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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LNCK 2013. 8. 13. 11:16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에스라 10:1~4                          출처보기

 

 

 

 

죄를 지은 자에게는 탄식과 징계가 있지만,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한 자, 그 회개가 받아들여진 자에게는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주제의 설교문입니다.

 

◑서론

 

▲성도들에게는 동일한 죄에 반복해서 빠진다는 고민이 있습니다.

한번 죄를 용서받고 다시 빠지지 않으면 고민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죄를 자백해도 또 빠지게 되므로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를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동일한 죄에 빠졌다가

또 용서받았다가, 또 빠졌다가, 또 용서받는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도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하여

우상을 이스라엘에 들여온 죄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했습니다.

마지막 때쯤 싯딤에 이르렀을 때에도 모압 여인을 취하여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2만 4천명이 죽은 사건이 민수기 2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과 같이 훌륭한 왕도 말년이 되자

이방의 많은 여인들을 사랑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처첩을 천 명이나 두고 살았습니다.

 

이러다보니 이방 여인들이 이방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오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은 솔로몬 왕이 죽고 난 후에,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런 스토리가 열왕기상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가 매우 끈질겼습니다.

에스라 9장과 10장에 보면 유다백성들은 하나님이 죄에 대한 징계를 받아서

바벨론에서 70년 노예생활을 하고 돌아와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여전히 이방여인을 취하고 우상을 들여왔습니다.

 

심지어는 구약성서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도 동일한 죄악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2장 11절로 12절에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1

 

▲이렇게 우리가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동일한 죄에 반복해서 빠지다 보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는 마귀의 조롱을 받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동일한 죄를 그렇게 자꾸 반복하면서도 네가 무슨 성도냐?”며

우리를 조롱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마귀의 조롱과 마음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엘람자손 중에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한 말 가운데에는

우리의 주목을 끄는 말이 있습니다.

에스라 10장 2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스가냐는 이렇게 죄악이 반복되는 상황 중에도,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반복적인 범죄로 인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가운데서도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무근거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하면 그냥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데

그런 말은 아무 근거가 없는 낙관론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가냐가 하는 말은, 확고한 근거를 가진 견고한 소망인 것입니다.

어떻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가요?

그리고 이 소망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이것이 에스라 10장의 주제인 것입니다.

 

 

◑1. 죄가 용서받는 곳에 소망이 살아납니다.

 

▲소망을 파괴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으면 소망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본문 에스라와 비슷한 시기에, 느헤미야도 활동했습니다.

느헤미야도 같은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느1:8~10절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찌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 사도바울은 이런 죄악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향해서

소망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죄가 들어오면 소망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죄가 소망과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와 소망은 원수관계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스가냐는 “오히려 소망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죄가 반복되는 상황에도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가 무엇이냐?

시편 130편 3절로 4절에 소망의 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국회 청문회를 보면 너무나 날카로운 질문들이 나옵니다.

이처럼 사람도 한 사람을 놓고 질문공세를 하다 보면 죄악이 다 드러나

사람 앞에 서기가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 죄악을 하나하나 감찰하시고 세워놓고

청문회를 하시면 우리는 감히 설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사유하심(forgiveness)이 있으십니다.

죄에 대해서 벌을 줄 사람도 사유하시고 용서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30편 7절로 8절에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처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죄를 사유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이중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죄악이 반복되는 상황에도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될 죄 값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쏟아 부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려

대신 벌을 받게 하시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참된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소망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 소망의 가장 근본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죄사함’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인간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6절에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소망을 주시는데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죄 가운데 그냥 거하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반역하는 가운데 있으면

우리 인생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면

죄사함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게 되고, 마귀의 조롱도 떠나가게 되고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산 소망이 생겨나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연구를 하다가, 귀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스가냐가 말한 소망은 히브리어로 “미크베”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보면 먼저 “침례탕” 혹은 “침례의식”이라는 의미이고

나중에 “소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미크베”가 왜 침례의식인데 침례의식이 소망과 연결되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가지고는 소망이 있을 수 없고,

죄를 회개하고 회심하여 죄사함을 의미하는 침례의식을 거침으로써

죄사함을 받고 소망이 생긴다고 하는 의미가 이 단어 하나에도 들어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현세에도 소망이 없고 내세에도 소망이 없고

나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분이 계시면

예수 믿고 죄 사유하심을 받고 죄사함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가 진심으로, 애통하며, 죄를 아파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가,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세와 내세에 소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2. 소망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려면 세 가지를 기억합시다.

 

▲첫째, 지은 죄를 애통하면서 울면 소망이 생겨납니다.

여러분 자신이 죄악이 있고 그 죄악을 스스로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 됩니다.

 

에스라 10장 1절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라가 울자 백성이 다 울고, 애들도 다 울었다는 것입니다.

억울하거나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통곡의 눈물인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어찌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건만, 이렇게 동일한 죄에

자주 빠질 수밖에 없나이까?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으니 웁니다.”하고 우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고 우리 힘으로 안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 우시기를 바랍니다. 울면 흑암 중에도 빛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상원의원이신 신호범 박사님께서, 몇 주 전에 저희 교회에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2008년 설교임

그 분이 어린 시절 6.25전에 너무나 어려운 세월을 살다가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18세까지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6.25가 끝나고 미군이 철수하게 되자, 소망이 없어 울었다는 것입니다.

울면 사람이 왜 우느냐고 물어보게 되어 있습니다.

신호범씨가 울자 미군이 왜 우느냐고 물어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도 못나와 공부도 못해서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먹고 사는데

당신들이 다 떠나가니 앞길이 막막해서 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미군이 신호범씨를 불쌍히 여겨 양자로 삼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6.25 때는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신호범씨가 미국에 가서 18세의 나이에 초등학교를 들어가려고 하니

교장선생님이 당신처럼 나이 많은 사람은 입학허가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학교를 가도 안 받는다고 하고, 저 학교를 가도 안 받는다고 하자

결국 나중에는 교장선생님 앞에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또 왜 우느냐고 물어보더랍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학교에서 안 받아줘서 운다고 하니

울지 말라하고 특례입학을 시켜줬습니다.

 

그래서 18세 때부터 알파벳을 배우고 또 한국선생님을 붙여줘 한글을 배워서

명문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해서 결국 미국의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울 때는 우십시오. 하나님 앞에 울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시편 30편 5절에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저녁에는 울면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기쁨을 가진 소식을 가진 사람이 운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도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울면 위로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가운데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죄를 너무나 너그럽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유다백성들은 (이방여인을 취한 자가) 극소수의 죄라 할지라도,

이것을 심각하게 다루고 하나님 앞에 울며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죄가 있다든가

이제는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곤경이 왔다든가하면, 하나님 앞에 울어보십시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 죄를 처리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단호한 결단에서 소망이 생겨납니다.

죄를 적당히 타협하는 우유부단함에서는 소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스라 10장 3절에 보면 스가냐의 말에는 의지를 꺾을 수 없는 단호함이 드러납습니다.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약속한다는 것과 의미가 다릅니다.

“약속을 한다” 할 때는 “make promise”를 쓰지만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cut the covenant”를 씁니다.

 

이것은 언약을 어길 때에는 둘로 잘림을 당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맺는다는 것입니다.

약속과 다른 점이 그것입니다.

 

스가냐는 하나님과 이방여인을 추방하고 우상숭배를 몰아내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을 어길 때는 나를 죽여도 좋다는 단호한 결단으로 죄를 몰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 가운데 죄가 있으면, 단호한 결단으로 죄를 몰아내야 죄를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스가냐가 이렇게 단호하게 하자 에스라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에스라 10장 11절에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제발 이방여인을 내어 쫓아달라고 사정한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이방여인을 끊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12절에서 “모든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에스라와 스가냐는 백성들에게,

모든 백성들은 3일 내에 예루살렘 성전에 총 집합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10만 명이 예루살렘에 총집합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산을 다 빼앗고 유다백성에게서 쫓아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형벌이 무서워 10만 명이 3일 만에 모두 집합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가 이방여인을 쫓아내라고 하자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하늘에서 엄청난 소낙비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방백들이 와서 “학사여 제사장이여 우리가 이 일은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3개월 동안 조사를 합시다.”라고 하자 그러라고 합니다.

 

그래서 3개월 조사를 해 이방여인을 취한 113명의 명단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백성은 113명이 모두 이방여인을 내쫓고 난 자식도 내쫓고

이렇게 단호하게 죄를 처리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비록 이방여인이지만 오랫동안 같이 살던 아내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쫓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단호한 결단을 보임으로써,

소망을 경험하게 된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멸망할 때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쪽으로 갑니다.

그런데 소망을 이룰 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쪽으로 갑니다.

반역을 계속하면 망하는 것이지만 순종을 계속하면 잘되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의 정신이, 바벨론에 포로되기 전에는, 반역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22장 12절에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의 죄로 인해 내가 심판을 해야 되니 통곡하라

그러면 심판을 면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는데 13절에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죽이시려면 죽이십시오. 내일 죽이시겠습니까?

그러면 오늘은 실컷 먹어야 되겠습니다.”하면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멸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으로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의지함으로

소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스가냐는 에스라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스가냐에 대해 “엘람 자손중 여히엘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고 평민이요

그의 아버지 여히엘도 이방여인을 첩으로 취한 죄인이었습니다.

 

스가냐는 죄인의 아들이요 평범한 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 말씀 앞에 떨고 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 앞에 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울고 결심해도 우리를 돕는 중보자가 없으면 아무소용 없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여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 9장 5절로 15절은 에스라의 중보기도입니다.

죄 없는 에스라가 죄있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기도합니다.

에스라 9장 5절을 보면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중보기도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어린 양의 흘린 피를 근거로 해서 중보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중보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죄를 안 짓겠다고 결심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돕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옆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벗어나 승리하고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7장 24절로 25절에도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결론

유다백성들은 3개월간 조사를 거쳐서 이방여인과 그 자녀들을 모두 축출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울며 죄를 단호하게 처리하므로

결국 나라가 잘되고 자녀가 잘되는 소망의 실현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자식이 잘되고 나라가 잘되고 교회가 잘되는 소망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방해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뒤에서 조정하는 자가 마귀입니다.

 

마귀와 죄가 우리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으니

우리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앞에 우리의 통곡하는 심령을 아뢸 때에

우리는 소망을 체험하게 되고 소망의 실현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소망이 현실로 나타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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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참고로, 구약의 이런 구절에 근거해서 ‘민족 차별, 국수주의’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에 들어와 귀한 사명을 감당한 사람은, 부지기수입니다.

여리고 성의 라합, 룻기의 룻, 헷 족속 우리야... 등.

 

다만, 이방인과 사귀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면> 보는 시각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제사장들에게” 이방여인과 결혼을 금하고 있지만,

동시에 율법에는, 이방인들이 남자는 할례를 통해서, 여자는 할례자와 결혼을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런 본문은, 문자적이기보다는, 영적으로 해석함이 옳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이방인을 차별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한국인도 '이방인'에 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