사랑이 나와요.

예전엔 맞보지 못한 것들이 툭툭 터져 나와요.

안 하던 짓을 해요. 수가성 여인처럼 물동이 내 던지고 전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들이 나도 모르게 툭툭 터져 나온단 말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예수님을 만난 사람치고 이런 생명의 역사가 없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가 극한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였고, 세상을 이기는 모습으로 살았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이에요.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살아 역사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에요.

구원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싸움인 겁니다.

자기 안에 죄와 싸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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