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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성품 divine nature에 참여

LNCK 2012. 3. 22. 14:22

 

◈신성한 성품 divine nature에 참여     벧후1:4~15        출처보기 

 

하나님은, 땅에서 자기 백성을 빼내십니다

신자의 삶도 험난합니다 에 계속 이어지는 설교문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성도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벧후1:4~5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 divine nature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신성한 성품’이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개역에는 '신의 성품')

성도가 된 것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셔서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은,

자기백성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키 위함이라고 했어요.


마귀의 마음으로 살던 자들을 자기 피로 사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라고..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이러한 열매가 없는 자는 소경이라고 했어요.


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멀리 보지)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베드로사도는, 지금 이건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주께서 나에게 지시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벧후1:16전후


그러므로 내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당부한다고 하잖아요.

벧후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그런데 우린 이런 사도들이 말을 귀 기우리지 않아요.

공교하게 지은 이상한 말에 속아서   *공교한 말, 골2:4


사도들이 그토록 금지하는 것들을 참 진리로 여기고 따르며,

마치 반(反) 성경적으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인 줄 알고..


죄를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온전해지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린 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살아 내지를 못합니다.


서로 죄인이니, 서로 불쌍히 여기고 살자는 겁니다.

서로 영적으로 병신끼리 싸우면.. 보기가 흉합니다.

병신이면 서로 보듬고 살아야지.. 싸우긴 왜 싸웁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십자가의 비밀한 것을 말하고, 천사의 말을 하여도

예수의 사랑이 나오지 않는 자는

바울의 지적대로 ‘예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습니다.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예수정신의 삶을 토해내고!

그 안에 마귀가 있는 사람은.. 마귀적인 삶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귀신의 믿음을 가진 자들(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신의 성품에 관심없는 자)은,

십자가 정신으로서, 예수의 삶을 살아 내지를 못합니다.


용서 받은 것이 없고, 탕감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용서가 나오지 않고, 긍휼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토하여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그 속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십자가를 논리적으로 말하고, 복음의 비밀을 말한다고 하여도

정작 본인은 그 복음을, 생명으로 살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 속에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있기는 있어도 살아있지 못하고, 신앙이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가 없으니, 예수의 마음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자는

반드시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삶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자기 영광을 그려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몸은 도화지와 같아요.

이게 또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도 안에 와 계신 것은, 성도의 몸으로, 예수님을 그려내고자 함입니다.


예수님께 받은 것을 토하게(나타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겁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품으라’는 말은 이미 예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주어졌으니

암탉이 알을 병아리로 부화시켜 내듯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토하여 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삶으로 꽃 피우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삶으로 풀어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

자기를 비워 종이 되는 마음입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음을 품은’ 성도라고 한다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서로 돌아보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 짐을 대신 져 주는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로부터 섬김을 받았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섬김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완벽해진다는 말은 아니고, 이런 경향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간섭을 해 가세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반드시 예수님처럼, 용서와 섬김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받은 십자가는.. 남을 정죄하고 죽이는 십자가가 아니에요.


용서받은 자로서.. 남을 살리는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생명을 살리는 자이지.. 죽이는 자가 아닙니다.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몫이에요.

우린 받은 용서를 토해내고 받은 긍휼을 토하여 내면 됩니다.


그러므로 ‘행함’이란

우리더러 살으라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계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살아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내주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삶은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갈5:23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이와 같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 닮은 인격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십자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서,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복음을 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주어진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은사(선물)입니다.

은사이므로.. 연구하고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은사가 덮쳐오면 믿어집니다.

논리적으로 말을 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믿어집니다.

믿어지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설교는 논리가 아니에요. 증거에요.

증거가 되려면,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만나서 일으킨 사건이 있어야 해요.

자기백성들에겐 반드시 예수님이 찾아가 일으킨 사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인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몸에 새겨 놓은 흔적들이 있어요.

성도는 자기 안에 일어난 이 사건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 이런 용서를 받았다!

나 이런 은혜를 입었다!

난 이런 사랑을 입었다!

예수 때문에 일어난 사건을,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추상 명사입니다.

그런데 동사로 쓰여져야 합니다.


추상이란.. 보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동사로 기록한 것은.. 살아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종합하면 믿음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믿음은 반드시 가시적으로 어떤 삶에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기가 살았으면 에어컨을 돌리듯이

믿음이 살았으면 어떤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그 믿음이 일으킨 사건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지도록,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내는 의의 도구로 반드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속에는, 늘 예수님의 모습이, 툭툭 터져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이미 구약의 성도들에게도 일어났어요.

그래서 바울도 구약의 성도들이 토하여 낸 신앙고백들을

자신의 편지에 자주 언급하였던 겁니다.


바울이 잘 사용하는 ‘도살할 양’이니!

‘만물의 찌끼’

‘세상의 구경거리’니! 라는 말은     주1)

모두가 시편 기자가 토하여 낸 고백들입니다. 


시44:11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13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19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시편기자는 지금 하나님에게 원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왜 나를 조롱당하게 하고 죽음에 넘기느냐고 탄원합니다.


잘 보시면 이러한 일을 시도한 것이, 주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주께서” 이렇게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구조 속으로 밀어 넣고 계신단 말입니다.


시편의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이 고백한 내용이고, 바울이 고백한 내용입니다.

결국 시편기자는, 구약에서,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주여 깨소서!’  시44:23

‘일어나소서!’     시44:26

‘왜 주무십니까!’ 


이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친 그 절규와 같습니다.

예수님도 외쳤고!

바울도 외쳤고!

지금 저도 외치고 있어요.


이런 삶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주여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이므로 이 세상에 남은 작은 예수입니다.


     본문 벧후1:1~15절을 가만히 읽어보면,

     예수를 믿는 것은.. 반드시 삶으로 그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삶의 증거’를 외치지 않고,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외치는 것은

     베드로 사도는, 영적인 '소경'이라고 말합니다. 벧후1:9


     그리고 자기가 소천한 후에,

     사람들이 ‘말 뿐인 믿음’을 가질까봐 염려가 되어

     베드로후서를 기록한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벧후1:15


정리하면, 진실로 예수를 믿은 사람은

신성한 성품 divine nature에 참여하도록 participate, partakers 부름 받았습니다.


성경 한 두 구절만 읽고서,

예수를 믿었으니,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니까,

이제는 ‘가내안전, 사업번창’을 목표로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일 나는, 내 손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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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다 지금이 나은 성도   (펀 글) 


죄 사함 받은 사실을 지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진리를 아는 것이 더 귀하게 생각이 되면

당신은 자유자요,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보다

뒤돌아 나올 때에 더 큰 찬양을 부르면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처음 주를 만났을 때에, 죄인임을 알고 통곡한 것보다

그 거룩하심 앞에 더 무참한 자신을 본다면

당신은 영적인 회개를 하는 신령한 자입니다.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감사한 것보다

십자가 건너편에 옮겨 놓으신 그 업적(부활 등)을 깊이 새기면

당신은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자신의 잘 잘못의 행위만 가리다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상한 심령이 된다면

당신은 처음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입니다.


주1) ◑나는 끄트머리이다           출처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신학을 할 때는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가 선망의 대상입니다.

동기들 중에서도 은근히 경쟁이 생기고 시기나 질투감도 일어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어디 가서 설교를 한다거나 대표기도를 할 때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의식합니다.


당연히 설교를 잘 하고 싶고 기도를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누가 설교를 잘 한다고 하면 은근히 으스대게 됩니다. 설교로 사람들의 맨 앞줄에 서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자들 중에는

상상 외로 고난과 가난과 질병과 고독 속에서 반쯤 죽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신할 정도의 고통 속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이루며

복음을 가진 자의 프라이드로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갑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만 있을 뿐, 외모는 완전히 끄트머리입니다.

‘거 참 이상하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그렇게 구차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 교회 목사는 사례가 얼마며, 얼마 전에는 아이들이 미국에서 유학하는데 집도 사 줬다고 하던데...’


이런 사람에 비하면 구경거리입니다. 거지 중에 상거지입니다.

바울의 이야기지요.


그리스도를 맡아 그 말씀을 이루는 충성을 이루려면 목숨을 다해야 하는데

소유가 있는 사람이 존재를 드릴 수 있을까요?


인간은 소유가 있으면 절대로 존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쫄딱 망해야 합니다.

돈만 아니라 자신에게 가치가 되는 모든 것이 다 부도가 나야 합니다.


야곱처럼 모세처럼 바울처럼 말입니다.

그래야 남에게 잘 가르쳐 유명해 지려는 선생의 유혹에서 돌아서

해산의 수고를 통해 영혼을 낳는 아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 그러나... 힘에 겹습니다.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것 같이 맨 꼴찌에 두고

그 비참함을 세상의 구경거리로... 눈물이 나죠.

아니 더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지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그네들이여!

타고난 목숨으로 꼴값하지 말라고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 같이 깻묵 짜듯 하시고

맨 끄트머리에 두신 하나님이 나중에 ‘뒤로 돌아’ 하실 때가옵니다.


그 때까지 믿음으로 인내를 이루어 가십시오.

비록 입으로는 비명소리는 질러대지만, 속으로는 할 만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