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h3efozmCnEM&t=7s
◈청년아 일어나라 눅7:11~17 설교 편집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7:14
◑청년들이 영적으로 죽어갑니다.
▲미국에서 십대들이 교회를 회피하는 5가지 진짜 이유가 조사되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십대들이 교회를 가지 않는 이유를 너무 바빠서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너무 바빠서 교회에 갈 수 없는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바빠서가 아닌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그들을 잃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십대들은, 하나님께서도 교회에 나타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도 교회에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Teens don’t show up because they don’t think God is showing up.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신령한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교회에 다닐만한 매력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다 옳지는 않습니다.
본질을 잃은 청소년 그룹이
아무리 여러 가지의 활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이 이런 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에, 그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합니다.
2. 십대들은, 그들의 부모가 교회를 우선시 하지 않기에,
그들도 교회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Teens don’t make church a priority because their parents don’t make it a priority.
부모들이 교회를, 세상의 다른 일들보다 중요시 하지 않는데,
그 자녀들이 교회를 중요하게 여길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의 신앙이 별로인데,
자녀의 신앙이 신실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3. 자기들끼리 연결될 수 있는 방법들이 있기에
십대들은 더는 교회를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Teens are very connected to each other now and don’t need church to hook up anymore.
핸드폰이나 인터넷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요즘,
그들은 교회에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보다 더 친근함을 느낄 수 있고 더 나은 공동체가 될 수 있는 매체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에, 친구 만나러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주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4.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특별히 교회에 다니는 이들과 다를 게 없기 때문입니다.
Unchurched teens see no significant difference between church kids and everyone else.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신자가 특별히 다른 점이 보이지 않기에
그들은 교회에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교회에 다니면, 삶이 변하고 세상과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5. 십대들을 이해하는 척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교회 어른들의 태도에
많은 십대들이 질려있습니다.
Many teens get impatient with churches that major on the minors and
try too hard to seem relevant.
요즘 유행하는 십대들의 우상이나 드라마, 패션을 언급하거나 설교에 이용하는 것만으로
십대들을 이해하거나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은 채,
그저 피상적으로, 또는 방법론으로만
그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도에, 아이들은 질려 합니다.
*이 글은 Faith Experience에 Shane Raynor가 기재한 내용을 간추린 내용입니다. 출처
▲최근 우리시대를 어둡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를 가장 절망케 하는 것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청년들의 죽음은 다음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청년층 자살율의 급증입니다. 최근(2004년 경 설교임)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하루에 36명이 자살을 하는데, 그 중에 청년층(20-40대) 들이 많다고 합니다.
2) 세계 많은 나라가 그렇듯이, 또한 모든 세대가 그렇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청년 실업 문제로, 청년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습니다.
3) 청년층의 이민선호율 증가입니다.
4) 청년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 청년의 죽음의 징후입니다.
왜요? 죽은 자는 더 이상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땅의 청년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우리가 와 있습니다.
◑본문 설명
본문 말씀을 보면, 한 죽어버린 한 청년을 살리시는 기적의 사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나인성의 한 과부의 독자였습니다. 그는 한 과부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공동묘지로 가고 있습니다.
나인성이란 ‘아름답다’, ‘즐겁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인성의 모습은 아름답기는커녕 즐겁기는커녕
글자 그대로 절망과 슬픔의 죽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이 죽음과 절망의 행진이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행진이요, 생명의 행진이요 희망의 행진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나인성이 나인성으로 회복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1. 주님이 오셔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가능케 되였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7:13
미움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사랑은, 죄인을 살리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동기입니다(요3:16, 롬5:8, 딛3:15).
여러분, 이 땅에 청년들을 어떻게 살려 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긍휼 주님의 사랑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사랑만이 구원의 동기요, 유일한 희망입니다.
사랑하십니까?
사랑.. 이것은 지식과 교육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보세요. 사랑해야 될 줄 알면서 사랑해지질 않아요.
마땅히 사랑해야 할 줄 알면서도, 만나기만 하면 미워해요.
생각은 하면서도, 감정이나, 몸은.. 내 생각과 따로 놉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려면,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와 주님 사이에, 사랑의 선순환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위 사람들을, 특히 청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오늘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다는 증거는,
주위 사람들을 볼 때, 사랑의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2.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심으로 가능케 되였습니다(14절).
이 청년이 일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역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7:14)
그랬더니 죽었던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은 단순한 어떤 논리나 이론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그 처방이고 대답입니다. ☞말씀의 창조적 능력
하나님은 바로 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죄로 죽었던 우리를 바로 이 말씀으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에스겔 해골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일어났습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5:25절에서 선포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11장에, 주님은 무덤에 있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 하였습니다.
막5장에서 예수님은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달리다굼!” 하셨습니다.
청년도 일어났습니다. 장년도 일어났습니다.
방금 죽은 소녀도, 무덤으로 가는 청년도, 이미 장사된 장년도 다 살리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다 살리셨습니다.
오늘도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청년의 강한 신앙은, 말씀이 그 속에 거할 때입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요일2:14)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청년 세대의 위기는, (모든 세대가 마찬가지입니다만)
‘말씀의 위기’인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데,
말씀이 들리지 않고, 또는 스스로 들으려 하지 않는데..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또한 들려지도록
간절한 중보기도가 요청됩니다.
▲3. 주님이 오셔서 손을 대심으로 가능케 되였습니다(14절).
이 청년을 살려내는 데는 주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눅7: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당시 유대인들이 절대로 손을 대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문둥병자요 또 하나는 시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유대인의 결례를 사실상 파괴하시고 만지셨습니다.
주님이 문둥병자를 만지셨을 때 깨끗하여졌습니다.
주님이 죽은 자를 만지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의 손길은 살리는 손길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 젊은이들을 만져 주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주음의 행진을 정지시켰습니다. 희망의 행진으로 바꿨습니다.
주님의 손길은 이시대의 죽어가는 젊은이들에게 아직도 희망입니다. 생명입니다.
지금은 청년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지금 무덤으로 가는 죽음과 슬픔과 절망의 행진을 멈추시고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노라! 청년들아 일어나라!
☞ 터치, 손을 잡아주시는 주님
▲복음의 게릴라가 되라 출처
"너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전쟁에 있어서 적에게 맞서 선전포고를 하고 포를 쏘고 난 다음
보병이 쳐들어가서 점령하는 식의 전투를 정규전이라고 합니다.
그 반면 전후방 구분이 없이 여기저기서 불시에 공격을 하는 것을 비정규전이라고 합니다.
일명 게릴라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월남전에서, 미국이, 월맹군에게 패한 것도, 바로 이 게릴라전 때문입니다.
나는 마지막 때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게릴라식으로 전파된다고 봅니다.
거창하게 교회건물을 지어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모아 잘 준비된 원고로
감동적인 설교를 하는 정규전만으로는, 고도의 사단의 작전에 당할 수가 없습니다.
모름지기 라오디게아교회 시댑니다.
모든 것이 다 있는데 그리스도만 그들의 마음 밖에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은 듣는데, 그분을 그 마음에 모셔 들이지는 않습니다.
마음에 빈방이 없을 만큼 잡다한 교회업무들,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절대 선에 대치할 여러 가지 휴먼스러운 선한 사업이 가득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테이 헝그리(stay hungry)해야 할 심령들이
띵띵하게 배가 불렀습니다.
엘리제사장처럼 군인의 장교 복장으로 잘 차려입고 폼생폼사 하고는 있지만
싸움의 실력은 꽝입니다. 도무지 말씀이 없고, 말씀을 들을 귀가 없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사무엘은 게릴라입니다.
어디 정식으로 전통을 따라 임명을 받질 않습니다. 어쩜 다윗도 게릴라입니다.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러니 레위지파 제사장도 아니고, 정규 군인이 아닙니다.
초립 목동이, 그것도 존재 가치도 없는 이새의 막내가
전쟁에 나간 형들에게 심부름을 갔다가
여호와 이름으로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도, 비정규전입니다.
할례 없는 자가 까부는 것을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기인 물맷돌로 손을 본 것입니다.
게릴라도 그런 게릴라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형식과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전통에 빠져
엘리와 같이, 사울과 같이 소리만 높이고
실제로는 적에게 여지없이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복음의 정규군이 아닙니다. 사도로의 부름이 정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복음의 실력과 가진 무기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서신은, 바로 그가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가공스러운 복음의 무기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단에게 잡혀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구출하여,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바울 같은 복음의 게릴라가 필요한 때입니다.
............................
과테말라에 알모롱가 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우상숭배와 알코올 중독자들과 마약중독자들과 조직폭력배들만이 득실거리던 죄악의 도시,
소망 없던 도시가,
리스카흐체 마리아노(54세)라는 목사가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시작했는데,
온갖 핍박과 협박을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수없이 받는 중에,
어떤 때는 권총을 입에다 넣고 쏘았는데도, 총알이 비켜나가서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그리하여 무서운 죄악이 사라지고 98%가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도시가 되어
교도소가 필요 없게 되어 결혼식장이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고, 농사가 풍년이 들어서
채소농사나 나무 열매가 보통농사보다 몇 배가 크게 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고 있고,
많은 목사님들이 그곳에 가서 영성훈련을 받고 변화되어 나온다고 합니다.
마리아노 한사람 때문에 알모롱가 도시 전체가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구는 8,000명이었으나 24,000명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그 땅 자체가 복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복 받을 사람이 되면,
따라서 그 땅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8장 2~6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
을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땅이나 어떤 장소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사람이 복 받을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과테말라의 알모롱가는 죄악이 관영한 저주의 땅이었으나,
‘마리아노’라는 젊은 목사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변화되니까
저주의 땅이 축복의 땅이 된 것입니다.
'분류 없음 > 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통, 기쁨이 사라진 세대 (0) | 2012.09.10 |
---|---|
백부장의 큰 믿음이란? (0) | 2012.09.08 |
박경환 님 녹음모음 (0) | 2012.09.04 |
말씀의 창조적 능력 (0) | 2012.09.02 |
사40장 해석,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라 (0) | 2012.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