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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보내심 받은 성도

LNCK 2012. 9. 20. 21:49

◈진짜 보내심 받은 성도        눅9:37~48            출처보기



크리스천의 삶은, 다른 말로 ‘보내심을 받아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지금 가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크리스천(나)은, 가정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고,

직장이 있으면, 직장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 교회의 일원으로서 내가 교인이 된 것은,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단체가 아니라도,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도

내가 어머니라면.. 자식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고,

내가 아내라면.. 남편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고,

내가 애인이라면.. 이성에게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다음에,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만 <보냄을 받았다>고 얘기할 뿐이지,

진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의 삶의 장소와 시간으로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라,

거꾸로 자기가 예수님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냄 받은’


예수님으로부터 가정으로 보냄을 받아야 되는데,

가정에서 예수님을 잡아끌고,

직장에서 사회생활 하면서, 예수님을 잡아끌고,

엄마로서 자식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잡아끌고,

남편과 함께 아내로 있으면서, 예수님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진짜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 진정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보내지게’ 돼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행1:8절이지만,

그 외에도 ‘내 양을 먹이라’ (이 말씀도 우리를 '보내시는' 말씀이지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니라’  요20:21

는 등의 명령이 성경의 여러 곳에 있고,

실제로 예수님은 70인 제자를 파송하시는 등,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아버지께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말씀이 9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분명하고, 확실해야 합니다.


요5:36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요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요8:42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11:42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8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17:21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5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요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니라. 


그래서 아버지께 ‘보냄을 받은’ 크리스천은, 복음을 들고 세상에 보내지게 됩니다.

그런데 ‘보내지지 않고 있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 이유는,

아직도 이 세상의 삶의 현장에서, 내 배를 불릴 수 있는 기쁨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산 아래에 있어야 될 모든 일들에 대해서, 완전히 망각해버리고,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기쁨과 행복의 궁극에 도달해서 그곳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 상태에서, 예수님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바로 그 상태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내려옵니다.

이게 무얼 말하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 믿은 다음에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진짜 만남을 이룬 자라면, 천국(변화산에 비유)을 만난 그 상태로부터

     이 세상으로 보내집니다.


     보내질 때의 특징은

     전혀 이 세상에서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보내집니다.

 

     천국에 계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의 특성은,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보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팀을 이루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

이게 바로 보냄 받은 자의 특성입니다.


그러면 보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의 특성은 뭡니까?

본문 마지막 부분에 ‘누가 크냐?’라는 것으로 변론이 나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커고 높아지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들, 보내지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에서 높아지고, 큰 부자 되고,

큰 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 하면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크게 감당하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선교하는 데에 큰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 되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가, 제자들 중에 ‘누가 크냐’라고 변론을 하고 있는 마음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보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해 주세요.’

‘누군가 고난을 받아야,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제가 그것을 피하지 말게 해 주세요!’ 라는 식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 되는 것이 소원인 사람,

하나님의 선교를 크게 하는 것이 소원인 사람,

목회를 크게 해보고 싶은 이런 사람,

이게 다 크고자 하는 자들이고, 다 보냄 받지 않은 사람들이고,

보냄 받지 않은 이유는, 주님과 진짜 만남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신 주님까지 만나므로 진짜 만남을 완성한 사람,

십자가에 달린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죽으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

승천하신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무슨 큰 쓰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단지 주님이 크게 쓰실 수는 있지만,

내 마음에서 내가 크게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기도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하신 모습을, 베드로가 보게 됩니다.

그렇게 눈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마음에서 극한 행복에 겨워서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한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읍시다!’

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승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성령을 통하여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그 주님을 만나고 천국을 만나고,

천국에 계신 아버지를 만난 사람의 특징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자기 계획이 없습니다.

자기 소원이 없습니다.

만족하고 행복함의 극한에 달했기 때문에.. 소원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원이 없는 채로 이 세상에 보내질 때에,

그 사람의 특징은, 본문 말씀처럼 가장 작은 어린아이가 됩니다.


내가 스스로 소원함이 없고, 내가 스스로 계획함이 없고,

내가 스스로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염원이 없는 사람,

이게 작은 사람,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철이 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이끌어가겠다는 것이고,

인생에 대해서 꿈이 생긴다는 것이고,

인생을 한번 멋지게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라는 얘기는 무슨 말씀일까요? 눅9:48


진짜 하늘나라를 만난 사람은,

그래서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별다른 소원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가장 소원이 없는 자가 돼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과 한 팀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어린아이는 아무런 자기의 계획이 없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

무엇이 되면 좋겠다는 소원이 없습니다.


그런 어린아이기 때문에.. 부모가 대신 소원하는 겁니다.

아이의 이름부터, 이 아이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아이는 건강했으면 좋겠다, 이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진짜로 하늘나라를 만나서

이 땅에서 보냄 받은 자로서,

가정으로 보냄 받고, 직장으로 보냄 받고, 교회로 보냄 받아 살고 있는 이 사람은

너무너무 어리고 작아서,

소원이 없어요, 자기 인생에 대한 염려가 없어요, 아무런 계획이 없어요.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께서 크게 많이 생각하셔야 되고,

내 생각이 없고, 내 소원이 없기 때문에 천국을 경험한 변화산의 베드로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크게 많이 소원하시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한 팀이 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소원이 클수록.. 예수님의 나에 대한 소원은 자꾸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고,

내가 나에 대해서 갖는 기대와 계획이 클수록..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기대와 계획을 갖고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좁아들게 됩니다.


자기 딴에는 큰 소원을 갖고, 큰 비전과 꿈을 갖고,

이 세상을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실제로는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가장 하잘 것 없는 인생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진짜 만남이 이뤄지지 않고,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게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을 ‘잡아끄는’ 삶, 이 삶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혹시 은사를 주시고, 능력과 권능을 주셔도.. 그것들을 사유화해버리고 맙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한 아버지가, 산 아래에 머물고 있는

9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치려고 했는데, 못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 내막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로 앞 단락, 눅9:1절에 예수님께서 열둘을 불러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신 다음 전도여행을 보냈을 때,

이들이 진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눅9:6


그래서 제자들은, 아직도 그 꿈같은 기억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아이를 데려왔을 때

예수님과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없는 상태에서

제자들이 능히 자기들이 고칠 수 있을 것으로 알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아마 아홉 제자가, 차례대로 귀신을 쫓아내려는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 명 모두가 다 실패해버리고 맙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이 제자들이 오해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에요.


9:1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보냈을 때,

분명히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갔습니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갈 때 그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내심을 받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지요.


아홉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는,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서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 병을 고칠 수 있는 권세가

자기들에게 주어져서, 자기들의 속성이 된 것으로 착각했던 거예요.


내게 주어진 능력이고, 내게 주어진 권세라서,

내가 그런 능력과 권세를 지닌 큰 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무기력한 영적 상태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이게 바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유혹 중에 하나라는 거예요.

예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고,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내가 주체적으로

내 인생에 대해서 꿈꾸고 있는 비전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고 얘기하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구둣방을 해도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꼭 목회를 크게 해서 쓰임 받는 게 아니고,

선교사로 나가야만 쓰임 받는 게 아닙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으로도 쓰임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 좋아, 보내심을 받고, 쓰임을 받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주님을 끌어당겨 쓰려고 하고, 내가 주님을 쓰려고(이용하는) 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꿈과,

내가 갖고 있는 소원과, 내가 갖고 있는 계획을 위해서

주님을 쓰는(이용하는) 거지, 내가 쓰임을 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보내심을 받고, 주님께 쓰임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변화산/천국/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아무런 계획이나 아무런 소원이 없는 어린아이가 되세요!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와 능력을 사유화하게 된 이유가 뭡니까?

자기가 큰 자라고 오해하게 된 이유가 뭡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꿈이 있고/ 계획이 있고/ 비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린 이 계획을 만들어놓고, 꿈과 소원을 수립해 놓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에 내가 세운 그 꿈을, 주님께서 이루어주시나 안 이루어주시나..

눈 뜨고 보고 있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마치는 말

진짜 주님을 만난 자만이, 천국을 경험한 자만이, 보냄을 받습니다.


그런데 진짜 주님을 만난 자의 특성은

이 세상에서 어떤 꿈도 계획도 소원도 갖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계획도 소원도 생각도 갖고 있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이 세상 기준으로 볼 때는 가장 어린아이가 되는 거예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가장 어린아이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과 한 팀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각과 계획이 가장 크게 나타나서

그자가 가장 큰 자가 되는 것이고,


이렇게 예수님과 한 팀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한 팀이 돼있기 때문에

나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게 되는 것이고,  신적 권세가 있다는 뜻

예수님과 한 팀이 되어있기 때문에,

내 생각이 가장 작을 때(아이는 생각이 없음), 예수님의 생각이 가장 크게 되고,

내 능력이 가장 작게 나타날 때(아이는 능력이 없음), 예수님의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지나 갓난아이처럼 될수록,

예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나므로,

그 사람이 큰 자이고, 그를 통해 큰 일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눅9:48.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그러니까 큰 일이 나타나도, 그 ‘아이’는 그 일을 자기 일로 자랑하지 못합니다.

자랑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는 뭡니까?

진짜 만남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진짜 만남을 이루어서 내가 진짜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생각이 많은 거예요, 이루고 싶은 소원이 많은 것이고.


다 어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완전히 오해요, 넌센스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을 통하여 마음이 천국에 올라가서

주님을 진짜 만난 사람만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삶이 보냄을 받은 삶이 되고,


보냄 받은 자의 특징은 주님과 한 팀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됨으로서

주님의 생각과 소원이 가장 크게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사역이 크게 나타나건/ 안 나타나건

그것은 진짜 만남을 이룬 자들에게는 관심이 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아버지, 진짜 주님을 만나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소원도 계획도 없는

어린아이로 보냄 받아 살 수 있게 해주시고,

그럼으로써 저와 주님이 한 팀이 되어서,

주님이 크게 크게 나타나시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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