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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했던 제자들

LNCK 2012. 6. 13. 23:11

◈당황했던 제자들         막14:27~31        출처, 정리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당황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제자들은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그 즈음 제자들은 흩어져 버리는

본문의 정황은, 성경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유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주로 하신 일이라고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키우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마지막 지점을 앞둔 순간에

3년 동안을 동고동락하고 모든 걸 다 주며 사랑했던 그 12제자가,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버릴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다 흩어지며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갈 것을 예고하십니다.

(또 그대로 다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실패가 어디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과, 그 희생과, 그 지혜를 다 동원해서 이루신 삶의 결론이

이런 실패로 끝나야 된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 본문을 읽을 때.. 자세히 읽어보면..

제자들이 비겁해서 도망간 게 아닙니다.


이들이 연약하고 무서워서 도망간 게 아닙니다.

도망간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너무도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예를 들면, 만약 예수님이 이순신 장군님처럼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시며, 북을 둥둥둥 계속 치면서

어떤 결사항전의 각오를 끝까지 피력하셨다면,

대다수 제자들은.. 도망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용감하게 같이 죽고자 했을 것입니다.


일전에 도마도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용감하게 말했던 적도 있었고,


또한 잡히시기 직전에도 제자들은

‘우리가 죽을지언정 주와 함께 하겠나이다!’

라고 어떤 의리와 전의를 불태웠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립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겠다’는 말을, 실천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조금만이라도 맞서 싸우고자 하는 태도만 보이셨더라면,

제자들이 다 도망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장 예수님이

너무도 순순히 잡혀가 버리시니까..

부하 12제자들은.. 유야무야 되어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들이 ‘비겁한’ 것보다는,

예수님의 ‘순순한 항복’이 더 결정적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를 보십시오.

인류역사에서 수천 번 일어난 모든 전쟁에서

보통사람들도 다 이렇게 했어요.


대장이 선두에 서서 ‘돌격 앞으로!’ 하면,

부하들도 대장을 뒤따라 ‘돌격 앞으로!’ 하며.. 나가서 죽었습니다.


제자들이 특별히 비겁해서 이걸 못했겠습니까? 아니에요.


유대역사만 보더라도, 수없이 많은 전쟁들을 치러왔고,

이방민족과의 전쟁이 계속 있었습니다.

‘마카비 독립 전쟁’때도 무력으로 용감하게 싸워서, 독립을 얻어내기도 했고,

(후에) 로마와 전쟁 때는, 마사다 요새에서 3년을 버티다가, 960명이 몽땅 자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용맹한 성향을 가진 유대민족이요,

더욱이 12제자들은, 지금 30세 즈음의, 모두 피가 뜨거운 나이입니다.


예수님이 한 번만 당차게 결사항전의 자세로 나오셨더라면

다들 뒤따라,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리에 나섰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너무 비겁하게만’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은,

지도자인 예수님의 책임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냥 곧바로 죽음을 향해 가버리고,

너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여버립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균형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이, 대적들 앞에서, 나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결사항전이 있었다면

12제자들도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대적을 물리치시고, 승리를 얻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 전혀 없이

곧바로 자기 죽음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여버리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목표로 나아가셨습니다.


삶과 승리와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을 수는 있지만

죽음을 목표로 해서 나가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살려고 애를 쓰고, 승리하려고 애를 쓰다가,

안 돼서 좌절하다가 자살할 수는 있지만,

아예 죽음 자체를.. 삶의 목표로 삼고,

죽음 자체를..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초연했다는 성현들,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그 누구도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는 않았어요.


소신껏 살았고, 

진리를 발견하며 살기 위해 애쓰다가,

그러다 죽음이 왔을 때,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인 것뿐이지,

죽음을 향해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의도적으로 죽음을 향해 가버린 거예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의도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승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죽어버립니다.

최선을 다해서 쟁취하려는 마음이.. 죽어버립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등반가 故박영석 대장은

생전에

‘실패할지언정 남은 1퍼센트의 가능성을 보고서라도 도전한다면,

그 도전 자체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비록 도전해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 도전의 결과에 관계없이,

‘고상한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그 자체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자식의 문제, 사업의 문제, 건강의 문제, 인생의 모든 문제 앞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을 정복하려는 등반가 같은 도전의식을

깡그리 다 상실한 것이요.. 초반부터 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기독교 신앙인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허둥지둥 당황한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당황해 본 적이 있습니까?


현대인이 멋진 삶을 위해 살도록 돕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아닙니다.

박애정신으로..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죽도록’ 가르칩니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죽으라고 가르칩니다.


   너무 염세적이라고요?

   물론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한 후에, 자기 사명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처럼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자기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지는,

내가 사명에 충실해서, 내 직업에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먼저 선결 과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난 다음에’

새 생명을 얻어서.. 자기 사명을 갖고서, 열심히 뛰어가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

즉 ‘이 세상에 대해 죽는 일’ 없이


선진 국민으로 살기 위한 기독교..

웰빙 삶을 살기 위해서 믿는 기독교..

이것은 다 ‘유사 기독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유사 :비슷하지만 다른 것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신 걸까요?


‘하나님 사랑’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마22:37


이 세상에서 내가 성취하고 싶고/정복하고 싶고/갖고 싶은 것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밖에 없어요.


‘하나님 사랑’을 이루고 싶은 사람은,

온전한 사랑을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자원해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살아보고 싶은 사람, 사업에 성공하고 싶은 사람,

무병장수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이용대상이고,

십자가도, 쉽게 죄용서 얻을 수 있다는 이용도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현실의 승리를 위한, 그 어떤 최선의 노력도 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공생애의 목표는.. 오직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기꺼이 가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각자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에 방해가 되는 ‘세상’에 대해

먼저 십자가 죽음을 반드시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배설물’로 보이는 사람이

자기 사명과 푯대를 향해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바른 정로입니다.


그런데 신자들 중에 상당수가

세상이 ‘배설물’로 보이지 않고, ‘연인’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연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보고 ‘나를 좀 축복해 주세요!’ 애걸하고 있습니다.

그런 축복은.. 받으면.. 오히려 자기 멸망인 셈이지요!


우리는 자꾸 착각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도, 교회의 부흥에 적용하려고 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명 감당을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 야망이

‘교회의 부흥’과, ‘사명’으로 아름답게 겉포장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먼저 되어져야 할 사건은

‘죽는 거’예요.


‘교회의 부흥’과 ‘사명’(내 명예, 입신양명)을 간절히 원하는

내 육신이 먼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십자가를 향해,

순순히 나아가서 죽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기쁠 일도, 슬픈 일도 없이

-내 목숨 걸고 이루어야 할 일도 아무것도 없이

죽은 자가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임을.. 가르쳐 주어야 됩니다.


그 십자가를 누가 스스로 원하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택한 자녀는, 주권적으로, 강권적으로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기쁠 일도, 슬픈 일도 없고,

-내 목숨 걸고 이루어야 할 일도 아무것도 없이

죽은 자가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 ‘십자가-자기 죽음’의 과정을 분명히 거치고 난 다음에,

다시 부활해서

자기 직업에 열심 내고, 자기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한 다음에,

푯대를 향하여, 자기 사명의 길을.. 죽도록 달려가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이 도망간 것은..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죽음을 너무도 순순히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의 앞에서

이들은 허겁지겁 당황해하며 패닉상태에 빠졌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십자가 죽음’ .. 이게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또는 자기 십자가, 자아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처럼 당황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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