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의 큰 믿음이란? 눅7:1~10 출처, 정리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우리는 보통 백부장의 ‘큰 믿음’하면,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라는 구절에 근거해서 :7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이.. 바로 <큰 믿음>이다.. 라고 해석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아래 설교문은, 본질은 똑같은 내용인데,
약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설명합니다.
..................
▲그 당시 종이라는 것은, 자유인과 달리 인권이 미미했습니다.
백부장이,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통해서, 예수님께 부탁을 해서,
이 종을 구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선천적으로 그런 건지
후천적으로 교육을 받아 그런 것인지 어떤 계기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 백부장의 행동의 모티브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필요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주위의 사람들, 즉 타인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올바로 파악이 되었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은, 이것을 <큰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제를 미리 말씀드리면,
신자가 ‘자기의 필요’를 갖고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꼭 틀렸다기 보다는.. 적어도 <큰 믿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백부장의 <큰 믿음>은,
‘타인의 필요’를 갖고서,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백부장이 ‘말씀(명령)을 그대로 믿는’ 것도 있었지만,
그 근본 바탕에는 ‘타인의 필요’를 갖고서, 예수님께 간구했기 때문이지,
만약에 ‘자기의 필요’를 갖고서,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다면,
아무리 ‘말씀만 하소서. 제가 그대로 믿겠습니다!’ 해도..
예수님께 ‘큰 믿음’이란 칭찬은..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백부장이 이타적인 사람 이었다는 것은,
본문의 장로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5
그러므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라고 요청한 것도,
(어쩌면 그것도 이기적인 소원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백부장의 소원’을 전달했다는 점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눅7:3~4
백성의 장로면.. 연세도 지긋하고, 마을에서 존경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백부장의 소원을 대신 전달할 정도이면,
백부장의 소원은.. 공인된 소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소원)
만약 그것이 백부장의 이기적 소원이었다면,
장로들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젊은 아이들이 심부름 했다면 몰라도..
즉, 백부장의 소원은, 순수한 이타적인 소원이었다는 뜻입니다.
▲‘큰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사실 가장 ‘바른 믿음’이라는 얘깁니다.
바르지 못한 믿음인데.. 그게 만약에 ‘큰 믿음’이라면,
그것은 크면 클수록.. 더 재앙입니다.
만약에 ‘바르지 못한 믿음’이라면.. ‘작은 믿음’이 차라리 더 낫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이렇게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가?’ 하고 놀라셨습니다.
아직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고,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제자들은,
공생애 내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사실은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자아실현 /자기 소원 성취 등.. 뭔가 각자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9
바로 그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아무도 이타적인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적어도 그 시점까지는, 아직 만나보지 못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예수님 바라보기’, ‘하나님 바라보기’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내 필요로부터 빠져나와서 온전히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필요를 따지고, 내 필요를 이루려는 실속파의 입장으로서는
올바른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 분이 ‘great faith’가 되면.. 큰 일 납니다.
결국 사도들이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셔서
변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전혀 자기의 필요를 느끼거나, 보거나, 따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자기의 필요로부터 빠져나오지 않는 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올바로 바라보기가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내 필요의 안경을 쓰고 있는 한,
예수님은 결국은 내가 부리는 종이 됩니다.
내가 규정하는 예수, 내가 만든 예수 상을.. 내가 믿는 신자가 됩니다.
그건 금송아지 만든 것과 본질이 똑같습니다.
다만 형상이 ‘송아지’가 아니라, ‘예수’형상 입니다.
▲흥미로운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다음에
광야로 보내신 뒤에 어차피 물을 주실 거예요,
말려 죽이실 생각은 애당초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목이 말라 죽을 지경으로까지 이끄십니다.
어차피 주실 물이라면.. 좀 더 일찍 주시면 되잖아요? 투정부리기 전에요.
그런데 왜 그러셨을까요?
그리고 어차피 고기를 주실 것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불평하도록 만들어놓고서야.. 고기를 주십니까?
저도 어릴 때, 부모님께 짜증을 많이 냈습니다.
어차피 주실 용돈이라면, 한 번 요청할 때, 부모님이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세 번, 네 번 졸라야 비로소 주시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막판에 가서야 물과 고기를 주신 이유는
육체를 갖고 살고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필요를 느끼는 그 습성의 뿌리 자체를 없애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즉, 바른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려고 하신 겁니다.
그렇게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어도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느끼지 말라는 거예요.
그걸 왜 내가 느끼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 말라도, 고기 먹고 싶어도.. 하나님 뜻을 생각하면서.. 좀 참는 것입니다.
꼭 풍성한 것만.. 응답이 아니고.. 곤핍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준비해놓고 계시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내 필요를,
내가 느끼는 습성의 뿌리를 제거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내 필요를 따라서.. 하나님을 찾고, 신앙생활 하잖아요?
이게 아이러니에요,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찾게(믿게) 되었는데
참 놀랍게도 그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진정 못 봅니다.
내가 느끼는 나의 필요를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한,
아무리 예수님과 하나님을 불러도.. 진짜 그분들의 모습을 못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큰 믿음’이었던 것은,
자기 필요가 없이, 거기에서 자유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그분들의 모습을 보기만 하면 그게 구원이라는 거예요.
거기서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마음이 묶여버려서
예수님을 찾지만 예수님을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십니다.
그냥 예수님을 보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 필요에 의해서 자유롭게 예수님을 볼 수가 없어요.
꼭 필요를 따라서 예수님을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위해서 하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고,
그 예수님과 함께 연합해서 죽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는 자가 아니고서는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을 보는 이 죄적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에요.
불가능하다는 얘깁니다.
오직 십자가에 있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고백하면서
내 필요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내가 느끼는 필요에 대해서 죽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편에 계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보게 될 때에, 내 필요로부터 해방되어서 보게 될 때에
이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게끔 되어 있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내 몸을 통해 느끼는 필요를 내가 느끼면서
그 필요를 내가 간구해서 채우려는 실속파의 입장에 있는 한
믿음이 성립하지 않고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 필요를 내가 느끼는 것이 죄악이기 때문에.
이 죄악으로부터 벗어나서 내 필요는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져 버리고
십자가를 통하여,
마치 백부장이 예수님을 보듯이, 주님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그래서 예수님이 놀라시는 그러한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 필요를 느끼는
나의 감각 자체가 죽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오직 내 필요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느끼시는 필요에 따라 움직여 갈 수 있는 하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관련 예화
언젠가 이화여대 김 모 교수의 6.25피난길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고 나자
(젊은 시절의)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한강변에 나와서 강을 건널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작은 배 한 척을 만나서, 배에 오를 수 있었는데
생사를 건 피난민들이 너무 많이 몰리는 바람에, 배가 가라앉을 판이었습니다.
사공은 이래서는 안 되고, 누군가는 내려야 한다고 소리를 쳤지만,
그 상황에서, 그 누구도 그 배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공은 결국 배를 띄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배에 타고 있던 몸집이 아주 큰 신사가
조용히 내리더니, 한강변 석양길로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신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김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 신문에서, 그 글을 읽은 독자들이
그 한강변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하는 질문이 빗발치듯 쏟아졌습니다.
김 교수는 독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주인공의 이름을 공개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평양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지 않고
방송작가의 길을 걸었던 주태익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성경을 통해서 배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훌륭히 실천했던 것입니다.
모두가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현장에서
먼저 생명선에 자리를 잡은 자기의 권리를 기꺼이 내어놓은 사람,
마땅히 지킬 수 있고, 또 지켜야했던 자신의 자리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었던 진정한 자유인이었던
그 분의 이야기는
세상 모든 인류를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내어놓은 주님의 이야기와 너무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큰 믿음’ 이라는 것은.. 자기의 소원을 <크게 이루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서
타인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큰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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