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자기관리 1 / 찰스 스펄전 - YouTube
◈1장, 목회자의 자기 관리1 딤전4:16, 유1:12, 벧후1:10, 단12:3 출처보기
Lecture1, The Minister's SelfWatch 1of3
Lectures to my Students by Charles Spurgeon
*원문의 일부만 번역, 영어 전문은, 출처↗를 보세요.
◑1. 설교자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 또한 교리에도 주의를 기울여라” 딤전4:16
한글성경은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라. 또는 살피라.’로 나옵니다.
모든 노동자들은, 자기 농기구나 작업도구를 항상 최상의 상태로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도구의 날이 무디거나, 또는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 도구로 일을 할 때, 힘이 배로 더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이 무딘 도구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애를 써서
결국 일을 마쳐 놓았다 하더라도,
그 결과물이 또한 좋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화가 마이클 안젤로는,
작품 그림을 그릴 때, 붓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미술도구인 붓을, 자기가 직접 제작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자신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종들은,
항상 상태가 좋도록, 다듬어 놓으십니다.
좋은 도구로 먼저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강권적으로 어떤 역사를
우리 인간의 상태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혼자서
다 이루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우리 가운데 드러나는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그들과 동역을 하시는데,
그때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는데,
가장 영적으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종(도구)들이,
하나님께 가장 소중하게, 또한 가장 빈번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 각자 자신도, 스스로 자신을 잘 다듬어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평범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서 사는데요..
그리고 만약 우리 각자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
즉, 연장이 잘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설교를 한다든지, 다른 사역으로 쓰임을 받게 된다면,
그 결과는 당연히 좋지 않을 것입니다.
1% 예외적인 경우로, 사역자가 잘 다듬어 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주님은 그를 통해, 강권적으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수도 있습니다만,
대개의 경우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귀한 사역의 열매들이 나타나려면,
먼저 ‘연장’이 잘 다듬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사도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네 자신을 돌아보라, 즉 네 연장부터 잘 갈고 닦아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역자들은, 자신을 항상 ‘도구’로 여깁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자신을, 최선의 컨디션으로 유지할 줄 압니다.
만약 자기 영적 컨디션을, 아직도 조절할 줄 모르는 사역자가 있다면, ①
그는, 최고 수준의 사역자는, 아직은 아닌 것입니다.
세상 책을 읽든지, 다른 사람과 교제를 하든지,
자기 언어생활이나, 자기 경건생활이
자기 영적 컨디션을 해치지 않고, 도리어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그는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또한 설교자가 되려면, 지적인 훈련도 해야 합니다. ②
그런데 무조건 책만 많이 사 모으는 것, 서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책을 열심히 읽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훈련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자기 감정을 관리 하는 훈련도 스스로 해야 합니다. ③
지적으로 날카로운 사람만 되어서는 안 되고, 마음도 뜨거워야 합니다.
세상에 구원 받지 못하고, 멸망당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울 수 있어야 하고, 비통한 마음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심령이, 항상 좋은 옥토처럼, 상태가 부드러워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웅변적인 목소리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살던 당시는 마이크가 아직 없었던 시대입니다.)
이게 다 자기 도구, 자기 그릇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 개인적 관리에는 등한시하고,
조직적 관리에만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조직을 구성하고 또한 관리하며,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며,
자기 시간을 거기에 대거 투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개인적 관리에 시간을 내지 않고, 공을 들이지 않고,
그저 책이나 사서 모으면서 서재나 꾸미고,
또한 여러 기관을 조직해서, 교회를 조직이나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데만 힘쓴다면,
그는 큰 도끼를 가지고 있으나, 날이 무뎌진 도끼인 셈입니다.
아무리 큰 도끼라도, 날이 무디면, 나무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지적인 관리, 감정적 관리도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영적인 관리입니다.
자기 영혼이, 은혜와 성령과 말씀과 권위로, 항상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날카로운 도끼로, 자기를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도구를 사용하셔서
세상에서 마귀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는 일을
오늘도 계속 해 나가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사역적 은사가, 남달리 많게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요인은 은사, 즉 자기가 가진 탤런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쓰시고, 안 쓰시고 하시는.. 결정적 요인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을 닮은 사람입니다.
성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무시무시한 병기’가 됩니다.
마귀의 나라가, 그 앞에서, 무수히 쓰러지고 패배해서, 뒤로 물러갈 것입니다.
◑2. 설교자가,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약초가, 약효를 잃어버린다면.. 그건 큰 재앙입니다.
약사나 치료사는, 또한 환자는, 그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약초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심한 경우, (과거에 영국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수원이 오염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마을 공동 우물물이나, 상수원에서 공급되는 물을 마셨는데,
그 물 자체가 오염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되는 경우입니다.
설교자가, 자기 자신의 상태를
최상으로, 또는 최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그런 불행과, 불상사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복음을, 참 복음이라고 들은 회중들은,
나중에 그 영적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칼빈주의자들도 대단히 주의해야 합니다.
※참고로 침례교에 속한 스펄전도,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자였습니다.
예정론, 선택, 주권 등 (극단적) 칼빈주의적 설교와 가르침이,
만약에 성도들로 하여금 불경건한 삶을 살게 하는 근거가 된다면,
그건 ‘오염된 물’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극단으로, 자기 공로와 자기 선택으로 구원 받는다는
(극단적) 알미니안주의의 가르침도, ‘오염된 물’이 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설교자나 사역자들은, 자기 목회적 성공이,
주님의 은혜임을 망각하고, 자기가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큰 잘못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그의 큰 목회로) 많은 씨앗을 뿌려도,
실제로 거두는 것은, 아주 적을 것입니다.
여러분, 간혹 전쟁에서 화약이 승패를 가르는 것을 봅니다.
그 군대에 조달된 화약중에, 많은 분량이 불량품이어서,
군인들의 총탄이 제대로 발사되지 않고, 대포가 불발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불량 포탄을 갖고는,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역자들이,
자신의 장비(자기 자신)를, 최선의 상태로 유지 하지 않으면,
영적인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주위를 돌아보십시다.
많은 사역자들에 의해서, 많은 사역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목표를 잃어버렸습니다.
대포를 쏘았는데, 포탄이 다른 데 가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전투는..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코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숫자에 연련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불량품, 불발탄으로는, 전쟁에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좀 조심스런 말이지만,
목회자 자신이 먼저 구원 받아야 합니다. 회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회자의 자기 관리’는
먼저, 자신이 회개하고, 회심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물론 회개하고, 회심을 체험한 목회자라고..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가장 먼저 우선순위를 두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야가
바로 <자기 자신의 영적상태 관리>라는 점입니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사역자입니까?
그 증거는.. 그가 소명 받은 종이라면,
<사역>에 그의 제1 우선순위를 두지 않습니다.
그의 제1 우선순위는, <자기의 영적 관리, 자기 성결>이 됩니다.
만약 여러분의 제1 우선순위가, 자기의 영적 관리, 자기 성결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받은 소명이.. 그게 무엇이든지.. 그건 올바른 소명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하나님의 소명과 부르심은, 그의 종들에게,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라’는 것이, 1차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친밀한 관계는.. ‘성결한 그릇’에게 이루어집니다.
물론 성결하게 살겠다는 자기 노력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기가 쓰실 종들을, 성결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다만 그 종들이, 그런 주님의 섭리에, 응답하고 부응해 가야 합니다.
그 섭리에 자기가 응답하지 않으면..
도끼가 아무리 크고 웅장해도, 날이 무딘 도끼가 되는 셈입니다.
◑3. 사역자는.. 자신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하십시오.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하는 것’은, 아이들 장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로서, 목회자나 사역자들은,
자신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그저 아이들 장난처럼
은근슬쩍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분명히, 철저히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주검이 널린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역자에겐.. 독수리(마귀)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역자는, 그저 표면적인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우물물을 길어내듯이, 깊은 영적 진리들을 퍼 올릴 줄 압니다.
오늘날, 그저 표면적인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자기의 택하심과 부르심부터 굳게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한 후에, 자기가 버림 받을 수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늘 자신의 그릇을 최상의 상태로 준비하는 사람은,
그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꼭 그렇게 ‘버림받는 수준’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우리 각자는 ‘복음을 전하되, 아무 능력도 없는 복음을 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 혹시 내가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영적으로 소경은 아닌지..
-나는 복음을, 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는 않는지..
-나는 복음의 밝은 면만 강조하지는 않는지..
그는 밝은 면만 설교하면서도, 스스로는 지금 어두움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청중 앞에 노래를 열심히 부르면서도, 소리 못 내는 벙어리는 아닌지..
-나는 오케스트라 음악을 들으면서도, 귀가 먹지는 않았는지..
이게 다, 부름 받지 못한 사역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세상에 가끔, 그 직업에 소명 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잘못 해서, 그 직종에 종사하는 일이 있습니다만,
세상 직업은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목회와 사역은.. 다른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회중에게.. 영원히 불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목회자가 되기에 적합한 육적인 은사를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났다 하더라도,
그런 은사나 재능이 중요하지 않고,
기독교 사역에는.. 부르심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종은, 그 증거는,
자기 자신을 먼저 갈고 닦습니다.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우선으로 합니다.
※이것은,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는, 죄를 안 짓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지 않은 종은, 자기 스스로 잘 압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즉 사역)이
자기 스스로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발에 맞지 않는 신을 신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그 맞지도 않는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야 합니다.
마치 갤리선의 노예가 노를 쳐다보기도 싫어하듯이,
그는 스스로, 자기가 맞지도 않은 설교단에서, 속히 내려와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내려오지 않고, 자신의 직업을 계속 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가 보지도 않은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입니다.
혹은 암초가 어디 있는지도 전혀 모르면서도,
뱃길을 안내하는 항해사 navigator 입니다.
그는 가르치지만, 사실은 자기도 모르는 것들을 가르치는 셈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비 없는 구름’이라 표현합니다. 잠25:14, 유1:12.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라는 표현도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게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이, 물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저 멀리에 우물 같은 것이 보입니다.
대상들은,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그 우물로 가 봅니다.
그랬더니, 우물은 있는데... 그 속에 물이 없습니다. 말라버린 것입니다.
그건 얼마나 절망적이며, 얼마나 목숨이 위태로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런 현실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물인줄 알고 찾아가 봤더니, 거기에 생명수가 없어서,
목마른 영혼들이 고갈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수가 말라버린 사역자, 또는 교회는,
거기에 사람만 많이 모인다고.. 스스로 만족하기 보다는,
차라리 문을 닫아놓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수가 다시 나올 때까지...
그래야 목마른 심령들이 다른 곳을 찾아가서
그들의 영혼이 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스펄전 시대에) 제가 보니까
구원 받지 못한 (강력한 회심을 체험하지 못한) 설교자가 있고,
거기에 헌금이 모이고, 비싼 오르간을 구입하고,
그래서 귀족층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드는.. 그런 교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제 스펄전의 생각인데, 사실 이것은 크나큰 재앙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데, 오페라 극장 가듯이.. 다니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에 가서, 그들의 음악, 그들의 세련된 모션, 그들의 웅변.. 그것들을
청중들이 오페라 공연을 즐기듯이 하면서..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그게 왜 재앙인가 하면.. 그게 눈과 귀에는 즐거울지 몰라도,
그게 천국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실 오페라처럼, 잘 하지도 못합니다.)
평소에는 전혀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지 못하고,
전혀 경건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는, 무슨 경건한 신자인 척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게 다 회심을 체험하지 못한, 아직 중생하지 못한 신자들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강대상 앞에서 세련된 매너로 예배를 인도하더라도
그의 평소의 삶이, 경건하지 못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마귀의 종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나, 성도나 구분할 것없이,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벧후1:10
▲이사야14:9~10에 ‘너도 우리와 같이 되었느냐?’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정복자 바벨론 왕에 의해,
죽은 영웅과 열왕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환영하며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도다’라며, 바벨론 왕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지하세계에서 바벨론 왕을 환영하는 축하 잔치를 준비하느라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바벨론 왕들이 죽였던 모든 왕들이
지하의 세계에 들어오는, 바벨론 왕을 환영하기 위하여 부산을 떨고
열국의 왕들이 그의 보좌에서 일어나서 합창을 부릅니다.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사14:10.
중생하지 못한 설교자는,
지하의 세계(지옥)에서, 그런 똑같은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설교하던 너도, 우리와 같이 되었느냐?”
“의사야, 네 병은 고칠 수 없었더냐?”
※스펄전 목사님의 성경실력이 대단합니다. 이사야서를 꿰뚫고 있습니다/주.
▲저 스펄전은, 존 번연의 <지옥에서 들려오는 신음, Sighs from Hell>
이란 책을 읽고서, 종종 경각심을 되새깁니다.
제 두 귀를 울리는, 그 책의 내용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어떤 설교는, 영혼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쥐약 rats-bane이 되는 설교도 있습니다.
나중에 여러분의 교회 식구들이, 지옥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우리 죄에 대해서 설교해 주기를.. 꺼려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그렇게 후하게 대접했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했습니다.”
이게 지옥에 간 신자들의 탄식인데.. 그걸 듣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장차 그걸 듣는 설교자가 만약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을 의의 길로 돌아서게 한 자는, 별과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단12:3)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자신이 먼저 ‘의의 길’로 반드시 돌아서야 합니다.
진짜 소명 받은 목회자, 진정 회심한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계속 지옥에 가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자신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둡니다.
만약 그런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설교자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테일러는 많은 사람들의 옷을 만들어주지만,
자기는 그 옷을 입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요리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지만,
자기는 그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설교자는 다른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증거한 말씀으로, 자기가 먼저 살아야 합니다.
남들은 풍성하게 먹이고, 자기는 전혀 먹지 못해서 고갈되어 죽는..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먹지 못하면.. 남도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2%의 예외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요.
▲여러분, 그런 사람이 아마 없겠지만,
‘내가 목사가 되었으니, 나는 구원 받은 것이 틀림없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라’고 하신 권면은, 딤전4:16.
디모데가 이미 목회자인데, 그에게 주신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되었다고.. 안심하지 마시고
자기 자신을 먼저 주의 깊게 돌아볼 때,
결국 다른 사람도 잘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전제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반대로 무시하고 경멸하는데,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했다가는.. 큰일 나지요.
지금 먼저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는 것이,
결국은 이웃을, 즉 목회를 잘 돌아보는 것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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