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cBLlgsA97aY&t=902s
◈한 알의 밀알 토마스 선교사와 그 열매 요12:24 여러 자료 편집
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순교한 개신교 토마스 선교사님이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었는데,
위 말씀처럼, 실제로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 한 번 자세히 알아보자.
선교란, 무슨 동화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게 순풍에 돛단 듯이 미끄러져 가는 게 아니라,
많은 우여곡절과 환란의 굴곡을 통과하지만.. 그러면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
◑1. 그의 사역과 순교
▲중국에 오기까지
1840.09.04. 영국 웨일즈에서 어느 목사님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런던대학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는
1863년 6월, 고향인 웨일즈,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는다.
1863년 8월, 그는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신혼의 아내 케롤라인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23세)
▲중국에 와서의 환란
1) 부인 케롤라인은, 몇 달간의 배 여행 끝에,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질병으로 곧 사망한다.
5개월의 항해 끝에, 1863년 크리스마스 직후에 상해에 도착했는데, 도착 후 얼마만에 사망했다.
지금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고통 중에 단연 최고의 고통은,
선교지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픔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가족을 잃으면 아프지만,
선교지에서 더욱 아픈 이유는,
‘고국이라면 안 죽었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충격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아내를 잃었다.
그것이 자신과, 영국의 후원교회에는, 큰 슬픔이었지만,
이게 우리 민족에게는 큰 축복의 시작이 되었다.
2) 엎친데 덮친 격으로, 토마스 선교사는,
상해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르 선교사와의 불화까지 겹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으로 옮겨가, 거기서 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으로 일했다.
그는 언어에 재능이 있어서, 중국어도 빨리 배웠다고 한다.
그는 너무 실의에 빠져서 ‘선교든 뭐든 나는 다 관두겠다!’고 포기하고
중국 땅에서 취직을 하며 살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 웨일즈까지 돌아가는 것도
배를 타고 몇 달을 가야하니,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의 마음은 실의에 빠졌으나, 고향으로 쉽게 돌아가지도 못하고
선교 사역도 제대로 못하고 있던..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1865년 1~8월 청나라 해상세관 통역사로 근무했다.)
3) 산동성 세관 근무 중,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윌리암슨 선교사를 만나게 되면서
지푸에서 윌리암슨 선교사의 일을 도우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지푸'에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중국에 와 있던 김자평 최선일(천주교인)을 만난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선교를 결심한다.
정리하면, 원래는 중국에 선교하러 온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으로 선교를 하러 온 계기는
<그의 아내의 죽음>, <선임 선교사와 갈등>, <조선천주교인과 만남>으로 본다.
고생과 환란이.. 그를 조선선교로, 또한 순교의 길로 인도했던 것이다.
▲서해 도서지역 선교
1865년 9월 서해안에 도착하여, 약 2달 반 동안 인근 선진포, 석호정, 만경대 등을 돌며
약 2달 반 동안, 1백여 권의 중국어 성경을 나누어주면서, 선교활동을 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후원을 받아서, 많은 중국어 (한문) 성경을 공급받고는,
조선 땅 백령도를 중심으로 서해 도서지방에 한문 성경을 나눠주었다.
그러던 중, 서울을 향해 떠나다, 배가 태풍을 만났으나, 구사일생 살아나서,
1866년 1월, 그는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간다.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돌아온 토마스는
북경에서 잠시 살며, 사역하게 되었다. 이때 잠시 영어교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직 조선에 가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통역관으로 이 배에 편승할 수 있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 호와 순교
이 배는 대동강에 그해 8월 16일 대동강에 최초로 진입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만경대에 머무르며, 조선 관리인 이현익을 납치하고, *8월25일, 셔먼호에 파견된 조선측 연락병
이에 항의하기 위해, 군민들이 몰려들자
제너럴셔먼호는, 총과 대포를 발사하여 민간인 7명을 죽이고 5명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8월 31일
그러자 평양감사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 호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셔먼 호는, 이틀을 버티며 방어하다가, 9월 2일에 종결되었다.
당시 그 배에는 미국인 3명과, 영국인 2명 (그 중 한 명이 통역사 토마스 선교사)
중국인 13명, 말레이인 3명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주1)
결국 제너럴 셔먼호는 모래톱에 좌초된 후, 평양의 조선 군대와 전투 끝에 승무원 전원이 죽었으며
토마스도 이 과정에서 사로 잡혔으나, 성난 평양 주민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는 끌려 나오는 순간에도, 사람들과 군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었다.
(배가 대동강에 약 17일간 머물렀으니, 그 사이에 성경을 나눠주었을 것이다.
한문성경 5백권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결국 그는 바로 그 대동강변에서 순교하게 된다.
1866년 9월 2일 저녁에 있었던 일이었다. (27세)
한국 땅의 개신교 첫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2.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그 열매
<당시 한국에 선교하러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개화하기 이전, 조선은, 외국에 대해 적대적인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서양인이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무조건 죽여 버렸다.
1866년, 병인박해(대원군의 천주교 탄압)가 일어난다. 주2)
그러자 조선에서 죽은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을 빌미로,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오는 병인양요가 일어난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조선인 천주교 신자는 약8천명이 처형(순교)되었다.
병인년은, 조선에서,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기독교인들을 무조건 색출해서 죽이던 시절이었다.
바로 그 즈음(1866년, 병인년)에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내가 들어가니까, 날 죽이시오!' 하고 조선으로 들어온 것이다.
조선의 분위기가 살얼음 같던 시절에, 제 발로 조선으로 들어온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어쩌면 선교하러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죽으러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게, 들어오자마자, 그는 대동강 변에서 순교하셨다.
누가 스스로 맨 정신으로 순교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주의 손이 강하게 그를 이끌어
조선 선교를 위해 순교의 길로 그를 인도하셨다.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들어올 때,
한문(중국어)성경을, 많이 가지고 왔다.
▲1. 박춘권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실 때에
자기를 죽이는 박춘권 병사에게 성경을 건네주었다.
(그 전에 배 위에서도 성경을 던져서 나눠주었다. 그러나 옷에 불이 붙자, 어쩔 수 없이 강으로 뛰어내렸다가
강에서 올라왔을 때, 순교한 것이다.)
토마스는 순교했지만, 그 박춘권은 후에 그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후에 박춘권은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토마스)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기도)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이것이 모두 3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중국에 도착한지 3년 사이에,
먼저는 그의 아내가 병으로 죽고,
그는 조선 땅에 선교하러 왔다가, 상륙하자마자 죽었다.
누가 보나, 그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요,
그의 죽음은 헛되게 보였다. (죄송한 표현으로 O죽음)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한 알의 밀알처럼 사용하셨다... ←이 글의 주제
그때는 몰랐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열매들이, 하나 둘씩 맺히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박춘권은, 나중에 예수를 믿고, 평안도 안주교회의 영수(오늘날의 안수집사 또는 장로)가 된다.
▲2. 박춘권의 조카
박춘권은 토마스 선교사에게 건네 받은 성경을, 자기 집에 숨겨두었다.
그런데 박춘권의 조카가, 그 책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다.
그는 후에 중국 선양에 가서, 거기서 로스 선교사를 만나
한글로 구약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3. 박영식.. 널다리 교회
또한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 당하기 전, 다른 사람에게도 성경을 나눠 줬는데
최치량 이라는 당시 12세 소년이 그것을 받아서
박영식 이라는 당시 평양성 관리(영문 주사)에게 건네주었다.
그 성경은 한문 성경이었다. 박영식은 성경을 보고 참 좋아했다.
당시에는, 책이나 종이가 매우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문 성경을 찢어서, 그 종이로 자기 집 방에 도배를 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눈을 떠도 성경, 밥을 먹을 때도 성경,
몸을 이리 뒤척여도 성경, 저리 뒤척여도 성경....
그래서 도배한 성경을 읽다가, 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이렇게 성경을 도배했던 박영식의 집은 얼마 안 있어 널다리 교회가 되었다.
널다리 교회는 나중에 평양 장대현 교회로 바뀌었다.
그 장대현 교회에서 1907년 정초에, 한국에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1907년 평양대부흥>의 최초 발단도,
40년 4개월 전 1866년, 토마스의 순교로, 최초로 촉발된 것이다. (40년이 차매...)
토마스 선교사의 한 알의 밀알이.. 한국의 평양대부흥까지 이어진 것이다.
▲4. 사무엘 마펫 선교사
몇년 후에, 조선이 개화되고, 평양에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들어온다.
그가 박영식의 집에 들어가 보니까, 그 벽에 중국어 성경책이, 벽에 도배되어 있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가 평양에 최초로 선교사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먼저 평양에 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다.
마펫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뜨겁게 기도했다고 한다.
'주여,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마펫 선교사는, 평양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선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펫은, 이기풍 목사를 길러내었다.
마펫 선교사의 4째 아들은, 대구의 <동산병원>에 의료선교사로 오래 사역하셨다.
지금도 살아계신다.
▲5. 존 로스 선교사로 불길이 옮겨붙다.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웨일즈의 하노버 교회에서 파송되었는데,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그의 아버지였다.
하노버 교회는, 몇 달이 지난 후에,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래서 하노버 교회는, 토마스를 죽인 조선 민족을 품고, 기도해 주게 된다.
그 기도의 응답이, 존 로스 선교사를 통해 나타났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 선교사가, 만주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었는데, (1872~1910 중국사역)
그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얘기를 듣게 된다.
그래서 존 로스도 조선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그러나 1866년 당시는, 조선이 굳게 꽉 닫혀 있던 시절이었다.
존 로스는, 심양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심양 남쪽 40킬로 지점에 <고려문>이 있었는데, 거기엔 조선인들이 중국에 무역하러 오던 고을이었다.
존 로스 선교사도, 중국에서 사모를 잃었다.
그의 부인이, 아이를 출산하다가, 소천한 것이다.
그래서 동병상련, 중국에서 아내를 잃은 토마스에게 더욱 관심이 깊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 존 로스의 여동생이 중국으로 건너와서,
자기 부인이 낳은 아이를 대신 키워주게 된다.
이 여동생은, 매킨타이어 선교사와 결혼하게 된다.
결국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매제지간이 된다.
그래서 심양 지역에서,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조선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을 만나서, 조선말을 배우며 전도를 했다.
이들 조선인들이 세례를 받고, 중국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다.
그들은 <4복음서>를 각각
당시 한국인이 통용하던 문자(한자어와 이두)로 번역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조선 땅에 널리 보급했다.
이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20년 전에, 그들의 길을 예비한 사역이었다.
그리고 10년만에, 1875년에, 신약성경27권을 완역하게 된다.
토마스의 순교로, 감명을 받아, 10년 전에 시작했던 일을, 1875년에 비로소 이루었던 것이다.
주3)
그리고 각권별 쪽복음이 앞서 출판되었는데,
그러니까 1866년 토마스의 순교 이후부터,
<쪽복음 권별 성경>을 가지고, 압록강을 넘어서, 조선선교가 제법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백홍준(조선인으로 최초 장로)은
만주에서 성경책을 들고 들어올 때 (조선시대에도 사료를 읽어보면, 국경 검문이 아주 철저했다)
쪽복음을 한장씩 찢어서, 새끼를 꼬아서, 국경을 통과하고, 다시 새끼줄을 풀어서, 책으로 묶었다고 한다.
그만큼 목숨을 건 역사였다. 천주교인이 1만명 가까이 죽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성경이 전해져 있었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황해도 지역에,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 서상륜과 소래교회
▲6.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 조선 선교의 물꼬를 트다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승선했다가 순교한 제너럴셔먼호(미국 배)가 사건을 계기로
1871년, 미국은 함대를 보냈으나 (신미양요)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면서, 절대 수교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의 결심으로
결국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1885년, 각 미국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었다.
그의 순교이후 16년이 지나면서 한국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1885년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토마스는, 닫혔던 땅 조선 선교의 물꼬를 튼,
아무도 걸어가지 않았던 땅을, 최초로 걸어간, 선구자였다.
▲정리하면
1)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순교한 개신교 토마스 선교사님이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었는데,
위 말씀처럼, 실제로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 위에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후원교회 하노버교회의 조선을 위한 중보기도에 힘입어
<존 로스 선교사>의 사역으로 이어졌고,
존 로스는, 심양에서 신약 성경을 번역한 것이 (1866~1975)
그리고 그것을 압록강을 건너 배포한 것이
1885년 이후,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할 때,
큰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 선교의 폭발적 부흥에는,
<존 로스의 성경번역>이 있었고,
그 배경에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있었다.
2) 아울러, 선교란, 무슨 동화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게 순풍에 돛단 듯이 미끄러져 가는 게 아니라,
많은 우여곡절과 환란의 굴곡을 통과하지만.. 그러면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지금도 선교지에서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고, 병들어 죽고, 사고로 다치고 한다.
그러면서 선교가 되어지는 것이다. (이들을 색안경 끼고 보면 안 된다.)
토마스 선교사는, 완전히 실패한 선교사의 대명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사람도 못 해내었던 일을.. 환란과 고난의 질곡속에서, 이루어내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선교사님들도, 각자 은사에 따라서, 다 같이 수고하셨다.)
..................
▲한국 개신교 선교가 백 년 뒤졌으나, 천주교회를 앞서게 된 이유
1875년 만주에서 존 로스, 존 메켄타이어 선교사는
한국어로 된 성경(권별)을 번역 출판했고,
그것을 서상륜 등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에 반포했다.
그래서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성경이 반포되어
선교사보다 성경을 먼저 접하게 되는
세계선교역사에 유례가 찾아보기 드문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조선에, 개신교 선교는 가톨릭보다 약 1백년이나 뒤져 있었다.
그런데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교세가 더 확장된 이유는 무엇인가?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성경 반포와 보급이 아주 급속하게 이루어졌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것이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가져왔다고 본다.
<존 로스>
▲참고로, 일본에서 이수정의 마가복음 번역
이 시기에, 일본에 농업기술을 배우려고, 유학을 갔던 이수정(1842~1886)이 있었다.
그에게 농업기술을 가르쳐 주던 신실한 크리스천 일본인 츠다센 박사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츠다센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이수정은, 미국 선교사를 통해서
미국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내서,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강력히 요청하게 된다.
(그래서 이수정은 '동방의 마게도냐인'으로 불린다.)
그러자 미국선교사들은, 이수정에게, 일본에서 한글로 성경을 번역할 것을 권고한다.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제일 먼저 번역한다.
1885년,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인천으로 들어올 때, 이 <마가복음>을 들고 들어왔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만나는 외국 선교사마다 '조선에도 선교사를 보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그 부탁을 받은 외국 선교사들이, 자국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냈다.
당시에 어떤 일부 세계지도에는, <조선>이란 표기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서구 사람들은, 중국도 알고, 일본도 알았지만, 조선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두 나라 사이에 끼인, 속국 정도로 알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중국에 선교사를 보내고, 일본에 선교사를 보냈지만, 조선에는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이수정과, 당시 재일, 재중 선교사들의 기도와 노력에 힘입어서
1885년 조선에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다.
.................
주1) 당시 제너럴 셔먼 호 탑승 인원
- 선장 페이지(Page, 미국인)
- 일등 항해사 윌슨(Wilson, 미국인)
- 선박 소유주 프레스턴(Preston, 미국인)
- 조지 호가스(George Hogarth, 영국인)
- 13명의 중국인
- 3명의 말레이인
- 영국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한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통역으로 탑승
주2)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
당시 6천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병인양요가 발발하게 되어,
그러나 10월 프랑스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에 나타났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로즈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해로 떠났다.
주3)
그리고 구약까지 66권 완역은 1911년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당시 한글은, 띄어쓰기가 없었다. (지금도 중국어는 띄어쓰기가 없다.)
그래서 처음에 쪽복음은, 띄어쓰기가 없이 번역되었다. 그것도 함경도 사투리로.
그러던 중, 선교사들이, 한글성경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띄어쓰기가 없어서.
그래서 성경을 번역할 때, 띄어쓰기를 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 국어에 띄어쓰기가 도입된 최초의 계기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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