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베개 인생 창28:10-16 출처보기
▶‘가끔은 아이에게 팔베개를 해 주세요!’
얼마 전 저희 집 아이가 책을 보다가
갑자기 제게로 달려와서 보여준 내용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아빠는 이미 잘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가끔은 아이에게 해주는 팔베개 !
그것은 우리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크고 따듯한 사랑을
아이들로 하여금 느끼게 해 주는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날 결심했습니다.
‘지금보다는 좀 더 자주 팔베개를 해주리라!’
부모님의 팔베개를 통해서, 진한 사랑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
그것은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고통의 돌베개가, 사실은 사랑의 돌베개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만나고 있는 야곱!
그는 오늘 차디찬 돌을 베개로 삼아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가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향하여 가던 중,
어느 한 곳에 이르러 돌을 베개로 삼아 거기 누워 자고 있었다’ :10~11
참으로 애처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개라면 그것이 어떠해야 합니까 ?
무엇보다도 그것은 폭신폭신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야곱은 지금 차가운 돌을 베개로 삼아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왜죠 ?
그가 왜 지금 이렇게 안쓰러운 모습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까?
야곱의 돌베개 !
그것은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있는 돌 베개였습니다.
그는 지금 형의 분노를 피해서 도망자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형의 분노를 산 것은, 형에게 돌아가야 할 장자의 축복을 그가 가로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그의 돌베개는 <두려움>이 가득한 돌 베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죄로 인한 <괴로움>이 가득한 돌 베개였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 가득한 돌 베개였습니다.
그것은 황량한 벌판에 나 혼자라는 생각이 가져다주는 <고독>이 가득한 돌 베개였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베고 있는 베개가 이런 베개는 아닌지요 ?
우리는 요즘 너무나도 좋은 소재로 만든, 푹신한 베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베개가 마치 ‘야곱의 돌베개’처럼 여겨져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성도님들도 없지 않아 계실 것입니다.
두려움과 괴로움과 불안과 고독의 돌베개!
진정 우리가 베고 있는 베개가, 그런 베개는 아닌지요?
왜요?
내가 왜 이런 베개를 베고 오늘을 살아야만 하는가요?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의 인생을
이런 곳으로 인도하셨는가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25:23
보십시오.
야곱이 어머니 태 중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지금 쫓기는 신세가 되어야 합니까?
그런데 왜 그가 황량한 벌판에 혼자 버려져야 하고,
차가운 돌 베개를 베고 자야만 하는 신세가 되어야 했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야곱의 생애를 아십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멋진 인생, 행복한 인생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복이 될 만한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그 일을 했습니다.
때로는 수단과 방법도 그는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 줄로 알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왜 하나님을 그렇게 열심히 따랐고 섬겼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가 진정으로 바라고 소망했던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물질적이요 가시적인 축복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진정으로 바라고 소망하는 산타클로스와 그 선물처럼,
하나님을 이제까지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야곱이 오늘 차가운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인 줄로 알았던 바로 그 길이
고난과 시련과 아픔에 이르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그가 우연히 접어든 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이 그처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라면
약속이 있는 인생에게, 그 길은, 결코 파멸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훈련과 연단을 위한 하나의 코스였습니다.
신8:2 말씀도 그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8:2
결국 무슨 말씀입니까 ?
약속이 있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인생이 거친 광야를 만나게 되는 것은
그 인생을 바로 잡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인생을, 복 있는 인생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자기가 계획하고, 자기가 소망한 일이 잘 풀려 나갈 때,
그 때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거친 광야를 만났을 때,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러기에 인생의 광야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께서 전하고 싶으신 말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실 수 있는 시기요, 장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전하고 싶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거친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지식,
그런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게 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회적 지위와 넉넉한 물질,
그런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분석하고 판단하게 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광야는, 우리네 이런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들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약속이 있는 인생들에게는, 인생의 광야가 결코 저주의 땅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의 돌베개는, 결코 저주의 돌베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저주에서 축복으로 그의 인생을 돌려놓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이 가득 담긴 돌 베개였습니다.
오늘 내가 베고 있는 인생의 돌베개,
그것이 아무리 <두려움>이 배에 있는 돌베개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괴로움>이 배어 있는 돌베개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불안>과 <고독>이 진하게 배어 있는 돌베개라 할지라도,
그 모든 돌베개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돌베개가 놓인 자리에 계심을.. 내가 알지 못했도다!
▶더 나아가,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이 거닐고 있던 인생의 광야,
그가 차디찬 돌베개를 베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바로 그 자리!
그 자리에 세워진 사닥다리가 <어디까지> 연결되어져 있다고 합니까?
하늘까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하늘까지 그것이 닿아 있다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 사닥다리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고
본문은 우리에게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우리에게 오늘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야곱이 차디찬 베개를 베고 있는 바로 그 자리!
그 자리에 야곱이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 13절 이하를 보십시오.
위로의 메시지가 가득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리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해서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13~15
여러분, 어떻습니까?
참으로 귀하고 놀라운 소망의 말씀들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
참으로 인생의 광야에서 우리 모두가 결코 놓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광야를 걷게 하시지만,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차디찬 돌베개를 베지 않으면 안 되게 하시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 혼자 그 길을 걸어가도록 하시는 일은.. 결코 하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6절 말씀을 보시지요.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6
야곱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을 버려두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그는 새롭게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인생의 맨 밑바닥에 머물고 있을 때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속이 있는 인생이 머물고 있는 자리!
그 자리가 아무리 험하고 고된 인생의 자리라 할지라도,
그 자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자리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만남!
그 만남을 가로막을 수 있는 물리적인 장벽은,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과 육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것이 여러분과 하나님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개의치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영으로 영이신 하나님과
언제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지금 이 땅에 충만히 임재해 계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두려움이 가득한 삶의 현장!
괴로움이 가득한 삶의 현장!
불안이 가득한 삶의 현장!
고독이 가득한 삶의 현장!
거기에도 계십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 분과 교제를 나누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게 던져진 돌베개 !
그러기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만 하는 인생의 광야!
그런 인생의 광야 중에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광야는 없습니다.
시간 낭비라고 여길 만한 그런 인생의 광야는 없다는 말입니다.
차디찬 돌베개를 베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자리 !
그 자리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와 깊이 있는 교제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기억하십시다.
그 분은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머물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차디찬 돌을 베개로 삼아 깊은 잠에 빠져들기 전까지
자신과 함께 인생의 광야를 걸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마지막 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거기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외침이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바로 이 외침!
이 외침이 이제는 오늘 우리 모두의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벅찬 감격으로 외친 그의 이 외침이
이제는 나의 외침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보았습니다.
야곱이 돌을 베고 누웠던 자리 !
그 자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리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리라 !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리라 !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여러분, 여기 이 약속의 말씀을 가볍게 넘기지 마십시오!
야곱이 이제까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피를 나눈 형제까지도, 심지어는 아버지까지 속여가면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거머쥐어야만 속이 편한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그가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은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
바로 그 의지가, 여기 이 약속의 말씀들 안에는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결심!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그 결심을 깨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처럼 누구도 깨어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결심!
바로 그 결심이, 결국은 야곱을 변화시키고야 만 것입니다.
▶정리하면,
야곱!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떠나서 그의 인생을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기 멋대로의 인생을 고집한다면,
그런 인생은 고달픔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야곱의 돌 베개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야곱의 돌 베개를 통해서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았습니다.
여기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때로는 우리 인생 안에도
<거친 광야, 돌베개>를 허락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차디찬 돌을 베개로 삼아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자업자득이었습니다.
그가 두려움 속에 머물게 된 것도!
그가 괴로움 속에 던져지게 된 것도!
그가 불안과 고독의 현장에 던져지게 된 것도!
그 모든 것이 그의 <자업자득>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야곱이 머물고 있는 땅 !
그 척박한 땅을 <벧엘>로 만드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시지요.
거기 그 땅 이름을 잠에서 깨어난 야곱이 <벧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벧엘>.. 그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눈물과 회한과 탄식이 있는 그 땅!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땅!
그 땅이 변하여 오늘 기쁨과 소망과 환희가 있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전환점, 삶의 Turning point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눈물과 탄식과 원망과 불만 등,
우리네 삶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한꺼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습지만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바가 있는 이야기 하나를
여러분께 소개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서로가 펜팔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은 서로의 사진을 교환한 후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마다 최선을 다해서 예쁘게 꾸미고 그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
멀리서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도 실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연인즉 이랬습니다.
고양이가 꼬리를 내리고 강아지에게 다가왔습니다.
고양이가 그처럼 꼬리를 내리는 것은 대단히 반갑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아지는 그처럼 대단히 반가울 때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강아지는 그럴 때 그렇게 꼬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아지는 꼬리를 높이 세우고 마구 흔들어 댑니다.
강아지가 꼬리를 내리는 경우는 상대방을 대단히 경계할 때이지요!
그러니 강아지가 고양이를 오해할 수밖에요!
강아지는 고양이가 자기를 반기지 않는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상대방을 오해하기는 고양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마구 흔들면서 다가서는 강아지를 보고
고양이는 강아지가 자기를 반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양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강아지가 자기를 경계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
서로의 표현 방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돌베개 인생 !
그것은 결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베고 있는 <인생의 돌베개!>
그 베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이해하시고
오늘 다시 한 번 주님을 바라보시며 주님과 함께 힘찬 걸음을 내디디시는
우리 영암의 가족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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