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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밑천

LNCK 2012. 7. 24. 23:00

◈성도의 밑천 (밑거름)               롬15:13            출처보기, 편집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밑천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자본은 하나도 없이, 전부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다가,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해 보십시오.

이렇게 되면 거의 모든 수입을 이자 갚는 일 때문에

결국은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수고와 애를 쓰고도 문을 닫게 되는 어려운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밑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업에는 반드시 밑천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업은 밑천이 넉넉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농사를 지을 때는 밑거름을 두둑히 주어야 합니다.

퇴비를 많이 만들어서 땅을 갈아서 뒤엎을 때 밑거름을 많이 뿌려 주면

토양 자체가 좋아집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갈아서 뒤엎어 씨를 뿌리고 싹이 난 다음에

비료를 자꾸 주게 되면, 그 곡식은 자라서 열매를 맺을는지 모르나,

땅을 못 쓰게 되는 것입니다. 산성화되기 때문입니다.


밑거름을 많이 주면 토질도 좋아지고, 거기에서 지어지는 모든 곡식이 잘 되고,

열매가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밑거름이 두둑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성도들의 밑천,

믿음의 밑거름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 안의 기쁨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쁨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혼자 있어도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그저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가하면 가정에 들어갔을 때, 가정생활에 전혀 기쁨이 없다면

그 가정에 들어가고 싶겠습니까? 가정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교회 생활에 전혀 기쁨이나 재미가 없다면,

결국은 교회 생활을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상 기쁨이 없다 혹은 내가 직업을 가졌는데

그 직업에 대한 기쁨이 없다면, 결국은 그 직장 생활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는 생활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다고 하면 억지가 되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서 하고 마지못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삶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이 주는 (잠깐) 기쁨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돈이 필요하고 아쉽습니다.

자녀들은 유학 가서 공부하고 싶어 합니다.

부모는 유학을 시켜 주고 싶은데 돈은 없습니다.

그 때 돈이 생긴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것은 돈이 주는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잠시 기쁜 것입니다. 유학 가도, 여전히 문제가 많습니다.

건강 문제, 결혼 문제, 취업 문제,

지금 외국에 유학을 가 있는 자녀도, 보내는 부모도.. 여전히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런가하면 회사나 어느 직장에 친구들과 함께 들어갔는데

다른 친구들은 승진도 하고 잘 나갑니다. 그러나 나는 승진을 못합니다.

얼마나 주눅이 들겠습니까? 그 때 나에게 한 자리 높아지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굉장한 기쁨이 있을 겁니다. 그 기쁨은 자리가 주는 기쁨입니다. 즉 세상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잠시 기쁜 것입니다.

나보다 앞서고, 나보다 돈 잘 벌고, 나보다 빠른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동안 내가 갈고 닦은 실력이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오늘에 와서 인정을 받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것은 나의 실력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실력이 나 보다 앞서게 되면, 나는 또 다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이 주는 기쁨은, 우리 성도들의 밑천은 못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밑천이라 할 만한 기쁨은 무엇인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하나님이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 즉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우리 성도에게는 밑천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하나님이 빼앗아 가지 않는 이상, 세상 사람들이 빼앗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가정이나, 우리 교회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려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위 말씀의 약속은 ‘기쁨을 우리 밑천으로 충만하게 주신다’인데,

실제로 많은 성도들은, 기쁨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기도가 약화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약화된 가정과 교회,

방문해보면.. 분위기가 썰렁합니다. 생동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살아있는 가정과 교회,

심방가보면.. 분위기가 살아 있습니다. 생동적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무리들을 보시면서도, 기뻐하십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12:32


‘작은 무리’는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항상, 군중은 많지만, 제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작은 무리를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작은 무리들과, 하나님은 항상 함께 일을 해 나가십니다.

성경 4천년 역사의 증거요, 지난 2천년 역사의 증거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슨 큰 일을 이루기 이전에,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작정한 적은 수의 크리스천에게는

하나님이 그야말로 참으로 친밀하고 사랑이 많은 친아버지로 인식이 됩니다. ↖


적당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친밀한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그렇게 감격스럽고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세상이 걸어가는 것과 반대되는

좁은 길을 선택한 참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체험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친아버지로 경험이 됩니다.


그러므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은

대충 믿고 대충 살아가는 대중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별로 피부에 와 닿는 큰 의미도 없고, 큰 격려가 되지도 않는 말씀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창조적 소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은 항상 살아서 역사하는 위대한 약속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십니다.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큰 밑천입니다. 영원한 기쁨입니다.

밑천이 두둑하십니까?



◑2. 믿음 안의 평안


이성봉 목사님 설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를 취하여 바다에 던지라. 너희가 풍랑을 만난 것은 나의 까닭이다.’

하나님이 요나를 사랑하시고 택하시고 훈련시키심은 이 한마디

내 까닭이라고 한 데 있는 것이다. 곧 예수의 정신이며 책임감의 말이다.


첫 아담은 제 죄도 남에게 전가시켰다. 너 왜 선악실과를 먹었느냐? 하실 때에

당신이 지어 주신 아내가 먹으라고 하여서 먹었다고 하였다.

황송하게도 그 죄를 하나님께 전가시키고 아내에게 전가시켰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 내 까닭이라고 하사 순백의 주님이 순흙이 되사

동양 사람의 죄, 서양 사람의 죄, 옛날 사람의 죄, 현대 사람의 죄,

만민의 죄를 다 걸머지고 변명 한마디 안 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소인일수록 책임을 회피하나 위대한 인물은 책임을 강하게 지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밤낮 남의 까닭이라고 한다.

이것은 영감 까닭, 이것은 마누라 까닭, 시어미 까닭, 며느리 까닭,

자식 까닭, 부모 까닭, 교회서는 목사 까닭, 장로 까닭,

민주당 까닭, 자유당 까닭, 밤낮 남의 까닭, 남의 까닭하며

원망과 불평으로 분쟁과 파쟁을 일삼고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설교하는 데에 부인 신자가 졸고 앉았는 것을 보고

발로 강단을 구르며 여보, 자매! 웬 잠을 그리 자오?

그것 참 종자 조럼(졸자 노릇) 하겠구만.

이 다음에 교회 올 때에는 고춧가루를 가지고 와서 졸음 올 때에 눈에다 치시오 하니


그 부인은 한참 졸다가 깨어 목사에게 눈을 흘기며

흥, 내 눈에다 고춧가루를 치라고 하지 말고 목사님의 설교에다 고춧가루를 치시오.

설교가 싱거워서 좁니다.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그 교회는 볼장 다 봤지요.

목사는 신자가 존다고 야단이고, 신자는 목사가 설교를 잘못한다고 야단이니

이 일을 어찌할꼬!


어느 교회의 늙은 집사님은 목사님이 설교를 잘못하고 강단에서 내려오니

목사님의 손을 잡고 훌쩍훌쩍 울었단다. 목사님이 집사님 왜 우십니까? 하고 물으니


‘목사님이 오늘 설교를 잘 못하신 것은 내 까닭입니다.

내가 목사님의 주일 설교를 위해서 토요일 밤에는 항상 기도를 하였는데

지난 밤에는 손님이 와서 기도를 못했더니 목사님 설교 죽 쑤었습니다.’ 하고 울더란다.

그 교회는 참 아름답고 사랑이 끓는 교회이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이 사회에서 피차 내 까닭이란 책임을 지고

서로 이해 깊은 사랑으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화평의 꽃이 만발하고 희락의 열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자신의 축복이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 설교문에서 눈여겨 볼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만인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제자된 성도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위 설교에 나온, 토요일에 중보기도하는 여집사님처럼)

비판과 정죄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 peacemaker’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위 말씀에, 주님은 평강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평강의 택배가 이미 도착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박스를 풀고, 꺼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요.


즉, 주님이 십자가에서 열어놓으신 ‘화평/평강/peace’를

열심히 베풀고, 나누어주고, 사용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주님은, 오늘날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남자는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해야 하고,

사업가는 자본(밑천)이 두둑해야.. 매사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크리스천은, 주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밑천이 두둑해야

매사에 자신감이 생기는데,

본문에 보니까, ‘충만하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

그것을 수령해서 쓰는 것은, 이제 내가 해야할 몫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3. 믿음 안의 소망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위 말씀은, 부활이.. 성도에게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 제자들은 실의와 불안에 빠져서,

문을 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 지방은 낮에는 상당히 더운 지방입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을 닫고 있는 것은, 이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사 그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너희들이 왜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내가 십자가 못 박혔던 못 자국을 보라"고

하시면서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돈을 보고 기뻐했던 것이 아닙니다.

한 자리 올라갔다고 해서 그 자리로 인하여 기뻐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인생의 죽음이 끝난 줄 알았더니

죽음 뒤의 영화로운 주님을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죽음이라도 빼앗아가지를 못합니다.

이제는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하는 기쁨이, 바로 본문의 ‘믿음 안의 소망’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 삶에 큰 밑거름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모든 사람들이 가게 되는 길로 가게 될 때’는

     그 부활의 소망이.. 가장 복되고 소중한 소망이 될 것입니다.    <소망> 관련글 모음


밑천이 두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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