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화, 하만 앞에 무릎 꿇지 않기 에3:1-15 출처보기
▲차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신앙은 그것은 곧 죽은 신앙이 돼 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차별화를 통해서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모르드개와 유다민족의 이야기를 지금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이라고 하는 신하가 하나 있는데
그 신하를 페르시아 제국의 제 2인자로 올려놓습니다. 높입니다.
왜 그런지는 이유는 나오지 않았지만,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 같습니다.
하만이 전쟁터에서건, 하여간 어디서건, 무엇에서건,
그 공로를 통해서 모든 신하들 위에 하만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하만에게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존경과 경의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절하도록, 왕이 명령을 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가 이 하만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지 않고
절을 하지 않았던 것이에요.
그래서 같은 처소에서 궁궐 내 같은 부처에서 일하는 다른 동료들이
모르드개에게 권유합니다.
‘너 그러다가 큰일 난다. 네가 뭔데 왜 하만에게 절하지 않느냐?’
‘무릎을 꿇어라. 왕이 높인 자다. 왕이 높인 자인데 왜 무릎을 꿇지 않느냐?’ 라고
종용을 할 때 이때 모르드개가 그동안 계속해서 에스더에게
유다인임을 밝히지 말라고 말해 놓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는 유다인 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섬기는 자다.
그러므로 하만에게 무릎 꿇을 수가 없다.’
라고 하는 말을 요약한 말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래서 모르드개의 거만하게 보이는 이 태도,
거만해서가 아니라, 하만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입장에서 하만에게 절할 수가 없어서
안 하게 됐다는 이것이 계기가 돼서
하만이 모르드개가 유다인임을 알게 되고, 그리고 모르드개뿐 아니라
유다인 전체를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멸절시키려고 하는 계획을 짜게 됩니다.
▲이때, 왕에게 이야기를 하게 될 때, 하만이 하는 말이 재미있어요.
8절에 “한 민족이 왕이 다스리는 나라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데
그들이 제국내의 모든 다른 사람 만민과 다른 법률을 지키고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은, 차별화 하면서 살았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왕에게 이익이 될 수 없는 민족이니 멸절시키십시다.” 라고 하만이 얘기를 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허락을 하고 조서를 내리고
127도 온 제국 구석구석에 이 왕의 칙령이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아서 유다 인을 멸절시킬 날짜를 정하게 됩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11개월 뒤가 됩니다. 11개월 뒤에 멸절시키려는 작정을 하게 됩니다.
자,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모든 만민이 지키는 법률과, 다른 법률을 지키고 있는 민족 차별화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차별화 때문에 오히려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가 있어요. 여러분!
하만. 그냥 상관 아니냐?
상관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 뭐, 하라면 하는 거지?
하급관리로서 이건 하극상 아니냐? 생각할 수 있어요.
여러분! 그러나 상관에 대한 존경심과, 종교적 의미에서의 우상숭배,
종교적 의미에서의 숭배로서의 절의 이 차이가 뭘까요?
상관에게 대한 예절,
거기에는 숭배라고 하는 마음, 의지하려는 마음 이런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이 하만에 대한 인사는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모르드개가 그걸 거절을 했던 것 같습니다.
모르드개가 만약에 상관에 대해 복종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지금 관리로서 그 궁궐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겠지요.
직장에서 직장상사에게 복종하는 것은 종교적 숭배와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거절해서 차별화된 법률,
모든 사람이 다 그 나라에서는 왕이 높이면 무릎 꿇고 절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모르드개가 유독 그것을 거절합니다.
차별화되었습니다. 차별화되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차별화 되어서 멸절의 위기에 치닫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케팅에서는 차별화 되어야 살아남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차별화 되었다가, 망해버릴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세요.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리와 다르면
오늘 본문에서처럼 멸절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멸절의 위기에 직면할 뿐이지 절대 멸절되지 않습니다.
근데 여러분! 기독교 신앙인의 삶의 원리가 삶의 법률이, (즉 삶의 원리, 삶의 원칙이)
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때는, 절대 멸절의 위기에 처하지 않습니다.
차별화되지 않을 때는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독교는 멸절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려요. 기독교가 차별화될 때는 멸절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멸절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해집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차별화되지 않을 때는, 멸절의 위기가 전혀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무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멸절합니다. 없어져 버리고 말아요.
▲지금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있게요? 없게요?
있어요.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서 기독교가 있습니까?
교회 간다고 누가 뭐라고 합니까?
아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요.
왜 공격을 받느냐? 교회를 다닌다면서 어쩌면 세상보다 더하냐?
그래서 공격을 받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교회를 다닌다면서 교회가 세상보다 싸움이 더 지독하냐?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독하게 세상에서 성공을 바라고 세상에서 형통을 바라고 있느냐?
욕을 먹는다면 거기서 욕을 먹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욕을 먹는 것은 한심하다고 비웃는 것이지,
정말 하만이 이렇게 악의를 가지고 멸절시키려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랑 똑같네? 뭐 다른 줄 알았는데.’ 라는 얘기지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것,
세상 사람들이 소원하는 것,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차별화된 것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이 차별화의 요체를 우리가 본문을 통해 보면 이렇다는 거예요.
차별화됨의 요체가 본문을 통해 보면 뭡니까?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겁니다.
하만이 누구예요? 왕이 높인 자입니다.
왕이 높였다는 얘기는, 우리의 삶으로 가지고 오면 무엇을 뜻할까요?
이 세상의 가치체계에 의해서 높아진 사람,
그 사람 앞에서 우리 모두가 다 절하고 있는 거예요.
재벌의 총수들 증권회사를 창업해서 얼마 되지 않아 증권가에 혜성처럼
등장하게 되는 증권회사, 이런 것 우리 다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게 다 하만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이 높이는 자들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말을 합니다. 이게 뭐예요?
이미 성경은 차별화의 원조예요. 원조.
거룩하다는 말 자체가 차별화를 말합니다.
‘차별화’ 구분된다, 구별된다는 말입니다.
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름 말고는 어떤 것도 구별되어서
함께 내 마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구별돼야 된다는 거예요. 차별화돼야 된다는 거예요.
내 마음에 하나님이 차별화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죽는 것이고
하나님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차별화될 때에 다시 말해서 하만과 같은 사람들 앞에서
절대 마음으로 무릎 꿇지 않습니다.
명품으로 갑옷을 입듯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치장을 한 아줌마 앞에서
기가 죽는 이유가 뭡니까?
이게 하만에게 무릎 꿇는 거예요. 그걸 좋아하니까, 그걸 사랑하니까.
창업해서 증권시장에 정말 각광을 받는 그런 사람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만에게 무릎 꿇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다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차별화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이 세상에 대해 계속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건에 대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들이대는 겁니다.
‘나는 죽었다.’
증권 투자해서 성공한 얘기가 나오면 ‘나는 죽었다.’ 하면서,
십자가에서 계속 죽으면서 하나님을 차별화해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 한 분 계시면 산다. 하나님 한 분 계시면 산다.’
이 차별화가 되지 않으면 마음속에 하나님도 들어오고
돈도 들어오고 자식도 들어오고 다 들어와 있어요.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차별화되지 않으면 우린 죽습니다.
기독교인은 죽는 것이고 교회는 죽는 겁니다.
교회가 어떻습니까? 세상과 똑같아져 버렸어요.
이 땅에 기독교가 있습니까?
기독교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 거예요.
여러분 분명히 아세요. 이 말을 해야 됩니다. 해야 돼요.
▲‘차별화’와 ‘비판’이 다른 것은 무엇일까요? 숙제로 한 번 내 볼게요.
내가 비판하는 마음을 갖고 다른 교회가 어떻다, 어떻다 하는 것과
나를 차별화 시키는 것, 차별화된 자로서 돈으로 사는 것 아니고
성공으로 사는 것 아니고, 형통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사는 자로서 다른 교회를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는가를 여러분이 한 번 마음속에 대답해 보세요. 스스로.
‘차별화’는..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비판이 뭡니까?.. 다른 사람이 못나고 내가 옳다고 하는
다른 사람위에 올라서서 사는 것입니다. 다르잖아요.
다른 사람보다 내가 우월해야 사는 사람이 있어요.
비교해서 내가 더 옳다. 내가 더 진리다.
왜 다른 사람위에 올려놓고 나를 살아가게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지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위를 점해야 내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지요.
▲하만에게 무릎 꿇는다. 하만이 누구라고요?
이 세상의 가치관에 가치체계에 의해서 높여진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가소로운 것이에요.
이 세상의 가치라고 하는 것이 가소로운 것이에요.
하만에게 무릎 꿇지 않으면 그러면 분명히 차별화돼 보일 겁니다.
세상이 공격할 수 있어요. 세상이 안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아세요? 세상이 처음에 안 받아들일 만큼 차별화돼야
기독교가 확장되어 갑니다.
처음부터 받아들이는데 아무 문제가 없어? 세상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그건, 무늬만 기독교이지, 진짜 기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 한 번 묵상을 해 보실래요?
인기 최정상의 탈렌트가, 드라마 한 회 출연하는데 2억5천을 받는데요.
그런데 목회자들은, 한 달 봉급이 1백에서~4백만원입니다.
근데 공교롭게도 어제 뉴스를 보니까, 화면 아래 자막이 나와요.
2008년, 대한민국의 대학생 대학 졸업자의 초봉 평균이 약2백만원 이래요.
그러니까 개척교회, 또는 지역교회 목회자들 중에는,
대학 졸업자가 받는 것보다, 더 아래로 받는 분들도 계십니다.
또 작은 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신학박사도 있고, 목회 경력도 30년이 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도 연봉은, 대졸 초임 보다 더 작게 받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그들의 50년의 생애가,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보면 뭡니까?
병신이지요. 뭐, 병신.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보면 이런 병신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한 번 묵상해 보세요.
최고 인기 정상 배우의 그 드라마?
그 드라마를 보면서 영혼이 구원받는 사람 한 사람이나 있을까요?
한 회당 출연료를 2억5천을 받아요.
그렇지만, 영생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에게 오락을 제공해 준 것 말고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 목회자들은,
일주일에 다섯 번씩,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전하고,
실족한 영혼들에게, 힘을 북돋우는 일을 합니다. 박봉에도 불구하고요.
이게 바로 하만 앞에서 무릎 꿇지 않고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가지고 뭐 얼마를 벌었다? 이렇게 하면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으로 사는 자들, 하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차별화되었기에
공격은 당하지만 절대 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번성해 나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기독교와 크리스천이 차별화 되지 않으면..
평안한 것 같지만.. 결국은 소리 소문 없이 망하고,
기독교와 크리스천이 차별화 되어서 나아갈 때,
거기엔 환란과 핍박이 따르지만.. 결국은 승리하는 길이 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만의 득세가 변함없이 우리를 공격하지만
그 앞에서 모르드개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절개를 지켜 나갑니다.
그때 멸절의 위기가 찾아옵니다만, 하나님 백성의 승리로 귀결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구별, 차별화 되어서.. 내 속에 심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세상 마음에 들어오고 싶어 안달하는
돈과, 명예와, 권력과, 형통과, 성공, 자식과 남편 등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을 차별화 시켜 마음에 모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분류 없음 > 2008'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0) | 2013.08.13 |
---|---|
작은 예수로 빛을 비추며 산 장기려 박사 (0) | 2013.07.24 |
계속 회개하는 사람이 죄를 이긴다 (0) | 2013.04.07 |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하게 하라 (0) | 2012.09.24 |
꾸밈이 없는 신앙의 기쁨 (0) | 2012.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