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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받기를 원하시는 이유 4300

LNCK 2013. 10. 25. 17:26

◈주님이 받기를 원하시는 이유          눅 21:1~4, 눅6:38           03.11.23. 스크랩, 출처, "편집"

                                                                                                                        *관련글 / 하루가 귀한 분들 (강추)

 

◑주님은 예배를 받으시기 원하신다.

 

▲여인이 자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고 향유를 부은 일은

예수님에 대한 예배의 헌신입니다. 그 예배의 행위를 예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그것을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좀 만류하려 했을 것입니다.

서먹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여인의 사정과 형편을 고려할 때

여인이 아무리 헌신을 하려고 해도,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 윗사람으로서의 미덕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성의 정성을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우리의 섬김과 헌신과 경배를, 기꺼이 받으시기 원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사람이 넙죽넙죽 뭘 받기를 좋아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으로서, 자기 백성의 헌신과 경배를 받으신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찾아갔을 때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간 선물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이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앞에 절하고, 경배했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했더니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나의 주 나의 하나님’하면서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지켜보시는 주님

 

예수님은, 왜 민망하게, 과부의 헌금을 지켜보셨을까요?

지켜보신 예수님은, 과부가 두 렙돈(몇 백 원)을 헌금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이 가난한 과부에 대해서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여성이 가난한 과부인데, 무엇으로 생활을 할까, 집에 먹을 양식이 있을까,

예수님이 염려하시는 거예요.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관심을 갖고, 지금 가난한 과부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본문 4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렙돈을 헌금할 때,

그 두 렙돈이 이 여성이 있는 생활비 전부였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그 사실을 아시면서도, 이 여성을 중단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두 렙돈이 이 여성에게 있어서

마지막 생활비라는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럼에도 이 여성이 두 렙돈을 헌금함에 집어넣는 순간에

예수님이 그걸 스톱 시키지 않고 그냥 지켜보십니다.

 

이걸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 마음만 족하다, 마음으로도 족하다,

하나님이 받으신 셈 치고 그거 가져가셔서 생활비로 쓰세요.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셨어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과부(가난한 자의 대표)의 헌신을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 예는, 성경에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엘리야를 도운 사르밧 과부

엘리사를 도운 수넴 여인

오병이어를 드린 소년

 

여러분,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주님이, 부자의 헌신만 받으신다면.. 빈자의 헌신을 받지 않으신다면..

그것도 말이 됩니까?

 

교회에서 가끔 사람들 입에 잘 오르내리는 말이, (목사가 신은 아니지만)

‘담임목사가 부자들 집에만 심방 가기 좋아한다’는 루머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물질, 우리의 소유, 우리의 자원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뭘 보태서, 주님을 도와드릴 수도.. 사실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얼마 안 되는 자기 용돈을 모아서,

어버이날에, 선물 같지도 않은 작은 선물을 사 오는 것,

그걸 보고서, 부모가 기뻐하는 마음.. 주님은 똑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오지에 가서, 현지인들을 위해서

교회, 또는 마을 회관으로 쓸 수 있는 건물을 건축했습니다.

 

현지인들은 너무 가난해서, 도저히 건축비를 일부라도 보탤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는, 준공 축하를 하는 날,

현지인들이, 자기 집에서 키우는 화분이라도 하나, 들고 오기를 바랬습니다.

 

작은 화분 하나라도...

꽃 한 송이라도...

그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별로 부담도 안 되고요...

 

사실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과부처럼, 두 렙돈이라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나의 작은 헌신을 받기 원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 힘든 상황 가운데서

그 ‘내 마음’을 받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헌신을, 주님은 말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켜보시고 과부처럼,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저가 생활비 전부를 넣었도다!’

 

 

◑헌신하는 자를 보고서, 왈가왈부 하지 맙시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다윗이 백성들 보는 앞에서 기쁨으로 춤을 췄습니다.

그랬더니 미갈이 그것을 보고 다윗을 업신여겼다 그랬어요.

그리고 나중에 다윗이 집에 돌아왔을 때 한 마디 했습니다.

‘계집종들 보는 앞에서, 왕이 체통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말하기를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백성들 보라고 춤춘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건 거룩한 것이요,

사람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믿음으로 하는 일에 대해서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과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누구관대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말라, 해도 된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가난한 자를 동정하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

 

여러분 여기에서 놀라운 원리를 발견합니다. 성경을 보면

연약한 사람들, 또 불쌍한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결코 동정하시지 않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아이고 애처로워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사람, 연약한 사람이

강하고 담대하고 자신의 믿음으로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미문가의 앉은뱅이가 구걸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라’ 명령하지 않았습니까?

 

앉은뱅이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는 스스로 일어서려는 노력조차 안 하고, 포기한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명령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라’

그 말씀을 듣고 앉은뱅이가 순종했더니 그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일어나 걸으며,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되는 일을 해야 됩니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을 하지 않고, 내가 기도가 응답될 만한 조건을 드리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이 세상 생각으로 하면은 아마 이 여성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니까 도움을 받아야 된다.’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라도 베풀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 되도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 되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환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해야 되는 일이 있어요. 먼저 베풀어야 되는 것이 있고,

먼저 심어야 되는 것이 있고, 먼저 믿음을 사용해야 될 부분이 있고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도움이 임하게 돼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눅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그러니까 먼저 주라 그랬어요.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고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 원리입니다.

 

▲정리하면,

이 설교문의 제1논지는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받기를 원하신다’입니다.

 

그런데 부자들 것만 받으시지, 아니면 재능이 많은 사람들 것만 받으시지,

가난한 자의 것도 넙죽 받으시고,

아주 가난하고 병든 자의 헌신도.. 가리지 않고 다 받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이 제2논지입니다.

받기만 바라는 자가 되지 말고 ‘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누가 일으켜 주기만 바라기 이전에, 자기 스스로 일어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발로 스스로 일어서려면, 내가 먼저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요,

내가 스스로 일어나려고, 안간 힘을 쓰고, 발버둥을 쳐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난하다고.. 마냥 받기만 바라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가 가난하다고.. 앉은뱅이처럼 평생 주저앉아 있기만 원치 않으십니다.

 

네 발로, 적극적으로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너도 도우는 자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너도 주님께 드리는 자로 살고, 남을 돕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진짜 복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행20:35 

 

만약 제3논지를 말한다면,

‘남의 헌신에 대해서는, 미갈처럼 왈가왈부 하지 말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