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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벨을 용납하면.. 결국 망한다

LNCK 2012. 7. 2. 21:27

◈이세벨을 용납하면.. 결국 망한다        계2:18~23       계시록21강 부분녹취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예언 중에)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2:20


서론/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신은 인본주의적이다. 주1)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채우신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고 약속하셨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서, 우리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여러분, 정말 모든 필요가 채워졌는가? 안 채워졌다는 분이 많다.


그럼 하나님이 거짓말 하신 것인가?

물론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이유가 없다. 그럼 뭔가?


우리가, 내 삶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뭔가 욕심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은, 다 채우신다. 그것도 풍성하게 채우신다. 빌4:19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를 모두 채우시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향해 가기 위해서, 은혜의 방편(수단)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차적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 성취를 위해서 은혜로 주시는 수단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많이 도와주셨다.

그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다른 민족들의 부러움을 사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 게 아니다.

목적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출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게 바로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열방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 알리고 싶어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잘 지키며,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그 모습을 통해서,

열방에 하나님을 알리고 싶어 하셨다. 이것이 그들을(또한 나를) 부르신 목적이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가를

이스라엘의 삶을 통해서 알려서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편의를 제공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셨고, 필요를 채우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목적을 망각하고,

은혜의 방편을 목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목적과 수단을 뒤바꿔 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채워주시는, 이방 잡신의 한 분쯤으로 여겼다.

사람이 고안해내는 이방 잡신은, 신앙을, 자기의 필요 획득을 위한, 수단쯤으로 여긴다.


그들은, 

그게 금송아지든, 여호와든.. 중요하지 않고, I don't care

나의 필요만 채워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히 40일 전에 ‘나는 여호와만 섬기겠다’ 서약해 놓고,  주1)

40일 후에 자기들의 필요를 채워줄 금송아지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우리도 입술로는 신앙고백을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오직 내 삶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한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재통일 하는 것  엡1:10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목적지까지 가는 그 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이다.

(필요를 채우시는 것이.. 신앙생활의 일차적 목적은 아니다.)

그 목적지로 가는데, 필요한 것은 채워주시는 것이다. 내 욕심을 채워주시진 않는다. 


그런데 목적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자기들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는 신자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에 <국토대장정>이라는 국토순례행진 행사가 있다.

대학생들이 조국통일을 기원하면서, 최남단 마라도에서 판문점까지

약21일간 걸어가는 ‘국토순례’를 한다.


최종 목적지는 판문점이다. 그리고 그 순례의 목적은 ‘통일 기원’이다.

목적과 목적지가 분명하면,

20박21일 기간 동안에, 식사와 숙박에 여러 가지 불편이 있지만, 참가자들은 꾹 참는다.


왜냐하면 참가자들에게는, 분명한 목적과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함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저도 한 번 참가해 봤는데, 많이 불편했다.

그렇지만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

다들 육신의 피곤함과, 불편한 숙식을 참고 견디는 것을.. 제가 보았다.


물론 그 대장정을 하는 사람 중에, 너무 힘들어서,

숙식이 불편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숙식은 주최측에서 무료로 제공되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숙식을 제공해 달라고, 주최 측에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TV 취재 카메라가 다가오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보았다.


신앙생활은 ‘천국순례 대장정’이다. ‘국토대장정’에 비유해서

목적지와 목적이 분명한 길이다.

그 가는 길에, 숙식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육체가 피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숙식의 편함, 최고급 숙식이.. 그 순례길의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목적의식이 흐릿한 사람은,

그 순례길의 목적을 망각하고, 숙식 문제로 시험에 들거나, (부자라며) 자랑하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이 바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요,

본문으로 말하면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들’이다.

천국 순례길을 간다는 목적의식이 없으니까!


크리스천의 순례의 길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공급해 주신다.

빌4:19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늘 본부에서 공급되는 지급품이 조금 불편하고, 조금 내 마음에 안 들어도,

목적지를 향해 계속 순례길을 걸어가야 한다.

목적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급품보다! 국토대장정에서 소모품이 주최측에서 지급된 것에 비유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땅의 순례길에서 필요한 것들만 졸라대는 그런 신자들이 있는데,

바로 ‘물질 우상, 금송아지를 섬기는 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바로 본문에 ‘이세벨을 용납한 자’이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세벨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아세라(바알의 아내) 우상을 퍼트린 장본인이다.

그녀는 이방나라 출신으로서, 아합에게 시집올 때, 자기 우상까지 갖고 와서,

그 우상을 북왕국과, 심지어 자기 딸 아달랴를 남왕국에 시집보내어

온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퍼트린 주범이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의 본질은 ‘풍요와 다산’이다.

오늘날로 치면, 번영신학이요, 성공주의이다.


▲나는 진짜 순례자인가, 이세벨을 용납한 가짜 순례자인가? 그것을 확인하려면,

1) 나는 나의 필요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점검해야 한다.

그것을 점검하려면, 합3:17절을 암송해 보시면 된다.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구절이 나의 삶에 정말 적용되어 살아지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자.

여기에 나온 무화과, 포도, 감람열매, 식물, 양, 소 등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들이었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것도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순례자들이다.


2)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기를 추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안 그 첫날부터,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 한다.

그분으로부터 공급되는 그 어떤 축복이 아니라,

그 하나님 자체를 추구하고 있는가?


그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소원과 갈망이 있는가?  호6:1~3, 6

아니면 그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가? ‘주시옵소서’의 신앙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왜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할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언제든지 자기 욕심을 투사해서, 스스로 신(금송아지)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힘을 써야 한다.

안 그러면, 무늬만 기독교이지, 결국 자기 욕심을 채워주는 신앙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천국 생활을 누리지도 못하고, 구원도 못 받고, 결국은 망한다.

망하는 징계를 받아야 교회 다니면서, 기복주의적 신을 섬기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신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출32장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 되는 된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왜 계시록의 7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들 신자들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책이 많이 없어서, 주로 듣는 것으로, 말씀을 배웠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예배드리러 와서,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소원만 열심히 ‘말하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귀있는 자는.. 들어야’ 한다.


여러분, 예배나 성경공부에 불성실하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지 않는 신자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거듭난 신자가 '아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자마자 한 일은,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은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해 궁금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하게 되어 있다.


그저 내게 복을 주고, 내 소원을 들어주는, 이방신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과, 개인적, 인격적인 사귐과 교제를 통해, 더 알아가기 원한다.

그것이 자연스런 성도의 소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는 신자는,

주일 말고도, 주중 예배나 성경공부에 더욱 열심히 참석한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화를 기억하실 것이다.

엄마 양이, 장에 가면서, 새끼 양들에게 집을 잘 지키라고 하면서,

아무에게도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가르쳤다.


늑대가 새끼 양을 잡아먹으려고 왔다.

목소리를 가다듬어서 ‘얘들아, 엄마 왔어. 문 열어 줘’

새끼 양들은 ‘우리 엄마 목소리가 아니에요’ 하면서 거부했다.


늑대가 목소리를 많이 연습하고는 다시 왔다. ‘얘들아, 엄마 왔어. 문 열어 줘’

‘어 엄마 목소리랑 비슷한데? 그럼 문 밑으로 손을 한 번 넣어줘 봐요’

늑대는 자기 손(발)을 밀어 넣었다.

‘어, 우리 엄마 손이 아니에요. 우리 엄마 손에는, 검은 털이 없어요.’


그러자 늑대는, 자기 발에 하얀 밀가루를 묻혀서 다시 찾아왔다.

‘얘들아, 엄마 왔어. 문 열어 줘’ 그리고 하얀 자기 손을 밀어 넣었다.

양들은 문을 열어주었는데, 엄마 양이 와서, 그들을 구한다는 얘기...


늑대는, 양떼를 잡아먹기 위해서 집요하게 공격한다.

그 새끼 양들이 늑대와 엄마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없으면,

그들은 금방 문을 열어주고, 금방 잡아먹히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 이세벨과 발람과 니골라 당이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얘들아, 엄마 왔어. 문 열어 줘’


그때, 신자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이세벨과 발람과 니골라 당에게, 문을 열어주게 되어 있다.


평생 예수 믿고도 .. (엉뚱한 우상을 믿어서) 구원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걸 두아디라 교회에게, 예수님이 2천년 전에 경고하신 것이다.

엉뚱한 자에게 문 열어주지 말라는 것이다.


▲우상 숭배하면, 결국에는 망한다.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그 이세벨의 자녀들(우상숭배자)은 사망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하셨다.


계2: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 bed of suffering에 던질터이요 (고난 당한다는 뜻)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일차적으로 이세벨의 신앙을 받아들인 영적 간음을 뜻함)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 her children 를 죽이리니    *이세벨 우상을 섬긴 신도를 뜻함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정말 예수 잘 믿고 계시는가? 천국 갈 자신 있으신가?


제가 설교 때마다 이렇게 흥분하고, 목청을 높이는 이유는,

언젠가 천국에 올라갔을 때, 우리 교회에 다녔다는 집사님, 청년들이

천국에 못 오고, 아래서 불타고 있으면.. 그 얼마나 큰 재앙인가?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제가 매 시간마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이다.


이세벨에게 문 열어 주지 않을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이고 성도이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이세벨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대충대충, 설렁설렁, 어영부영 믿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편한 대로 믿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남유다, 다윗 왕국이, 바벨론에 비참하게 패망한 것은 <우상숭배>때문이었다.

 

      렘44:3~6, 이는 그들이 자기나 너희나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악행으로 말미암음이라

      (4)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 하였으나

 

      (5) 그들이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에게 여전히 분향하여

      그들의 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6) 나의 분과 나의 노여움을 쏟아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불살랐더니

      그것들이 오늘과 같이 폐허와 황무지가 되었느니라.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겁도 없이 받아들인 이유는..

그것이 약속하는 달콤한 <풍요와 번영>때문이었다.

 

렘44:17,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 (아스다롯) 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상도 처음에는 달콤한 것을 준다.

도박에 빠진 사람이 패가망신 하는 이유는, 처음에 돈을 쉽게 조금 땄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도.. 처음에는 뭔가 좀 부자가 되는 것 같은데.. 결국은 패가망신하게 된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라면.. 그를 회개시켜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 큰 환란을 허락하신다!
그게 본문의 교훈이요, 또한 구약 예레미야서의 전체 주제이다!

 

..........................


주1)


▲서론/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신은 인본주의적이다.


우리가 성경에서도 보시고, 또 실제 삶에서도 경험하는 바와 같이

왜 심지어 예배당에서도,

신자들이 자기의 필요를 따라, 자기가 만들어 놓은 신을 두고서,

‘하나님’이라 이름 붙여 놓고, 그 우상을 섬기는 일이 생기게 될까?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처럼,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쉽게 이세벨을 용납하는 자가 될까?


여러분, 결국 우상도.. 인간이 만들어내는 산물이다.

인간이, 자기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내는 게.. 우상이다.


▲성품은 사람(죄인)과 똑같지만, 힘은 세다.

제우스, 아폴로, 헤라, 포세이돈 등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한 번 살펴보자.


그 신들은, 우리 인간들처럼,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서로 질투하기도 하고,

울고, 웃고, 사랑해 빠지기도 하고, 실연을 당하기도 한다.


그들이 인간과 다른 것은, 아주 강한 힘이 있다는 것과, 올림포스 산에 모여서

영원히 죽지 않는 술인 넥타르를 마시는 것밖에는 없다.


이렇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신들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줄 엄청난 힘만을 소유한

세속적인 존재였다. (하나님처럼 거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들 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의 필요를 채워줄 엄청난 힘’이기 때문에,

신은, 그것(능력)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한국인은, 무속신앙(샤머니즘)이, 접목될 수 있다.

여러분,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아시는가?


수많은 기독교의 문패를 단 신자들이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행과 전도를 하는지..

무당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달래기 위해서

눈물겨운 치성을 드린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이성으로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에,

즉, 그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신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신(우상)은, 자기와 똑같이, 언제든지 삐지거나, 진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부 교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엄청난 힘만을 소유한, 그러나 인간과 비슷한 인격의 하나님을

자기들 상상으로 만들어놓고, (가정해 놓고) 


그 신은 자기가 조르고 조르면, 언젠가 그 고집을 듣고,

자기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평소에 그 신을 잘 달래놓지 않으면, 그 신은 언제든지 자기 삶에 개입해서

훼방을 놓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치성을 잘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신을 잘 달래기 위해서, 헌금도 드려주고, (헌금을 드리지 말라는 얘기 아님)


때가 되면 선교도 가 주고,

그런 샤머니즘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이.. 과거에 꽤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했는데,

전통무속신앙(샤머니즘)을 통해 선이해로 가진 신 개념을,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에, 그대로 접목시켜서.. 가르치고.. 또한 배웠다.


그리고 오히려 그 하나님이라고 이름 붙여진 신 위에 자기가 올라서서

자기의 계획, 비전, 목표를 제시해 놓고,

‘당신은 당신이 가진 힘으로, 나를 열심히 도와주기만 하면 돼요!’

(내 소원만 들어주고, 그 외에는 일절 나를 간섭하지 마세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얼마나 많았는지...

그런 신앙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필요에 따라.. 신을 만들어낸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도 계속해서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신을 만들어낸다.

그 대표적 예가, 출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쉽게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신을 제조해 내는 존재인지 너무 확연하게 잘 보여준다.


모세가, 10계명을 위시해서

여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쳤다.


그랬더니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겠습니다. 잘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맹세한 다음에.. 약 40일 후에 일어난 일은, 금송아지 제작이었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24:3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24:7


백성들은, 이렇게 반복적으로 맹세했다.

그렇게 한지 딱 40일이 지나서,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뭐 그런 인간들이 다 있어?’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

이스라엘은 오늘날 신자들을 상징하는 모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 예, 믿습니다 하면서도, 

동시에 물질 우상을 섬기기 쉽다. 


우리도 그렇게 쉽게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서

그를 가리켜, 겉으로는 ‘하나님’이라 부르지만, 그 속 본질은 ‘금송아지’일수도 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낸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풍요의 신이었던, 암소와 황소의 형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증권가에도, 이렇게 풍요를 상징하는 황소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어쩌면 단순한 조각일 수도 있지만, 과거 시대의 황소가 아직까지 내려온 것일 수도 있다.  


자기들의 풍요를 위한 황소 형상을 만들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간에,

시내 산에서는 하나님이 돌판에 뭔가를 새기고 계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지니라’ 출20:3


하나님이 직접 이것을 돌판에 막 쓰시면서

계명을 주고 계신 그 시간에도,

백성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은, 신자/불신자를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우상 친화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어떤 죄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런 우상을 만들고 섬긴다는 자들을, 가장 미워하신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23 (그들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서,

자기들의 배腹를 위한 해결사로 하나님을 만들어버린다.


오늘날에도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을 애굽의 풍요의 신인 황소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름만 하나님이지, 여전히 금송아지다.

이름만 예수님이지, 여전히 금송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