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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릴 때 하나님의 선물

LNCK 2012. 9. 27. 20:21

◈내가 누릴 때 하나님의 선물             전5:10~20             출처보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이 생길만큼  (2004년경 설교) 

한해 중 가장 풍성하다는 추석 명절을 지냈습니다. 반갑고, 즐겁고, 행복하셨는지요?


아마 추석에 대해, 그런 격언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이때가 결실과 추수로 인해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꼭 물질이 넉넉해서만 아니라,

그 풍성함을 서로 더불어 나누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격언일 것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던, 달 밝은 한가위 밤에 서로를 생각하며

추수한 볏단을 몰래 옮겨다 주던 형제의 마음,

바로 그 마음이 이 한가위의 정서를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점차 물질만능시대가 되어가면서

피부에 와 닿는 한가위 풍경이 예전 같지만 않습니다.

분명 물질적으로 더 넉넉한 시대를 살면서도, 삶이 넉넉하지 못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고,

이전보다 더 여유 없고 각박한 삶을 사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게,

만족과 감사보다.. 불만과 짜증 섞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불만과 짜증은.. 주로 물질의 결핍과 비례해서 나타납니다.

이웃과의 비교, 남과의 경쟁 속에서 더 갖고, 더 채우기 위한 치열함이,

당연한 삶인 것처럼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는, 부가 목적이 되는 경쟁과 쟁취의 시대,

살벌한 전쟁터로 더욱 더 변해가고 있습니다.


경제적 성취가 인생의 지상과제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시대가.. 바로 오늘 우리들의 시대입니다.


그럼 ‘모든 길은 경제로 통한다’고 할 만큼,

돈의 위력이 대단한 이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복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부의 축적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부자처럼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내 곡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거기에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었노라...’

이것이 현대인이 부르고 싶어하는 개선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 노래를 18번 삼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은 그 부자의 인생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인생’이라 하시니.. 어찌된 것입니까?



◑전도자가 발견한 ‘부의 헛됨’


▶10절,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는 먼저, 부의 속성을 표현하는 속담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속담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부라고 하는 것은 결코 만족될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의 욕심을 증가시키는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부가 아무리 많이 축적되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고,

또 돈을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충분하다, 이젠 됐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전도자는 채워지지 않는 부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을 느끼는 ‘바닷물 같은 것’임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부에 관한 그 당시의 전통적인 가치는

‘부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선물’로 간주되었습니다.

부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그러한 부의 개념에, 새로운 관점을 하나 더 부연합니다.

그것은 ‘부가 하나님의 선물이되, 그러나 만족되지 않는 부는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만족할 줄 알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건 결코 하나님의 선물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와 관계된 속담을 이어갑니다.


▶11절,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전도자는 재산이 늘어나면 느는 것만큼,

그것을 소비하는 주변 인물들이 함께 증가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부를 자신이 누리는 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그 부를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획득한 부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그 부의 축적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결국 부의 축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소비도 증가하고,

부가 쌓이는 만큼 나가는 곳도 많으니..

그 애씀이 다 헛수고가 아니냐는 겁니다.

정작 부의 주인은 그 열매를 즐길 기회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부를 소유한 사람이 맛보는 이익이라고 하는 것은,

기껏 그의 눈으로 자신의 재산을 ‘쳐다보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그래서 전도자는 그것이 무슨 유익이냐며 ‘그게 다 헛된 일’이라고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는 부의 의미를 축소시킵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부가 결코 축복일 수 없는 셋째 이유를,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2절,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노동자는 숙면을 취할 수 있지만, 부자는 불면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왜 부자가 잠 못 이루는 걸까요?

그것은 재산증식에 과도하게 몰두하기 때문이거나,

재산의 손실에 대한 불안 때문일 수도 있고,

또 지나친 과식으로 인한 소화불량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부자는, 가난한 자보다, 불안의 요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부자라 하더라도, 그 어떤 이유에서건, 잠도 잘 안 오고 불면으로 고생한다면,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행복의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부와 관련된 세 가지 속담을 통해서 (10~12절)

부와 만족의 관계는 결코 비례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부가 행복한 인생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반드시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부를,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혈안이 되어, 다른 것에 다 눈멀어가면서

찾고 있느냐는 안타까움을 그는 토로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이고 목표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겁니까?

어떻게 하든지 부를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사는 우리들 아닙니까?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게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끼쳐줄지도 모르면서

그저 그것을 목표로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 아닙니까?...


전도자는 이제 13~17절에서

앞의 속담 속에 담겨진 그러한 부의 부정적 속성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열거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재물이 인생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이 무엇인지,

그 병폐가 무엇인지를 하나 하나 짚어갑니다.


▶13절,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부는 ‘재물이 오히려 그 소유주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단 재산이 많은 집안은.. 분쟁이 많습니다.

재산 때문에, 부자지간, 형제지간, 친척 지간에, 서로 소송하고,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재산이..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지키는 가운데,

아내도 떠나고, 자녀하고도 원수가 되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재산을 빼앗으려드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14절)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어떤 사람은 재난을 만나서, 재산을 다 잃는다. 자식을 낳지만, 그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 (새번역)

 

그래서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돈은.. 재난을 만나서 하루아침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아무 것도 남겨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스운 얘기로, 중소기업 사장이 큰 차를 타고 다니다가도,

돈이 궁하면, 자기가 사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께, 얼마를 꾼다고 하잖아요.

경비 아저씨는 큰 돈은 못 벌지만, 그래도 남에게 꾸어주며 삽니다.


17절에서 전도자는, 부를 좇는 자의 한평생이

근심과 병과 분노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합니다.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17


▶15절,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16절)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자신이 수고해서 얻은 재물을 필요한 때 사용하지 못하고  :14

또 죽을 때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5


그렇게 아등바등 긁어모아봤자, 결국은 ‘풀린 손’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돌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재물을 수고하여 얻었음에도

죽을 때는 정작 ‘빈손’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허무를 알라고 전도자는 외칩니다.


힘들여 얻은 부를, 모두 뒤에 남겨야 하는 일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것을 고스란히 놓고 가는 인생이 얼마나 아쉬움이 크겠습니까?

그걸 가져가겠다고 금고 열쇠를 꿀꺽 삼킨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만

결국은 고스란히 다 놓고 가는 게 인생인 겁니다.


그러니 부를 모으기 위한 수고와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지닌 재산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계속 쌓는 일에만 집중하는 인생들이 많더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의 속성을 재빨리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제가 서울 영락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그 교회 어느 권사님 내외분이 회갑연을 하면서

이런 인사말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저희 내외는 이북에서 내려온 후, 좀 더 잘 먹고 잘 살아보려고

죽기 살기로 재물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제법 부를 모으고 난 오늘엔, 잘 먹을 래야 잘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희 내외는 당뇨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기껏 해봐야 보리밥 한 덩어리밖에 먹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재물의 덧없음을 깨닫고, 저희 모든 재산을 순교자 기념관 부지로 기증합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바로 경기도 용인의 순교자 기념관입니다.


에머슨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살기위해서 준비는 하나, 정말 삶답게 살아보지는 못한다...’ ★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 주어진 행복을 다 흘러버리며 살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이러한 인생의 어리석음을 발견한 겁니다.

주어진 현재를 누리며 살지 못하고,

확실치도 않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버리며 사는 겁니다.


그렇게 살다 죽음이 덜컥 다가오면,

그제야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미련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겁니다.

‘더 살고 싶다’, ‘더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가기엔 내 생이 너무 억울하다’고 하는데,

아직 시간이 남아있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요?


◑전도자의 대안 제시


전도자는 부를 좇는 인생이 겪는 좌절과 의문을 깨닫고

그 문제를 풀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 또한 큰 사업을 벌여보기도 하고, 재물이 주는 쾌감을 만끽하기도 했던 자입니다.


▶16절,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그러나 부의 축적은, 그게 다 ‘바람을 잡는 일처럼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인생의 행복이 있는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경험해 본 전도자는

부의 한계와 부정적 속성을 지적한 후

진정 행복한 삶을 위한 그 대안을 18-20절에서 제시합니다.


▶18절,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참의미는 지극히 단순한 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먹고 마시며, 자신의 일을 즐거워하며 사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즉 주어진 일상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고 사느냐에

행/불행의 갈림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내가 가진 것(재산, 직업)에 만족하고

그것을 충분히 누리는 생이 복된 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나에게 주신 것들을 한껏 즐거워하며 만끽하며 사는 겁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고

이에 만족하고 즐거워하고 누리는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19절,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새번역)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분복’이, 인생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은 아닙니다.

그 부가 하나님이 주신 복이 되려면 내가 그 소유에 만족해야 합니다.


본문에 ‘누리게, 즐거워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100개를 쌓아놓고, 쳐다만 보고 있는 사람은.. 복이 없는 자이고,

10개를 가졌지만, 그것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연봉이 꽤 많은데,

너무 직장 일이 바빠서, 돈을 쓰거나, 여행을 다닐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연봉이 높지 않아도,

보리밥 사 먹으면서, 여행을 다니며.. 누리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자기 현실(하나님이 주신 분복)에 만족하지 못한 채,

상대적 결핍만을 아쉬워하며, 불만스럽게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좌절과 허탈과 후회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서는

결코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18절과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바...’, :18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19


그러므로 그것이 많든 적든

하나님이 주신 현재의 소유에 만족하고 즐길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재물을 다 똑같이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건 공산주의에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재물이란 각각 다르게 주어집니다.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일단은 자기 분복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1달란트 받은 자와 같은 운명에 처해집니다.

그의 문제는 불만에 휩싸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의 삶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신앙의 세계에 깊이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그리스도 예수, 능력주시는 그 분 안에서 배웠다’고 말합니다.


◑결론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내게 주어진 현실을 긍정하며 사는 능력을 갖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자유 속에서

우리 또한 바울처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은, 당신께 유산 분배를 거들어줄 것을 요청하는 한 사람에게

‘누가 나를 너희의 재물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에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부자가, 오늘날 물질지상주의 시대에 있어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겠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를 가리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 속에는 하나님과 이웃이 상실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이 부각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너무 낭비하며 살아서도 안 되지만

너무 아등바등하며 사는 것도 지혜로운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도 적당히 쓸 줄도 알고,

나눌 줄도 아는 게 행복한 삶의 비결입니다.


제가 1985~86년까지 2년간 시골에서 담임목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시골 사는 분들의 삶이,

돈은 있는데도 그걸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겁니다.


버섯 등의 특용작물을 하고, 양계니 양돈이니 하면서, 제법 사는 가정들이 꽤 있었는데

그 생활이 참 그랬습니다. 꼭 검소하거나 근검절약해서가 아닙니다.

부를 활용하며 사는 방법을 모르더라는 겁니다.


그저 땅 사고, 저축하는 것... 그것밖에 모릅니다.

그 두 가지가 아니라도 생을 즐기며 누리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그걸 못하는 겁니다.

어리석은 노인들이지요! 오로지 땅문서, 집문서, 은행통장만 쥐고 발발 떨면서 삽니다.

그러니 그 삶의 질이 높아질 수가 없는 겁니다. (요즘 도시 노인분들은 달라졌다고 합니다.)


자기 형편에 따라서, 좀 즐기면서 여유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저 ‘없다, 부족하다’ 하며 불만과 짜증 속에 살지 마시고

지금의 내 분복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인생’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즐거움을

‘자신의 수고 중에 낙을 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몫 안에서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5:18, Then I realized that it is good and proper for a man to eat and drink,

and to find satisfaction in his toilsome labor

under the sun during the few days of life God has given him--for this is his lot. NIV


만족함으로 현재 누릴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왜 그것들을 다 놓치고 사는지요.

자신의 일에 기쁨을 가지지 못하고 짜증과 불평과 원망 속에 삶으로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선물을 놓치며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에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그것을 먹고 마시며

자신의 일에 기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현재에 만족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 때

그 인생은 진정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

 

◑본문 배경


전도서가 기록되던 주전 3, 4세기 또한

오늘날과 같이 경제적 성취가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정치 경제적으로는 프톨레미 왕국,

사회 문화적으로는 헬라 문화의 영향권 아래에서 ‘세계화’에 몰입되어 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전도자(히. 코헬렛)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비슷한 사회, 경제, 문화 환경 속에서..

그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갈등했던 사람입니다.


사실 ‘세계화’라는 말이 우리에게 그리 호감가는 단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계화’ 운운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 한국은 IMF를 맞았고

경제가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외의 문화적 혼란 또한 얼마나 어지럽습니까?


당시 유대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밀려오는 헬라 문화의 우월감과 낙관주의가 팽배해져 가면서

부유한 유대의 상류귀족들은, 최고의 것들을 경쟁적으로 더 많이 소유하려 했습니다.

소위 ‘명품족’이 탄생한 것입니다.


저들은 헬라적 사고와 관심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고

부의 축적과 사회 계층의 상승 욕구를 강하게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경제력 획득과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구는,

헬라왕국의 귀족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금력, 권력, 쾌락의 맛을 알았고

그 정점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성공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헬라화’라는 시대정신에 휩싸여

세계를 향한 진출과 성공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유대의 젊은 세대들조차도 거기에 심취해

그 무한한 기회와 가능성에 집중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갔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권력과 금력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것을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절에 신앙과 삶의 문제로 갈등하던 한 현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전도자(코헬렛)입니다.


*코헬렛의 어근은 "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코헬렛은 ‘모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맥상으로 코헬렛이 모으는 것은, 격언이거나, 지혜를 구하는 회중입니다.

영어성경은 preacher(설교자)로 번역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진정한 삶은 어떤 것일까?...’

‘삶의 참의미는 무엇이고, 그 가치는 무엇일까?...’


전도서는 바로 그 현인이, 모든 인생의 가장 큰 관심인 부의 문제를

어떻게 고민했고, 또 그 해결책을 어떻게 찾았는가를 보여주는 자기경험적 기록입니다.


전도자는 먼저 ‘인생에 있어 부가 무엇인가?’를 사색합니다.

모든 인생들이 혈안이 되어 좇는 저 부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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