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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찾아야 만납니다

LNCK 2013. 6. 6. 13:20

◈간절히 찾아야 만납니다                             마6:1-6                                      출처보기

 

 

 

 

 

 

▲몇 주 전에 어느 TV인터뷰에서 제가 게스트로 초청을 받아 갔을 때

진행자께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설교를 열 번 정도 하시는데 그 설교를 어떻게 다 준비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때로는 광야에서 우물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제 마음이 광야처럼 메말라서, 아무런 감동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런 영감도 느껴지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구하고 기다리노라면 어느 순간에 영감이 떠오르고,

지혜가 떠오르고, 설교가 떠올라서 그렇게 설교를 준비를 합니다.”

 

시드니 셀던이라는 유명한 미국인 소설가에 대한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베스트셀러를 쓴 사람입니다.

이제 나이가 86세나 되는데, 이분의 말이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너무 많아서 내 타이핑 솜씨로는 따라갈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마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도 그런 은사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속에서 음악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그것을 다 오선지로 받아 적지 못한 경우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입니다. 참 부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도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주셔서

내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

 

이렇게 부탁한 것을 보면,

사도바울도 입을 열기만 하면 말씀이 쏟아진 것이 아니고

때로는 심령이 메마르고, ‘하나님 나에게 말씀을 주소서.’

이렇게 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었을 때가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 가서 어느 강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그분이 아주 큰 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인데

이분이 매일 하나님께 두 가지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에게 말씀을 달라고 기도하고, 둘째는 나에게 성령의 능력을 달라.

이 두 가지를 놓고 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이와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멀리 떠나가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시편 저자도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이까?”

 

아마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 시편 저자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광야에서 우물을 파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땅이 메마릅니다. 물이 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 깊은 곳에 물이 있는 것처럼,

마치 리비아에 수로를 만들 수가 있는 것처럼..

그 땅 속에 물이 있음을 믿고.. 우물을 파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환경이 메마르고 하나님의 증거가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이 곤고할 지라도

그럼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믿음으로 구하고, 찾고, 기다리면

우물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고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찾고 찾는다’는 말은 히브리 어법입니다.

히브리 문법에는 소위 최상급이 없기 때문에, 강조할 때는 항상 반복합니다.

 

그래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반복법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것은 반복법, 즉 강조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마7장11절입니다. (이 단락 삽입글)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NIV 번역입니다.

If you, then, though you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Father in heaven give good gifts to those who ask him!

 

KJV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If ye then, being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un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shall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give good things

to them that ask him?

위 영어성경은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도 “auton (그를) 구하는 자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auton은 헬라어 목적격임, 여격은 autois

 

그런데 한글성경은, “하나님을”이란 목적어를, 번역하면서 빼 버렸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역이라고 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소원, 자기 욕심, 자기 개인적 야망 등을 다 구해도,

하나님이 무조건 다 들어주신다.. 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 즉 주님의 임재, 동행, 주님의 사랑,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 그런 뜻입니다.

 

위 마7:11절은, 기복주의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구절입니다.

이제는 고쳐야 합니다.

 

※혹은 번역하면서, ‘(하나님에게) 구하는 자에게’로 보고,

그 단어를 생략했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에게’로 봐서는 안 되고,

목적격 ‘하나님을’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여격이 아니라, 목적격입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11:13절도,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 분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 또는 성령님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설교의 주제로 돌아가면,

“너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니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말씀이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말씀하시고 승천을 하셨는데,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얼마 동안 기다려야 되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약속을 하셨지만 시간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락방에 모인 백 이십명의 성도들이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중에

오순절이 임했을 때 비로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오순절날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억하지

이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얼마동안 기다리고 순종하고 기도했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간절히 사모하고,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간절히 기다렸다가 만난 체험 간증

 

▲제가 목사로 안수 받은 지 십 년이 넘고 또 전도사 사역까지 포함하면

16년 정도 사역을 했습니다만

그 동안에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어제 일처럼 기억을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기억은 대학교 3학년 때 인도한

교회 중고등부 수련회에서 성령이 임한 사건입니다.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을 합니다.

 

또 하나는 몇 년 전에 섬기던 교회 대학부 수련회를 인도했을 때의 일입니다.

설교는 다른 분이 하셨지만 설교 후에 기도회는 제가 인도를 했는데,

설교를 하는 것도 어렵지만 기도회 인도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경험을 해보셨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첫 찬송가부터 은혜가 될 때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아무리 해도, 분위기가 랭냉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기도회 분위기가 바로 그랬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통성기도를 했는데도 도무지 분위기가 살아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저만 그것을 느낀 것이 아니고,

학생들도 기도가 안 나오고 마음이 답답하고 분위기가 무겁고,

이것은 뭐 완전히 제가 속이 타는데,

학생들이 은혜 받겠다고 이 자리에 나와 있는데

만약에 이런 상태에서 기도회를 끝내 버리면 이 아이들이 얼마나 실망할까요?

 

이건 완전히 백마고지의 전투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백마고지에서 이기면 전쟁에서 이기고, 백마고지에서 지면 전쟁에서 지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 집회에서 은혜를 받으면 수련회가 성공이고

그날 사람들의 마음이 푸석푸석해서 숙소로 돌아가면 그것은 완전히 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부담이 큰 지 모릅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느끼지 못했지만 심각한 영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할 때

반드시 영적인 싸움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마귀의 시험을 극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기적이 일어나고 병자가 낫고 죄인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으려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내 믿음으로 극복해야 할 영적인 씨름이 있습니다.

 

이 씨름에서 주저앉으면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일이 가로 막혀 버리고

이 씨름에서 승리하면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많은 신앙의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이 영적인 씨름을 할 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영적인 씨름이 있다는 것을 좋은 징조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저항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저항하는 것이 없이는 이러한 영적인 씨름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영적인 싸움은 참 괴롭습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 기도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무력함을 느끼고 제가 무엇을 해도 이 분위기를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에 저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엎드려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 그대로 기도회를 끝내라고 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

포기하라고 하시면 포기하겠습니다.’ 다 끝난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그 순간에 성경구절 한 구절이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비가 오기를 기도할 때 ‘저 수평선 위에 구름이 있나 보라.’ 했을 때

손바닥 만한 구름 한 점이 떠오른 것처럼, 성경 구절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사무엘상에 있는 구절인데,

다윗과 그 일행이 전쟁을 하러 간 사이에 아말렉이 쳐들어와서 처자식을 잡아간 일입니다.

그래서 돌아와 보니까 처자식은 다 끌려가고 집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이들이 낙심했겠습니까?

그 일행이 다윗을 원망하고 지금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에 다윗이 기도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힘입고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했냐면

‘하나님, 우리가 쫓아가면 그들을 잡겠습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반드시 잡으리라.’

그래서 그들이 아말렉을 쫓아가서 아말렉을 치고

끌어가던 처자식을 도로 다 찾아왔다는 성경구절이 떠올라서

 

기도하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학생들 앞에서 서서

“마귀가 우리를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했지만

우리가 다시 도로 찾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벌써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다같이 일어나서 기도합시다.”하고 제가 기도를 인도하는데

회개하는 기도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학생들 앞에 교만했습니다.

제가 영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학생들 앞에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약속하신 것처럼 저희에게 구원의 기쁨과 성령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학생들에게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기도를 시켜도 분위기가 냉랭하고 답답했는데

그 순간에 빗장이 풀린 것과 같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빗장이 풀린 것과 같은 느낌이 들면서

학생들이 예배당이 떠나갈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이후에 학생들이 저에게 말해주기를

그 때까지만 해도 몸이 차갑고 마음이 냉랭했는데

그 순간에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기도가 나오면서 방언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제가 본 것은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기뻤는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몇 분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이 집회가 그렇게 변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은혜가 더 귀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절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비밀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성경 6절 말씀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은밀한 중에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아주 비밀스러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 영광과 능력이

우리에게 우리의 눈으로 밝히 볼 수 있도록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은밀한 중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담대한 믿음과 인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본문의 <은밀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때로는 내 심령이 메마르고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광야에서 우물을 파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인내하면

때가되면 하나님께서 우물이 터져나오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영적인 승리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 딸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주께서 오셔서 그에게 손을 얹으사 살려주시옵소서.”

이렇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래서 야이로의 집에 가시는 도중에

열 두 해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에 몰래 손을 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때 그냥 지나가셔도 되는데 멈추셔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물으시면서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야이로의 마음 상태를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마음이 타겠습니까?

예수님이 빨리 오셔서 내 딸이 죽기 전에 고쳐 주셔야 되는데

엉뚱한 여자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고 예수님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때 전갈이 오기를

“당신 딸이 죽었나이다. 왜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생각은 ‘그야말로 끝이다. 이제는 끝났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그런 상황인데,

 

그 때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5장 36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이르시기를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야이로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신 이상은

예수님도 믿음으로 사셔야 하기 때문에

 

모든 환경이 적대적이고 어려워 보일지라도

두려워 말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을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러분이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그 집에 가셔서 “달리다굼”하니까 죽었던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외국 설교자는 이 사건에서 교훈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Jesus is never too late." 예수님은 결코 너무 늦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역사하시기에 너무 늦은 경우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그분의 능력도 은밀한 중에 있고

그분의 지혜도 은밀한 중에 있고

복음의 비밀도 은밀한 중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도록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였으나

성령의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은 그러므로 믿음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감정적인 믿음이 아니고 인내하는 믿음이요,

기다리는 믿음이요, 끈기 있는 믿음이요,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인 상황에서도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인줄 믿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소유한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환경이 결코 편안한 환경이 아니고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칠 배나 뜨겁게 달군 풀무불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사자굴속에 던져졌더니 거기에 하나님이 그를 기다리고 계시고,

골리앗이 있는 죽음의 골짜기로 내려가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과 같은 환경에 오히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갔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광야 서편으로 갔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속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셨네.”

 

믿음의 시작은 인간의 끝입니다. 인간의 끝이 믿음의 시작인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우리의 일상적인 환경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여러분, 오늘 상 받는 분이 많이 계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서 여름 휴가철에 전교인 신앙수련회를 갔습니다.

텐트를 치고 취사를 하면서 3박 4일 수련회를 했는데

마지막 저녁 집회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은혜 받는 것을 항상 마지막 순간까지 미룹니다.

그래서 이제 수련회 일정을 은혜롭게 마무리해야 될텐데

교인들 분위기가 돌처럼 굳어있었습니다.

 

분위기가 냉랭하고 아무런 역사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목사님의 마음속에 ‘포기하자’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간증을 하던 어느 여자 권사님이 자기가 아팠던 때의 일을 간증하면서

죽음이란 주제를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는 사람이 생기고 사람들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조금 전 까지만해도 완전히 냉랭하던 분위기가 바뀌면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시작하고 분위기가 뜨거워지고

 

하나님이 과연 이들을 사랑하시고 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을

모든 성도들이 경험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은혜로운 분위기에서 수련회를 마칠 수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믿고 찾고 찾으면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