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2

하나님 사랑과, 사람의 사랑.. 그 차이

LNCK 2012. 9. 21. 22:12

◈하나님 사랑과, 사람의 사랑.. 그 차이     요일4:7~12, 마5:45~48   설교스크랩, 편집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그 차이>를 조명해 보십시다.


그 둘의 차이를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가 인간적 사랑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살도록.. 성령님의 은혜와 인도를 구하자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적 사랑인데 비해서,

인간의 사랑은 이기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이타적 기초에 의한 것임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견디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기초는 이타적이고, 사람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기적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공의적 사랑으로 옮길 수 있을 때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아가페적 정신인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우리 인간 사회에서 가장 진한 사랑의 모습을 ‘모성애’라고 말합니다.

모성애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거룩한 평가를 받는 모성애마저도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숭고한 모성애도.. 따지고 보면,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녀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사랑의 한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때로는 예수님의 처신에 실망과 갈등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의를 말씀하시면서, 불의를 용납하고 계십니까?”라고 따졌습니다.


논밭에 곡식을 심었는데, 가라지가 많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주인은 뭐라고 합니까? “원수들이 이렇게 하였구나.”

“그러면 원수가 행한 저 나쁜 일을 지금 당장 뽑아버리면 되지 않겠나이까?

뽑아버릴까요?”라고 물었을 때

“가만 두어라. 추수 때까지 두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 때는, 인류의 종말적 심판 때, 예수님 재림하실 때를 말합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본다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는 불의의 세력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내용이 됩니다.

 

그러면 왜 그냥 두시는가? 그 이유를 주인이 말했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상할까 하노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을, 성경에서는 오래 참으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기적인 사랑은,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모두 싫어합니다.

그래서 없애버리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것도 당장!


여러분! 요즘에 한국과 일본은 독도 문제 때문에

매우 불편한 국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 당장 손 좀 봐 주세요!’

이게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눅9장에 예수님의 일행이 사마리아로 지나가게 되었을 때 상황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북쪽 사람들입니다.

남쪽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서 중간 지점인 사마리아로 지나가는데

사마리아 한 동네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나와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우리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다.”


“이 땅을 밟지 마라. 우리는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꼴도 보기 싫고 듣기도 싫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너희들은, 이 동네에서 나가라.” 그래서 쫓겨났습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요청한 말은 “예수님! 이것은 불의 아닙니까?

이런 불의로 땅도 밟지 못하게 하는 저 놈들을 그냥 버려두시나이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워 죽여 버리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돌아보시며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쫓아내면 쫓겨나야지!” 하시며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눅9:52~56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고 신앙으로 살고자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 같이 인정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본받아, 그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금방 그 자리에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저 보기 싫은 놈들 불태워 죽여 버려야지 왜 그냥 두시나이까?” 이러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 예수님의 가장 측근이면서도,

예수님의 교육을 실제적으로 받으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에 학교 선생님들이 많습니다.

날마다 학교에 가서 가르치십니다.

제가 ‘학생들중에, 누가 제일 예쁩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 예쁩니다'고 말합니다.

학생들을 똑같이 공평하게 대하는 사랑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트러블메이커는 ‘어휴! 저 얘는 왜 우리 반에 있어서 날마다 문제지?’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안 그러신가요?’하며 되묻습니다.

저에게 묻는다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모범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제가 보기에 제일 예쁩니다.

인간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하는 이유는,

가급적 이런 ‘이기적 인간의 사랑’을 극복하고,

‘공의로운(공평한) 주님의 사랑’을 본받자는데 있습니다.

그래야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링컨의 공평한 중립적 리더십


아주 심한 예로, 엄마가 자녀 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도 차별을 합니다.

아들이 더 좋을 수도 있고, 딸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왜 그럽니까? 이게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목사이고 신부이고 어머니이고 누구도 할 것 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사랑은 이기적인데,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롬2:11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원수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큰 사랑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 사랑에 참여하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뭐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의적(공평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가페라고 하는 것입니다.

 

“because(때문에)”가 아니라,

“in spite of(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이기적 사랑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덧입자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까요!


◑2. 하나님의 사랑은 짝사랑이고, 인간의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짝사랑’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은 관심도 없는데 내가 계속 좋아하는 것입니다.

즉, 변치않는 헌신적 사랑을 뜻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는데도

하나님은, 변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짝사랑하고 계십니다.


인간들은 서로 사랑해야 좋지.. 한쪽만 좋아하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처음엔 조금 짝사랑 하더라도.. 그가 계속 무관심하면.. 결국 포기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만약 인간을, 제한해서 사랑하신다면

하나님 사랑에 참여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품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셔야 합니다.

다 죄를 짓고 떠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짝사랑해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힘이 주어졌습니다.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성경에 보십시오. 구약의 호세아는

자기 아내 고멜이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서,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끝까지 사랑하고 그가 진 빚을 갚아주고서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고

신약에 와서 탕자는, 아버지에게 최고의 괴로움을 선물해 주었지 않습니까?

재산도 다 없애고 나가서 거지가 되고 동네 사람들의 창피한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밤마다 문을 열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돌아오매 그 옛날의 과거를 모두 다 잊어버리고

순식간에 옛 아들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주는.. 인간의 사랑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 이런 주님의 인격과 형상을 본받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

‘내 인간적/이기적 사랑’으로 사랑하면서..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랑은 비즈니스 성격이 있습니다.

비즈니스는 이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격스러운 남녀의 애정 관계도, 자기가 절대 손해를 안 보려고 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편견에서 신경전을 벌립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이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크리스천은 넘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내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서.. 그게 뭔지 압니다.


사도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고, ‘사랑의 복음서와 서신서’를 쓴 이유는,

그가 먼저 넘치는 아가페 사랑을 받아서,

그게 뭔지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맨 아래 ‘서론’ 참조


그러므로 십자가 사랑을 정말 뼈저리게 경험한 성도는,

그 자기가 받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비즈니스적 사랑, give and take 식의 사랑의 한계를.. 그는 뛰어넘습니다.


대표적으로 손양원 목사님이십니다. 장기려 장로님도 계십니다.

앞으로 이런 ‘사랑의 모델’들이 계속 배출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희망의 등불’이요, 이 시대의 ‘등대’같은 사명자들입니다.


◑3. 인간의 사랑은 자기 보호를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희생을 통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실 때, 에덴동산에 진흙이 많이 있었을 터인데,

‘왜 그 다른 진흙으로 객관성 있게 여자를 만들어놓지 않으시고

아담의 갈빗대에서 뽑았을까?’ 이게 조금 의문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담 이후 지금까지 세상은,

이 애정 관계에 복잡한 일이 그토록 많이 일어나는데

남자들은 여자를 보면 본능적으로 소유욕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본래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빠져나간 것을 채우려고 애를 씁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성의 아름다운 감정을 느끼는 남자에게,

자꾸 다가가는 그런 문화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한 말은 연애하는 사람에게 아주 최고의 표현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 했겠습니까?


내 속에 들어있는 내 신체 일부분이라고 상대방을 향해 말했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더 진한 사랑의 고백은 세상에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진한 사랑의 고백이.. 어떤 책임 사건이 생기니까 서로 뭐라고 합니까?

서로 핑계대고, 서로 변명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인간적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받아서,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성가에 있는 것처럼

어떤 때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창피하고

‘아!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으로 정말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이 한계점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은 정말 인간에게 없는 것인가?’ 그런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이 찬양을 부르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 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거저 주는 사랑!


지금 이 시간 ‘우리의 실상을 알자’는 것입니다.

‘내 한계를 알고, 인정하고, 깨달을 때’.. 거기서부터 변화와 성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이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십자가 복음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삶에서 잘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정말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심지어는 물질적 문제로 형제끼리 다투는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현실에 있어서는!


여러분, 이사야53장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53:5절을 깊이 되씹어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내 허물을 사하시려고.. 창에 찔리시고,

내 죄악의 값을 대신 치르시려고.. 상함을 받으시고, 즉 curshed 뭉개지시고

나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대신 징계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 주님의 깊은 사랑이, 이 구절의 묵상에서 우러나올 것입니다. 사53장 해석, 고난당하신 여호와의 종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의 사랑’이, 내 삶에, 아직 진하게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이, 자기 삶에 진하게 나타난 사람은,

그 사랑에 감동되어/ 변화 받아/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감사해서

나도 내 이웃을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내 인간적 사랑은 너무 이기적이고, 편파적이며, 형편 없다’는

자기 인식에서부터 출발할 것입니다.


............


◑사랑과 집착    (펀 글)


요즘 젊은 세대들은 신조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쿨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사귀던 이성과 헤어질 때도, 깨끗하게 헤어지며,

헤어진 이후에도, 괴로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다른 이성을 사귀더라도 동요하지 않으면 ‘쿨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쿨한 것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한 성격을 나타내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맺고 끊는 것을 확실하게 할 수 없게 하는, 요소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모호성입니다.

사람의 행동이나 성격이 흑백으로 나눌 수 있는 분명한 색깔을 가직 있으면

칼로 무를 베듯이 쉽게 흑과 백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이나 성격이 너무 복잡하고 복합적입니다.

사람의 행동과 성격은 경계선이 모호해서 확실한 정체를 알거나,

맺고 끊기가 어렵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있다면, 사랑집착입니다.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은,

집착을 사랑이라고, 또는 사랑을 집착이라고

오해할 위험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두 사람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진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인형을 좋아하거나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은

인격이 없는 사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인형이나 장난감은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이때에는 아이 혼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나는 순전한 사랑인데, 상대방은 집착하는 것으로,

또는 반대로 무관심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무관심하거나, 혹은 집착하는 것인데,

상대방은 나의 집착이나 무관심을.. 순전한 사랑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순전한 사랑을 집착으로 오해하든,

집착을 사랑으로 오해하든,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모두에게 유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랑집착이라는 경계가 모호한 둘 사이에서,

그리고 나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는 사람(예를 들면 자녀)까지 배려한, 쿨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쉽지 않은 결정을 돕는, 몇 가지 기준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해를 쉽게 하시려면, 부모와 자녀 관계를 염두에 두시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자유하게 하고, 집착은 종속하게 합니다.

-사랑은 성장하게 하고, 집착은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퇴보하게 합니다.


-사랑은 나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집착은 나의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나의 보람이라고 말하고, 집착은 그를 위해서 뼈 빠지게 일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지만,

 집착은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알아주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그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집착하는 사람들만이 하는 말입니다.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기에게 하는 말입니다.


 성장한 자녀들이 아직도 ‘나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필요한 삶이 되는 것,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나의 필요를 거두어야 할 때는, 나의 필요를 거두어야 합니다.

엄마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연습을 시키는 것은, 홀로 걷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의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나의 존재와 나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와 나의 가치가 가장 빛나는 순간입니다.


내가 부모된 역할을 바르게 했기 때문이고,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내 소유가 아닙니다. (펀 글)


............ 전략한 부분 .............


서론/ 사도요한, ‘사랑’의 신학자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동일인로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요한에게 나타난 특징이 성경에 여러 가지로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제자라고 했습니다.


이때 요한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12제자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요한은, 요21장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는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약간의 편애적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요한에 대한 소문이 하나 생긴 것이 요21:20절 이하에 또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이런 말까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제자들 가운데 제일 오래 생존한 사람이 요한이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순교 당했는데, 요한만이 100세가 넘도록 목회를 하다가 자연사해서,

지금 에베소에 요한의 무덤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특별 관계도 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가 살로메인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요한은 이종사촌 형제가 됩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에게 큰 공로가 있습니다.

자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모두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위해서 물질적으로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받은 자가, 사랑할 줄 아는 것은 아마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모든 성경(요한복음, 요한서신서, 계시록)은, 주제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의 대표적 성경구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도, ‘사랑’이 그 주제로 되어 있고

특별히 본문 말씀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만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30번 사용하면서 설교 하는 것을 봅니다.


쉽게 해석하면 <요한의 신학>이란 뭐냐?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주제입니다.

‘사랑’을 주제로, 모든 관계성을 이루어가는 신학의 기초를, 요한이 놓았습니다.


'분류 없음 > 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는 ‘부르심’을 받았다   (0) 2012.09.25
기도가 되어지려면 3820  (0) 2012.09.24
미래를 준비하는 믿음은?  (0) 2012.09.21
진짜 보내심 받은 성도  (0) 2012.09.20
느헤미야가 쫓아낸 자들  (0) 2012.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